서울 사당동에서 07시에 출발하여 광주광역시 무등산자락 국립공원원효분소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11시였습니다. 시내를 벗어나 원효분소로 가는 길은 아흔아홉 굽이는 됨직한 편도1차선 길을 대형버스가 마치 뱀처럼 기어가듯 합니다. 그런데 놀란 것은 당연히 조금쯤은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체격도 있을 중년 남자라고 믿었던 그 큰 버스를 몰고 온 운전기사였습니다. 예쁜 얼굴에 옛날 이화여고생처럼 목 아래 어께부근 까지 두 갈래머리로 묶었고 155m정도의 키에 가녀리고 호리호리해서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늘씬한 몸매에 2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앳된 분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그 큰 대형버스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미로처럼 꺾이고 상가가 즐비한 골목길처럼 협소하고 좁은 비탈진 편도1차선 길을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산길을 거슬러 왔다는 것에 믿기지 않아 한참을 멍하니 남 무안하도록 쳐다봤습니다. 젊은 남자들이여, 모든 분야에서 좀 더 긴장하고 분발하시라 그대들 설자리는 제대로 지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끝으로 이 사진은 앞으로 무등산을 가실 분들을 위한 기록성 사진임을 말씀드립니다.
국립공원원호사지구탐방안내소
광주광역시 도심 동쪽을 에워싸고 웅대하고 솟은 무등산은 소백산맥의 남단자맥으로 북쪽은 나주평야, 남쪽은 남령산지의 경계에 자리한 해발 1,187m 높이의 진산으로 2012년 12월27일 국립공원 제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최고봉인 천왕봉 일대는 立石臺, 廣石臺와 원효계곡, 용추계곡 등 수려한 자연경관이 있습니다. 특히 정상 가까이 있는 원기둥 모양의 節理의 기암괴석이 石柵을 두른 듯 치솟아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證心寺, 元曉寺 등의 사찰과 보물제600호 석조여래좌상을 소장하고 있는 藥師庵,圭峰庵, 觀音庵등의 문화유적이 있습니다.
중봉삼거리까지 옛길과 차도(군부대 및 방송국송신소 소속차량 및 순환버스 전용도로)를 이용하고 중봉 삼거리에서 서석대를 거쳐 천왕봉 등성에서 입석대를 거쳐 장불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중봉을 거쳐 중머리재에서 증심사(證心寺) 로 하산할 예정입니다.
탐방관리소를 지나자마자 좌측 무등산옛길로 들어서는 들머리입니다.
"무등산옛길"이란 푯말이 아니더라도 호젓한 길이 뿜어내는 정경이 옛 정취에 흠뻑 젖어들게 합니다.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조릿대가 보입니다.
돌이 널려있는 길인가 하면 다시 흙길입니다.
온갖 나무들 무성한 상쾌한 오솔길은 능선을 고동의 무늬처럼 감아오릅니다.
그렇게 옛길을 체험하고나니 대로가 나옵니다. 대로 우측으로 옆에 중머리재와 동화사터와 늦재로 가는 옛길이 보입니다.
넓은 대로 변 나무들이 아름답게 단풍이 들어 눈을 즐겁게 합니다.
굽이진 길가에 광주시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를 품고 있는 경우는 전세계적으로 무등산과 광주시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무등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큰 골짜기들이 여러 갈래로 나 있어 무등산이 광주를 품은 듯 보인다하여 광주시민들은 무등산을 어머니산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광주시 모습입니다.
간혹 골짜기에는 등성이에서 무너져 내렸을 많은 너덜겅들이 쌓여 있습니다.
작은 돌들이 깔린 이 길은 산행하기에는 미끄럽고 쉽게 발에 피로를 줍니다.
바람에 한들거리는 억새꽃 넘어 웅장하고 넉넉한 천왕봉 일대가 가슴에 꽉차오르는 벅찬 느낌을 줍니다.
도로 옆에 조경으로 세운 돌들의 모양에서 무등산이 입석으로 유명한 주상절리가 있음을 암시와 함께 미적 감각을 엿보여 예향의 도시임을 은근히 암시합니다.
여기서 우측은 중봉, 앞으로는 장불재, 좌측으로는 서석대와 입석대 천왕봉, 그리고 북봉으로 갈리는 곳입니다. 저는 좌측 서석대를 거쳐 장군봉을 보고 입석을 거쳐 장불재에서 점심을 먹고 이 자리를 거쳐 중봉으로 해서 늦재와 당산나무를 보고 증심사로 하산할 생각입니다.
서석재로 오르는 들머리입니다. 산세가 드넓고 완만하여 오르는데 무리가 없을 것같아 좋고 바쁠 일 없이 사색하며 주변을 살펴볼 수 있겟습니다.
평편한 판석이 깔린 사이사이 잡초가 자라 자연스럽게 운치가 있습니다.
도로에서 좀 올라오니 생각지도 않은 초소가 있습니다. 산불감시나 겨울철 등산객 관리를 위한 시설이겠습니다.
제법 경사진 돌계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길을 올라가다 문득 생각이납니다. 1박2일에서 김종민이 힘겹게 오르던 모습이..
잠시 쉬며 돌아보니 중봉 옆 MBC방송국송신탑이 보입니다.
다시 앞으로 오르면서 바라보니 절리된 입석들이 보이는 곳 바로 瑞石臺입니다.
서석대로 가는 길은 바위돌이 널려있습니다. 급경사 없이 무난한 언덕 같은 오름이지만 짧지 않은 거리에 힘은 듭니다.
좌측을 보니 나무숲 뒤로 입석들이 병풍처럼 둘려있습니다. 바위가 주는 질감의 느낌일까 과묵하고 말없는 무뚝뚝한 남정네들을 보는 느낌입니다.
절지도 아름다운 참나무 뒤로 잠복해 있는 산적같은 느낌이 드는 주상절리, 검은 빛깔이어서 일까
신비로운 자연의 산물 주상절리가 풍화로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서석대/瑞石臺>
좋은 기운 상서로운 돌(瑞石臺)이란 이름은 고대 선돌숭배사상의 표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입구에 세워 적이나 질병으로부터 마을의 안녕을 수호하는 信仰的 神像으로 세웠던 입석들이 그 예입니다. 서석대(1,100m)는 무등산 주상절리(柱狀節理)의 일부로 입석대보다 풍화작용을 덜 입어 한 면이1m 미만인 돌기둥들이 약 50m에 걸쳐 동-서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습니다. 이 병풍을 두른 듯 보이는 서석대에 저녁노을이 비추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하여' 수정병풍'이라고도 불립니다. 무등산 주상절리대의 대표격인 입석대와 더불어 2005년 12월16일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 보호 받고 있습니다.
주상절리(柱狀節理)로 이루어진 이 바위가 언제까지 이 모습으로 견뎌줄지..
다시 발길을 옮겨 올라가며 언제 다시 볼까 싶어 돌아서 다시 내려다봅니다.
등성이에 올라서니 환경보호를 위해 공사가 한창입니다. 국립공원으로 승격한지 10개월, 그 면면을 갖추어가고 있습니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는 황금물결이 파도를 칩니다. 온 산을 금으로 입힐 양 바람을 타고 밀려오고 또 밀려갑니다.
천왕봉 우측 산기슭 풍경.
천왕봉을 향해 가는데 앞에 철조망이 앞을 막아섭니다. 이건 뭐지! 싶어 멈췄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납니다. '통제구역'이라고 아차 싶어 돌아서나왔던 곳입니다.
나오기 전에 좌측 바위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다시 남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기 전에 이정표를 보니 입석대가 500m에 있고 장불재가 900m거리에 있습니다.
입석대로 내려가는 능선 언저리에는 잘려나간 나무들의 등걸처럼 주상절리들이 무너져 내려 밑동만 주춧돌처럼 남았습니다.
무너져 내린 로마의 한 신전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고대 유적을 연상 시키는 주상절리 지대에 몰려 있는 이 분들을 아울러 보자니, 고적 답사하는 건지, 등산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됩니다.
지나오면서 참 예쁜 곳이다 싶어 다시 돌아보며 드는 생각은, 이대로 방치 말고 보존해야할 가치가 충분한데 싶어 안타깝습니다.
앞서 길을 열어가며 워키토키를 들고 후미를 챙기는 대원에게 송신을 하고 있는 어느 산악회대장, 하지만 왠지 외로움이 묻어난다. 어떤 일에서나 무리를 이끈다는 것은 멋지고 누구라도 한 번 쯤은 오르고 싶은 위치이지만, 외롭고 어려운 자리 아닌가!
억새꽃 서걱이는 노래에 마음은 들뜨는데, 발길마다 놓인 주상절리의 조각들은 세월의 덧없음을 주절이고 있다.
길지 않은 거리를 내려오며 몇 번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지..
창이라도 세워놓은 듯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날카로운 면모를 지닌 금강산이나 설악산과 다르게 넉넉하고 웅장한 무등산은 지리산의 한 면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승천암>
안내글에 의하면 이 부근에 승천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답니다. 이 암자 부근에서 무엇엔가 쫓기던 산양을 숨겨준 일이 있었는데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했답니다. 얼마 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곧장 스님을 풀어주고 승천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입니다.
1968년 겨울부터 1971 늦은 봄까지 광주에서 군복무를 하면서도 와보지 못한 무등산, 상무대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던 그 넉넉하고 웅장한 품을 그리워 했는데, 그리도 보고 싶었던 아쉬움은 이런 숨은 비경이었구나 그 때는 1급 군사지역이어서 올 수도 없었지만..
남성의 묵직함을 연상케 하는 검은 바위에 백조처럼 하얀 억새꽃이 여성스러움으로 대조적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무등산..
이 바위들의 형상을 보자니 강철봉(high steel bar)을 붉게 달구어 시안화나트륨(cyanide)을 묻혀 다시 달궜다가 차가운 물에 그대로 담구면 물속에서 요동을 칩니다. 열이 식어 쇠를 꺼내보면 너무 강해서 표면이 하얗고 토막 낸 것처럼 몇 개로 잘려져 있듯이 꼭 그런 느낌이 와 닿습니다.
본대로 그냥 바윗돌이지만 보아도 봐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운 구성미가 있습니다.
석상(石像)을 세워놓은 것 같은 주상절리 아래는 아늑한 잔디밭처럼 평편하고 아담한 공지가 있어 마치 선사인들이 天祭를 올리던 祭壇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입석대/立石臺>
입석대에는 거대한 선돌들이 마치 거인의 위로 향해 세운 손처럼 둘려져 있는 앞에는 봄날 햇살도 다사롭게 내리는 뒷동산 아늑한 잔디밭처럼 평편하고 아담한 공지가 있어 마치 선사시대의 제사의례를 행하는 제단같은 느낌을 갖게하는 곳입니다. 한 면이1~2m인 5~6각 또는 7~8각의 돌기둥 30여개가 수직으로 솟아 40여m 동서로 줄지어 서 있습니다. 立石은 순수 우리말로 선돌이라 뜻으로 고대 선사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맥을 이어온 우리 민족신앙의 중요한 표상이었습니다. 서석대와 더불어 무등산 주상절리대 대표적인 천연기념물 제465호입니다.
입석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 대원들을 느긋이 바라보고 있는 대장은 입석에는 전현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대원들의 안전을 챙기려는 생각뿐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나 또한 몇 번의 윤회를 한 때에 지금의 너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님 무어져 내린 너덜겅을 볼까..
입석과 빨간 홍매가 조합되어 또 다른 아름다움이어라.
<무등산의 주상절리>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을 때 수축되어 생기는 절리 중에 단면의 형태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기둥모양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을 말합니다. 무등산 주상절리는 약 7천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지질학자들은 보고 있으며 서석대, 입석대, 규봉이 대표적입니다.
입석대, 규봉은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둥모양이지만 서석대는 풍화가 덜 진행되어 병풍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정상천왕을 중심으로 산비탈에 있는 너덜겅은 이러한 돌기둥이 무너져 쌓인 것입니다. 서있는 바위나, 너덜겅들은 암석의 생성과 풍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희귀한 자연유적임으로 서석대와 입석대를 천연기념물로 정하여 보호하는 것입니다.
주상절리를 보노라니 마치 석상들이 모여 집회를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억새꽃 사잇길을 헤쳐가는 발길에 스치는 소리 서걱서걱 낭만이 피어 오른다.
장불재는 넓은 마당이었습니다. 본디 군부대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원효사에서 이곳 장불재까지 버스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파란하늘, 붉게 물든 단풍, 울퉁불퉁 검은 너덜겅이 아름다운 자연의 한 모습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아름다운 이 풍경 액자에 담아 벽에라도 걸고 싶습니다.
어느새 휘돌아 다시 중봉삼거리에 섰습니다.
중봉을 바라보고 오르는 길입니다.
봉우리의 철탑은 mbc 송신소입니다.
중봉으로 가는 길에 우측의 풍경
중봉 정상입니다.
중봉 정상에서
중봉에서 mbc송신소를 바라본 모양입니다.
mbc송신탑으로 가던 도중 뒤돌아본 중봉의 모습입니다.
mbc송신소에서 바라본 중봉입니다.
mbc송신소 동쪽의 완만하고 넉넉한 무등산의 모습입니다.
중봉에서 바라본 서석대와 천왕봉입니다.
중봉에서 중머리재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우뚝 솟아오른 검은 입석무리와 흰색의 억새꽃이 무척 잘 어울립니다.
중머리재로 내려가는 길목입니다.
자연으로 이루어진 입석들이 조선조 왕릉 앞에 세운 인물상을 보는 느낌이 듭니다.
나란히 솟아 있는 천왕봉가 서석재를 향해 망부석처럼 서있는 입석들이 자녀를 거느린 지어미가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형상처럼 보입니다.
<중머리재> 머리털(초목)이 없어서 붙여진 이름 같습니다.
중머리재는 여러 방향으로 갈리는 길목입니다.
증심사 방향으로 길을 들어섭니다. 증심사까지의 거리는 2km 입니다.
증심사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이리가나 저리가나 증심사에 도달할 수 있느데 한 쪽은 2km거리고, 다른 한 쪽은 1.8km입니다. 짧은 길은 험하고, 먼 길은 조금 수월하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광주에 산다는 학생들입니다. 조선대에 교수로 있는 후배가 있어 혹시 조선대학생들인가 싶어 대화를 가져 봤습니다.
중머리재에서 600m 내려온 위치에 있는 쉼터입니다.
당산나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450년간 이 자리를 지켜온 당산나무입니다.
당산나무 옆에 있는 단감나무입니다.
<증심사/ 證心寺>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은 위로 제석천을 보필하고 북쪽을 수호하며 아래로는 팔부중을 지배하여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보호합니다. 아귀를 발로 밟고 비파를 퉁기고 있으시네요.
이제는 다리도 좀 무겁고 물도 떨어져 어디 마실 물이라도 없나 싶어 옆을 보니 높게 쌓아올린 축대위에 날아오를 듯이 양날개를 쫙 편 팔작지붕의 고풍스런 절이 보입니다. 이 건 웬 시루떡인가 싶어 무거웠던 다리도 잊은 채 절 언덕배기를 한 달음에 뛰어 올라갔습니다. 아름다운 산자락에 호젓한 산사란 그 어느 풍경 못잖은 운치 있는 경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디 고승들은 풍수에 밝아 명당을 찾아 이렇게 절을 짓고 고요한 심정을 다스릴 수 있는 안목이 뛰어난 분들이지요.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절로, 기록에 따르면 철감선사 도윤(798∼868)이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지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려 1970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각종 부속 건물들을 차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의 건물로는 대웅전, 오백전, 지장전, 비로전을 비롯하여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가 있습니다. 이 중 오백전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오백전은 대웅전 뒤에 있는 건물로 앞면 3칸 · 옆면 1칸 규모이며, 안쪽에는 오백 나한상을 모시고 있는데 조선 세종 25년(1443) 절을 고쳐 세울 때 지은 것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 건물로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비로전에는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증심사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31호)을 비롯하여 삼층석탑(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과 석조보살입상(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이 있습니다.
범종각/梵鐘閣
오백나한은 아라한과를 얻은 오백비구를 말하며 아라한과는 아라한이 이른 최고의 경지로서 이를 깨달은 이들은 더 이상 생사윤회에 태어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 하며 매우 덕이 높은 성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증심사의 오백나한은 오백전 건물과 함께 1443년 김방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경내 대부분의 건물이 1951년 4월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으나 오백전 만은 다행히 화마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증심사 오백전은 600여 년의 역사와 함께 기도성취를 대표하는 전각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백전에는 석가모니불, 10대 제자, 5백나한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고승과 스님들의 부도와 탑비
무등산 증심사일주문
무등산 들머리에는 시장을 방불케 합니다. 없는 것이 없을 만큼 등산객이나 여행자로 붐빕니다. 시내 중심가에 버금가는 곳입니다.
어느 집을 들어가던 나올 때 음식값 아까운 생각이 없다는 전라도 음식맛은 잘 아실 테고, 생전에 음식점에서 이렇게 많은 나물이 나오는 밥상을 받아보기도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물만 21가지에 북어조림, 돼지수육, 각종쌈류, 빈대떡까지 단돈 6천원 입니다. 한 상에 사인분, 2만4천윈, 상에 모두 놓을 수가 없어 나물을 겹쳐 놓은 상태입니다.
2013년 10월26일 광주에서 고맙습니다. <香仁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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