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울진 불영사 (佛影寺)

鄕香 2012. 12. 28. 14:27

 

<불영계곡/佛影溪谷(名勝第6號)>

울진군 서면 하원리에서 근남면 행곡리까지 15km에 걸쳐있는 계곡으로 곳곳에 기암괴석과 맑은 물, 그리고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경관이 빼어난 곳입니다. 계곡과 주변 경관이 조화로워 계절 따라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며 전망이 좋은 중간지점에 두개의 정자 (선유정.불영정)을 세워 탐방객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키가 크고 오래된 붉은 소나무(赤松)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남방계와 북방계의 동식물이 공존하는 접경으로 학술적인 탐사대상이 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산양이 살고 진귀한 식물들이 자생하며 맑은 물에는 은어, 뱀장어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는 곳입니다.

 

 

<사랑바위>

이 바위는 봉화에서 울진방향으로 가는 36번 국도 불영계곡에서 불영사 바로 전 우측 계곡 옆 가파른 곳에 있는 바위로 두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입니다.  

 

 

 

<붉은 소나무/赤松>

이곳에는 포피가 붉고 절지가 멋지게 틀어지고 뻗은 아름다운 큰 적송들이 주변의 산세와 계곡의 맑은 물과 어우러져 멋진 동양화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불영계곡, 부처님의 모습이 물위에 머물러 자비를 베푸는 곳

 

 

<불영사/佛影寺>

울진군 서면 하원리 천축산)天竺山에 자리한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5년(651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한 오래된 사찰로 서쪽 산 등성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절 앞 연못에 비침으로 이름하여 佛影寺라 하였으며 1968년부터 비구니 선원으로 수행도량으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산태국(山太極) 수태극(水太極) 형국의 吉地에 자리잡은 불영사는 조선 숙종때 인현왕후 불사의 은덕을 기리는 원당(願堂)과 아울러 왕후에게 현몽하였다는 양성당선사(養性堂禪師)를 비롯하여 전염병으로 급사한 縣令 백극제(白克齊)가 부인 이씨의 지극한 기도공덕으로 환생하였다는 설화 등 수많은 불사공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영사는 인고의 세월속에 수많은 전란과 화재로 크고 작은 중건.중수를 거듭하여 왔으며 대웅보전(大雄寶殿/寶物1201號), 응진전(應眞殿/寶物730號), 후불탱화(後佛幀畵/寶物1272號), 삼층석탑(三層石塔/慶北道有形文化財135號), 부도(浮屠//慶北道有形文化財162號) 외에 대웅보전 기단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 등 많은 문화재가 사찰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게 뻗은 송림 사이 널찍한 길로 들어가는 길보다 소박하고 호젓한 오솔길이었으면 보기에 더 좋았을 것을.. 

 

 

나는 구름따라 산사로 가지만, 저 여인들은 가족의 복을 치성 드리러 가는 걸까, 유유자적 가벼운 걸음걸이는 근신 걱정은 없는 것 같고... 

 

 

양지바른 산자락 낙엽 쌓인 곳에 아직 그 색깔도 퇴색되지 않은 파란고치가 신비롭다. 애벌레는 저 집에서 내년 봄이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꿈을 겨우내 키워가고 있겠지.

 

 

 

<우측 바위산에 부처바위가 있습니다.>

 

 

<천축산 부처바위>

 

 

 

 

겨울로 들어선 길목에 계곡의 물이 빙결되어 가고 그 서늘하고 정갈한 기운이 정신을 맑게 해 줍니다.

 

 

 

 

<미륵존불/彌勒尊佛>

'미륵존불' 글자가 새겨있는 바위.

 

 

<양성당 부도 . 비석 / 養性堂 浮屠 . 碑石>

불영사 주지를 지낸 양성당 혜능선사(惠能 1621~1696) 의 사리를 모신 탑입니다. 지대석, 기단석, 탑신 및 상륜부로 구분되며 석종(石鐘)형태로 높이 198cm에 화강암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단석 옆면에는 8瓣의 중복련(重伏蓮)을 양각으로 장식하였으며 신석 하부에는 6판(六瓣) 앙련(仰蓮)을 상부에는 14판의 복련을 장식하였습니다. 상륜부에는 연꽃봉우리모양의 寶珠를 두었습니다. 이 부도는 치석을 잘하여 세련되며 형태가 정제되고 장식문양 등에서 정교한 수법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 옆에 있는 부도 비(碑)는 높이가 196cm로 蓋石과 座臺는 화강암으로, 碑身은 대리석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문은 뚜렷하지는 않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양성당 선사의 법명은 혜능이고 세속의 性은 남씨로 1696년(숙종22년) 12월17일에 75세에 앉은 채로 입적(入寂)하였으며, 부도는 선사(禪師)가 입적한 1696년에 건립하였으나, 비는 1738년(영조14년)에 설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문은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쓴 것으로 「明谷集」에 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부도/浮屠>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한 일종의 무덤입니다.

 

 

<양성당 혜능선사 비석>

이 비문(碑文)은 최석정(崔錫鼎1646년(인조 24년)~1715년(숙종 4년)이 쓴 것입니다.

최석정은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소론의 지도자로서 많은 파란을 겪기도 했지만 뛰어난 학식과 인품으로 영의정에 여덟 번이나 임명된 인물입니다. 최석정은 수학과 과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유학 경전인 '주역'을 통해 수학 원리를 익혔고 특히 중국에서 유행했던 '마방진'에 심취했습니다.

 

 

'마방진"은 수의 조합을 이용해 정사각형 안에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동일하도록 배치하는 놀이의 일종으로, 옛날 사람들은 이 안에 우주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여겼다.고 전합니다. 1부터 9까지의 수를 이용해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15가 되게 만드는 3차 마방진은 누구나 한번쯤 접해봤을 만 하지만 최석정(崔錫鼎1646(인조24년)~1715(숙종4년)은 당시 1부터 81까지의 수를 이용해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369가 되는 표를 완성했는데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최석정은 숫자 9에 대한 생각이 남달랐으며 이 때문에 저술한 수학책의 이름도 구수략 (九數略, 9에 관한 대략의 논의)으로 지었습니다. 이 책은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수학책 중에서도 수학 이론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책에는 앞서 이야기한 9차 마방진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서양의 것보다 60여 년이나 앞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구수략'에는 그가 조선시대 최고의 수학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름 하여 '지수귀문도(地數龜文圖)'입니다. 이는 마방진의 일종으로 1부터 30까지의 수를 각각 한 번씩 사용해 육각형의 벌집 모양 둘레에 있는 수 여섯 개의 합이 모두 같도록 만든 것으로 육각형 둘레에 있는 수의 합이 모두 93이 되는 교묘한 배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국의 수학자들은 합이 90이 되는 경우와 92가 되는 경우도 발견했는데, 현재까지 최석정의 지수귀문도가 가장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림 참조>

 

 

 사람이 나무를 등에 업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선 형국입니다.


 

<희운당과 청납당>

 

 

<천축산 불영사/天竺山 佛影寺>

불영사는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5년(651년)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곳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과 비슷하다 하여 산 이름을 천축산(天竺山)이라 하고 큰 연못에 있는 아홉 마리의 毒龍을 주문(呪文)으로 쫓아낸 후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구룡사(九龍寺)' 라 하였는데, 후에 서쪽 산 등성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절 앞 연못에 비쳐 이름을 불영사(佛影寺)로 고쳐 지었다고 합니다. 

불영사는 조선 태조 5년(1396)에 소실(燒失)된 것을 이듬해 소운(小雲)이 중건하였는데 그 후 다시 불에 타버린 것을 연산군 6년(1,500년) 양성법사(養性法師)가 중건 하였고, 임진왜란때(1592) 왜구에 의해 영산전과 서전만 남기고 모두 불탔으며 그 후 광해군1년(1609)진성법사(眞性法師)가 재건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차례 화재의 피해를 입었으나 성원(性元), 천옥(天玉) 등 여러 法師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68년부터 비구니 선원으로 수행도량으로 지정하였다고 합니다.

산태국(山太極) 수태극(水太極) 형국의 吉地에 자리잡은 불영사는 조선 숙종때 인현왕후 불사의 은덕을 기리는 원당(願堂)과 아울러 왕후에게 현몽하였다는 양성당선사(養性堂禪師)를 비롯하여 전염병으로 급사한 縣令 백극제(白克齊)가 부인 이씨의 지극한 기도공덕으로 환생하였다는 설화 등 수많은 불사공덕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불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며 사찰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寶物1201號), 응진전(應眞殿/寶物730號), 후불탱화(後佛幀畵/寶物1272號), 삼층석탑(三層石塔/慶北道有形文化財135號), 부도(浮屠//慶北道有形文化財162號), 불연, 불패, 신중탱화 등 다수의 지정문화재와 황화실, 극락전, 명부전, 응향각,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고 창건 당시의 유적인 무영탑(無影塔)과 돌거북 2기가 있습니다.  

 

 

<법영루와 불영지/法影樓 佛影池>

 

 

측면에서 본 법고루와 연못 그리고 飮水石槽 

 

 

<설법당과 청풍당>

청풍당은 수행공간과 공양간이 있는 요사채로 1998년 주지 심전 일운스님이 세운 건물입니다.

 

 

<청풍당 후면>

 

 

<대웅보전/大雄寶殿/寶物1201號>

이 건물은 불영사의 중심 법당으로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건립연대는 조선 영조1년(1725)입니다. 가운데 계단 좌우로 돌거북 한 쌍이 지대석 밑에 뭍여 머리와 상반신만 노출되어 마치 대웅보전을 둘이서 짊어지고 버티고 있는 듯합니다. 대웅보전 기단 밑에 돌거북을 받쳐 건물을 받들게 한 것은 특이한 구상으로 돌거북은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것으로 봅니다. 건물의 짜임새나 각 부재의 조각도 깔끔하며 내부 단청도 격조 높은 수법을 갖추었습니다.  

 

 

<불영사 대웅전 영산회상도/ 靈山會上圖 (寶物第1272號)>

이 탱화는 석가모니부처(釋迦牟尼佛)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조선 영조11년(1735년)에 그린 것입니다. 18세기 이후에 유행하는 영산탱화 가운데 초기시기의 것으로 상태가 양호합니다. 이 시기의 영상탱화는 구도가 비슷한데, 이 그림도 보살들 중 관음보살(觀音)과 대세지보살(大勢至)을 강조한 것이 특이합니다. 본존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좌상(坐像)이고 양 협시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둔 것은 항마촉지인 여래좌상(如來坐像)연구에 새로운 과제를 주고 있습니다.

그림의 기록에 조성연대와 함께 이 탱화를 울진 서쪽의 천축산 불영사에 모신다고 하였습니다.

 

<대웅보전 우측 천정>

 

<대웅보전 좌측 천정>

 

<대웅보전 기단석과 축대 밑 돌거북상>

 

<좌측 돌거북>

불영사를 火魔로 부터 보호하는 돌거북,

  

 

<우측 돌거북>

불영사 대웅보전 지대석 좌우 아래에 있는 두 마리의 돌거북은 불영사의 화기를 죽여 화재를 방지하는 역활적 상징물입니다. 서울의 화산인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해태상을 세운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대웅보전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주련(柱聯)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편시방중) 부처의 몸은시방세계에 두루하시니

三世如來一體同 (삼세여래일체동) 삼세여래가가 일체 한 몸이시네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광대한 원력의 구름은 다함이 없고

汪洋覺海妙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넓고 넓은 깨달음은 신묘해서 헤아리기 어렵네. 

 

 

<삼층석탑 / 無影塔 / 慶北道有形文化財135號>

 

이 탑은 二重 基段 위에 3층으로 된 塔身과 相輪部까지 갖추고 있는 석탑으로 다만 2층과 3층 屋蓋石 귀퉁이가 조금 깨어져 나갔을 뿐 비교적 온전한 상태입니다.

4장의 판석으로 짜 맞춘 상하층 기단 면석의 양 귀퉁이에 모서리 기둥과 그 중간에 안 기둥이 하나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받침은 4단입니다. 2층 지붕돌의 낙수면의 기울기가 1층이나 3층의 지붕돌의 그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탑의 높이는 3.2m이고 양식으로 보아 신라의 전형양식을 잘 계승한 고려 초기의 탑으로 보입니다.

 

 

<산신각/山神閣>

대웅보전 좌측 뒤 산중턱에 위치합니다.

 

산신각은 각 산을 관장하는 산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우리나라 토속신앙의 한 맥이었던 것을 불교에서 포용하면서 그 신자들을 표섭한 산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웅보전과 설법전(종무소)사이 산신각으로 가는 길.


 

<대웅보전과 황화실 사이 청운당 건물이 있습니다.>


 

<說禪堂>

대웅보전 좌측 건물로 설선당이라 하며 종무소입니다. 설선당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설선당 주련(柱聯)

刹塵心念可數知 (잘진심념가수지) 시방세계 모든 먼지 몇 개 인가 헤어리고

大海中水可飮盡 (대해중수가음진) 큰 바다의 많은 물결 남김없이 들이키며

虛空可量風可繫 (허공가량풍가계) 저 허공의 크기 재고바람 묶는 재주라네

無能盡說佛功德 (무능진설불공덕) 부처님의 크신 공덕 다 말하지 못한다네.  

 

 

<황화실/黃華室>

황화실은 대웅보전 우측 건물로 스님들의 요사채로 보입니다. 황화실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의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報化非眞了妄緣 (보화비진요망연) 보신화신이 다 참이 아닌 허망한 인연이니

法身淸靜廣無邊 (법신청정가무변) 법신은 청정하여 널리 다함이 없네

江有水千江月 (천강유수천강월) 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 비추고

萬里無雲萬里天 (만리무운만리천) 만리 하늘에 구름없으니 만리가 다 하늘이네.   

 

 

<설법전/說法殿>

 

<명부전/冥部殿>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지옥중생을 다 제도하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노라고 서원한 지장보살좌상과 좌우협시로 도명존자.무독귀왕 그리고 후불탱이 봉안되었고 시왕상 10위, 시왕탱6목, 판관, 녹사, 시자, 장군상 각 2위씩이 있습니다.

 

 <명부전 내부>

 

<의상전/義湘殿>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2001년 건물을 보수하다 발견된 상량문에서 이 전각이 1867년 숙종임금의 비인 인현왕후의 원당으로 지어졌다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장희빈의 계략에 의해 폐위되어 자결을 기도했던 인현왕후는 꿈에 불영사의 스님이 나타나 현몽하여 목숨을 구하고 복위가 되자 佛恩에 보답코자 불영사 사방 10리 땅을 하사 하였는데 1867년 인현왕후 사후에 이 원당을 지어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합니다.

 

 <의상전 내부>

 

<응진전/應眞殿/寶物第730號>

맞배지붕에 전면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지은 건물로 불영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원래는 영산전이었다고 하는 이 건물은 맞배지붕 건물로는 특이하게 건물 4면에 모두 공포를 배치하였습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처음 지었을 때에는 팔작지붕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은 크기도 일정하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건물의 앞면 가운데에는 출입을 위한 문을 달고 양쪽 협칸에는 벽을 두었는데 그 윗쪽에 작은 살창을 달았습니다. 건물의 일부에 조선 초기의 수법이 남아 있으나,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1984년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이 때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조선 선조11년(1578년)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안에는 1906년 조성한 석가본존여래좌상과 후불탱, 그 좌우에 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상이 봉안되었고 불단 주위에는 나한상 16위를 봉안하였습니다.

 

 

<칠성각/七星閣>

 <칠성각 내부>

 

<법영루/法影樓>

불전사물(佛典四物)인 법고, 범종, 목어고, 운판이 보관되어 있는 곳입니다.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고/木魚鼓>.<운판/雲板>

 

<불영지와 극락전>

 

 

<법영루와 불영지>

 

<극락전/極樂殿>

극락전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의 주련이 걸렸습니다.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재하방) 아미타불이 어디 계신고

着得心頭切莫忘 (착득심두절막망) 마음속에 간직해 간절히 잊지말지어다

念到念窮無念處 (념도념궁무념처) 생각을 해서 생각을 다하여 생각할 수도 없는 곳에

六門常紡紫金光 (육문상방자금광) 육문은 항상 자금광에 놀리라.

 

극락전은 19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상을 협시불로 한 금동아미타여래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극락전 처마 아래 걸린 편액의 글씨는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 1835~1918)의 글씨입니다.

김성근의 본관은 안동이며 186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규장각직제학, 전라도관찰사, 홍문관직제, 예조참판, 이조판저를 지냈으며 대한제국 수립 후에는 범무대신, 탁지부대신을 지낸 인물로 서예가로도 이름을 남겼습니다. 김성근은 부산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 일주문편액, 고성 연화산 옥천사 玉泉閣, 팔공산 동화사의 靈山殿.山神閣, 대구 무학산 鶴山齊, 해남의 일주문 현판(頭輪山 大興寺), 白雲堂.冥府殿, 등 많은 편액글씨를 남겼습니다. 독립3.1운동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인 서재필박사의 외숙부(外叔父)이기도 한 김성근은 그러나 친일파로 친일반민족행위 106위 명단에 오른 인물이며 그의 작위를 손자 김호규가 습작하였습니다.

  

     

 

이 넓은 공지는 옛 사찰지 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불영사도 한 때는 상당히 번창했던 사찰인 것 같습니다.  

 

 

계곡은 늘 모태의 고향같은 아늑함으로 그리움을 줍니다.

 

 

계곡을 따라 굽어도는 불영사 길은 빼어난 산책길입니다.  


 

<불영교/佛影橋>

화강암으로 된 다리 난간은 연봉우리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천상의 모든 이치가 음과 양이 어우러져 이루어졌듯이 산이 있으니 계곡이 있습니다. 우리의 태극기는 이런 음양의 조화를 잘 응용 표현한 지극히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최고의 표현을 담은 그 어느 나라 국기보다도 깊은 뜻을 담은 국기입니다.  

 

 

일주문으로 나가기 전 길가에 아주머니 한 분이 호박고구마 두어 무더기, 야콘, 감, 말린 야생버섯, 등을 조금씩 늘어놓고 팔고 있습니다. 속살이 진보랏빛에 가까운 고구마에 마음이 끌려 한 무더기를 샀습니다.

 

 

 

2012년12월23일 - 仁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