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영덕 블루로드(해맞이공원/풍력발전단지)

鄕香 2013. 1. 5. 11:17

 

여기에 사진들은 壬辰年 한 해가 저물어가는 2012년24일 영덕군내 한 순간들의 풍경들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계절과 세월은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 되겠지만, 그 풍경과 사람은 다시 올 수 없을 것입니다. 나 자신부터 말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순간의 모습과 생각에 소홀할 수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겠지요. 내가 어디에서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하든 그 순간의 흐름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생의 한 추억이요 세월이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창포말 등대>

 

 

 

 

 

 

 

 

 

 

 

 

 

 

 

 

<창포말등대>

 

 

 

 

남쪽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이 언덕에 초서로 쓴 시 한 수가 마음을 초연하게 합니다.  

 

<고산 윤선도 시 / 詩 孤山 尹善道>

 

去歲中秋在南海 / (거세중추재남해) / 지난해 중추에는 남해에 있으며

茅詹待月水雲昏 / (모첨대월수운혼) / 수운이 저물녘 모첨에서 달을 맞았네.

那知此夜東溟上 / (나지차야동명상) / 어찌 알았으라 이 밤 동해 바닷가에서

坐對淸光憶故園 / (좌대청광억고원) / 맑은 달빛 마주한 채 옛 동산 그리워할 줄..

 

雲消風定絶纖埃 / (운소풍정절섬애) / 구름 잦아들고 바람 가라앉아 끊어지니 

正是幽人玩月來 / (정시유인완월래) / 바로 숨어사는 이, 달 구경하러 오는 때로다. 

敢爲淸遊煩嘿禱 / (감위청유번묵도) / 감히 청유를 위해 힘들이며 말없이 비는데

龍鍾應被海仙哀 / (용종응피해선애) / 늙고 병든 모습 해선께 불쌍히 여겨지리.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년 6월 22일 ~ 1671년 6월 11일)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 작가, 정치가입니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로 태어나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가 되었으며 화가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5대외조부입니다. 그는 1612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조정(광해군)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獄死)와 북인 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등의 횡포를 규탄 했다가 함경도와 경상도 기장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의금부도사(1623)가 되었으나 이내 사직하고 낙향 하였으며, 인조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다 봉림대군.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大君師父)로 발탁되었습니다. 별시문과 초시 장원(1628), 형조정랑(1629), 한성부서윤(1632), 중광문과 급제(1633), 중추부첨지사(1657), 동부승지(1658)를 지냈으며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현종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효종 때는 송시열과 쌍벽을 이룬 학자이자 정치가로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의 선봉장이었습니다. 1차 예송논쟁 때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희빈 김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서인의 맹공을 받고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하여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의 사부'를 지낸 점 등으로 참수를 면 할 수 있었습니다. 윤선도는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 ‘어부사시서‘로 유명합니다. 그의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습니다. 현종9년(1667년)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유배지에서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본관은 海南이고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시호는 충헌(忠憲)입니다.

 

 

 

 

<C-123K(Provider)>

1954년 미국 페어 차일드(Fairchild)社가 체이스(Chase)社의 XC-123을 기초로 제작하여 월남전 당시 병력 및 화물 수송, 약제 살포 등의 임무에 활용했던 전술 수송기입니다. 우리 공군에서는 현대戰에서 전술 공수의 중요성에 따라 1973년 7월9일 동 항공기를 최초 도입한 이래 6년 동안 총 22대를 도입, 부대 이동 및 전개, 전투 지역 내에서의 군사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인원, 장비, 보급물자 수송, 공중화물 투하 등의 임무수행에 활용하였습니다. 이 항공기는 총 7만여 회의 비행을 통해 7만3천명의 인원과 1만8천여 톤의 화물을 공수함은 물론 대간첩작전, 수재민 및 조난어선 구조 등의 탐색구조 활동에도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1994년 12월31일 퇴역하였답니다. 승무원4명.

 

 

<T-37C(TWEET)훈련기>

이 항공기는 미국 Cessna社가 개발한 쌍발엔진의 기초훈련기로서 제트기의 조종과 계기형태 및 야간 비행술을 교육시키기도록 고안된 최초의 '제트훈련기'라고 합니다.

한국공군은 1973년 6월 무장능력이 추가된 이 항공기를 총 60여대를 도입하여 전투조종사 양성을 위한 훈련용으로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전시된 이 항공기는 31여 년간 10,500시간을 비행하여 KT-1(웅비) 항공기에 그 임무를 인계하고 2004년 2월29일 퇴역하였다고 합니다. 무장: 기관총 7.62mm 4문, 로켓트 LAU-68 2기, 폭탄 250파운드 2발 승무원2명.

 

 

<O-2A(Sky Master)관측,통제기>

미국 Cessna社에서 개발한 쌍발엔진의 Model 337을 군용형으로 도입하여 연락 및 관측기로 사용하였으며 1964년 최초 비행한 0-2A는 전방 통제기로 사용하여 왔으며 전시된 이 항공기는 1974년 9월9일 도입되어, 32년 동안 공군사상 최장 무사고 비행기록(11만 2,800시간)을 수립하였고 2006년 KO-1(지속 통제기)이 배치됨에 따라 그 임무을 넘겨주고 2006년 12월30일 되역하였더고 합니다. 

무장: 기관총 7,62mm, 로켓4. 승무원 4인. 

 

 

 

 

 

<봉수대>

 

 

 

 

 

2012년12월24일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