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괴시마을.이색 유허지(槐市村 . 牧隱 有墟地)

鄕香 2013. 1. 11. 18:44

 

<괴시마을.이색 유허지 / 槐市村 . 牧隱 有墟地>(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가 있어 호지촌'이라 부르다가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선생이 문장으로써 원(元)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박사(歐陽博士, 歐陽玄)의 괴시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영해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남동쪽의 망일봉(望日峰)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세(山勢)가 마을을 입(入)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地形)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들이 서남향(西南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려말에 함창 김씨(咸昌 金氏)가 마을에 처음 입주(入住)하였고, 그 후 조선 명종(明宗1545-1567) 년간에는 수안 김씨(遂安 金氏)와 영해 신씨(寧海 申氏), 인조(仁祖)8년(1630)에는 영양 남씨(英陽 南氏)가 始居하였으나, 그 후 3姓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 남씨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괴시마을은 경북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통 건물이 매우 잘 보존되고 있으며 문화와 예절이 훌륭하게 전승(傳承)되어오고 있다고 한다. 마을 내에는 영양 남씨 괴시파종댁(槐市派宗宅)을 비롯하여 여러 지정문화재와 古가옥 30여 호가 밀집되어 있어 조상들의 생활과 멋을 엿볼 수 있는 전통 문화마을이다. 그러나 추운날씨에 겨울철이라서 인지 가옥마다 문이 굳게 닫혀있고 저녁녘이어서 인지 마을에는 오가는 이 없이 고적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다.   

 

 

 

 

<영감댁/令監宅>

이 건물은 호은(濠隱) 남흥수(南興壽1813-1899)공이 1847년경 건립하였으며 1938년 호은 공의 증손 남대철이(南大轍)이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1950년대까지는 대문채, 방앗간, 마굿간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습니다. 

정침은 정면4칸, 측면6칸의 □자형 건물로 안채 우측 상방 외부에 튓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상방 외부에 퇴칸을 두어 튓마루를 설치한 수법은 경상도지역에서 흔히 채택되는 방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고 있고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습니다.

 

호은공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門人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교분이 두터웠다 하며 동의계(同義契)와 접소(接所)를 설치하여 빈민규휼에 앞장섰고 , 괴호서숙(槐濠書塾)을 영건(營建)하여 후학교육에도 힘썼다고 합니다.

 

 

 

<천전댁/川前宅>

이 가옥은 남유공(南有鏞)공이 1876년(光緖2年)에 건립한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건축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 중문간채가 且자형태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속칭 날개집이라 불리는 유형에 속합니다. 특히 사랑채는 중문의 우측 앞에 자리 잡고 있는데, 중문칸보다 건물을 높게 세우고 별도로 팔작지붕으로 꾸며 독립된 건물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추녀의 곡선이 빼어나 더욱 더 아름답습니다.

 

 

 

<물소고택/勿小窩古宅>

조선조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만(勿小窩 南澤萬)공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종손인 남우진(南有鎭)이 건립한 집으로 1864년에 중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건물 출입구에는 남여의 생활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는 담이 높게 쌓여 있으며 관련 건물에 물소와서당이 있습니다.

 

<해촌고택/海村古宅>

조선 영조 31년(1775)에 해촌 남극만(海村 南極萬)공이 건축하였으며, 고종15년(1878)에 보수하였습니다. 정면4칸, 측면7칸의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채는 정침과 아랫방, 중문, 큰 사랑 및 작은 사랑이 배치되어 있어 주택의 평면과 구성공간이 변화하는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영은고택/瀛隱古宅>

 

 

 

이 건물은 현소유자의 5대조인 영은 남공수(南公壽1793-1875)가 1871년(光緖7)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건물은 정면4칸, 측면4칸 규모의  □자형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부 안 대청 우측 상방 전면에 마루를 두어 통래칸으로 사용하였는데 통래칸은 영덕지방에서 흔히 나타나는 예로 지역성을 띠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마을 내 다른 가옥과 달리 전면 좌.우측에 처마를 달아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팔작지붕의 박공부분이 정면으로 보이게 한 것이 이 주택의 튿징입니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영덕지방의 지역성을 나타내주는 편면구성과 보기드문 지붕형태 등 건축학적 가치가 있는 건물입니다. 

 (광서(光緖)는 청나라 덕종 광서제의 연호(年號)로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쓰였습니다.) 

 

<경주택/慶州宅>

이 고택은 함창 김씨, 수안 김씨, 영해 신씨, 신안 주씨 등이 한 마을을 이루고 있을 당시, 수안 김씨가 살았던 건물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이 마을에서 천전댁과 더불어 별도의 대문채가 있습니다.

 

 

< 목은 이색 기념관/牧隱 李穡 記念館>

괴시마을 동편 연화산이라는 낮은 산 중턱에 위치한 고려 때 충신 목은 이색의 기념관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드넓은 영해평야(寧海平野)가 펼쳐있고, 그 뒷편으로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의 크고 작은 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으며, 동으로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창해(滄海)가 펼쳐 있는 이곳은 고려 말 정치가, 대학자이며 大文豪이었던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유허(遺墟)입니다. 선생의 본관은 韓山, 시호는 文靖이며,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 함창 金氏를 사이에서 이곳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무가정(無價亭)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20세에 부친 가정공이 머물던 元나라에서 유학하였으며, 귀국 후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40세에 판개성부사 겸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고 47세에 왕명으로 영덕군 창수면 출신인 나옹선사(懶翁禪士)의 비문을 지었습니다.(撰) 64세에는 벽상공신삼중대광 한산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韓山府院君 領藝文春秋館事)에 올랐습니다. 65세때에 조선 개국에 의해 고려가 亡했으나 고려조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며 마침내 69세에 여주의 남한강 청심루(淸心樓)아래 연자탄(燕子灘)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생전 고향 영덕을 잊지 않은 선생은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와 유사정기(流沙亭記)외 20여수의 시가 있어 당시 고향에 대한 선생의 생각과 당시의 풍습과 문화를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6,000여수의 시문과 성리학을 진착시킨 대학자 목은 선생의 인연을 숭앙하고자 선생의 자취가 남은 이곳 유허에 유적지를 조성하였답니다. 

 

<목은 유허 기념관 전경>

 

 

 

 

 

<연화산 홍연암/蓮華山紅蓮庵>

목은 이색 기념관 좌측 인근의 암자로서, 지는 석양빛에 붉게 물들어 이름 그대로 붉은 암자가 되었습니다.  

 

 

 

 

 

홍련암에서 내려다 본 영해평야(寧海平野)와 괴시마을 일부입니다.

 

 

영해면 시가지(寧海面 市街)와 영해평야(寧海平野) 그리고 괴시마을(槐市村)

 

 

2012년12월24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