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외곽/晋州城 外郭>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곳입니다. 고려 말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잦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습니다. 선조 25년(1592) 10월 왜군 2만여 명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명의 군사와 성민이 합쳐 물리쳤으니 이를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라 합니다. 이듬해 6월에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했고, 민.관.군 7만여 명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한 곳입니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 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진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으며 1979년부터는 성 안팍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공사를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성곽의 둘레 1,760m, 높이 5~6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시숭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올린 사진은 역순입니다.
<외곽에서 본 북장대>
<공북문/拱北門>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圖에 나와 있는 진주성의 정문으로, 拱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올려 공경한다는 뜻으로, 北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임금에 예와 충성을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2002년 5월1일 홍예식 2층 다락 樓로 복원하였습니다.
공북문 뒷모습.
<충무공 김시민 장군상 /忠武公 金時敏 將軍像>
장군은 충남 천안 병천에서 지평(持平) 벼슬의 忠甲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安東이며 1578년 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군기시(軍器寺)판관(判官)을 거쳐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습니다.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牧使)가 병으로 죽자 그 직을 대신하여 민심을 다독이고 성(城)과 못을 수축하는 한편 무기를 정비하고 군사체제를 갖추어 사천.고성.진해.지례.금산(金山) 등지에서 勝戰하며 목사로 승진되었습니다. 같은 해 10월5일 침공한 적 2만 대군을 불과 3800여 병력으로 6일간의 공방전 끝에 크게 무찔러 이기니 이를 진주대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마에 적의 총탄을 맞아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이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상에서 나랏일을 근심하며 눈물짓다가 39세를 일기로 이곳 진주성에서 殉節한 이듬 해(癸巳)6월 슬프게도 진주성은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장군의 천수가 꺾이지 않았다면 과연 적군이 진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에 추종되었으며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忠武公입니다.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리며, 조선 광해군 10년(1618) 창건하여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의 정문이었으며 1925년 경남도청이 옮겨지기 전 까지 도청의 정문이었습니다.
<비석군/碑石群>
조선조 선조37년(1604) 합포(마산)에 있던 경상도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긴 병사 겸 목사 이수일의 유애비를 비롯하여 효종10년(1656) 목사(牧使) 성이성의 청덕 유애비 등 조선시대에 세워진 비석 30여기로 진주성 또는 시내 각처에 있던 것을 1973년 문화재보호협회 진주지부에서 모아 옮긴 것입니다.
<북장대/北將臺>
북장대는 조선중기에 건축된 정면 3칸(間)측면2칸의 팔작지붕 다락집형 건물로서 內城과 外城에 포진한 城의 병력을 지휘하던 곳입니다. 일명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며 임진왜란 당시 불타 없어진 것을 1618년 兵使 남이흥(南以興 1576~1627)이 중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정책에 따라 복원되었습니다.
<景仰門>
<경절사/擎節祠>
고려시대 충절(忠節) 하공진(河拱辰)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享禮를 반드는 곳입니다. 公은 고려 현종원년(1010년) 안으로는 왕실의 위난을 수호한 功을 세웠고 밖으로는 거란의 40만 대군을 삼촌설(三寸舌)로 퇴각케 하였을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적국의 볼모가 되어 절개를 굽히지 않고 義를 좇아 신명(身命)을 홍모(鴻毛)와 같이 버리신 분입니다. 나라에서는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를 추증하고 影幀을 기린각에 모시었습니다. 公의 죽음은 곧 위국충절의 상징이 되어 이곳 진주를 충절의 고장이라 일컫는 효시(嚆矢)가 되었습니다.
<청계서원/淸溪書院>
이곳은 고려시대 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 관정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1364)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그 중 오직 한 알을 살려 크게 번연시키고 씨아와 물레 그리고 베틀을 창제하여 <고려사.태조실록에 기록> 온 백성들에게 따뜻한 목면 베옷을 입힌 고려 공민왕 때 전객령 판부사로 치사(致仕)하신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입니다.
조선 순조 33년에 영호남 유림들이 선생에 대한 보은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진주의 서쪽 대평면 마동 남강변에 청계서원을 세웠더니 예조에서 해마다 봄가을로 관원을 보내 생폐와 향촉을 봉진 사림 봉사해 오던 중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61년 후손들이 이곳에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경덕사와 정교당을 건립하고 봉남서당이란 이름으로 그 맥을 이어오다가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정부의 도움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승은사와 전사청을 재건하고 청계서원으로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15일 두 사당에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진주시 남강로 626(남성동 진주성 內>
<청계서원 우측>
<청계서원 좌측>
<청계서원 후면>
청계서원 뒤 성벽길에서 본 청계서원 전경.
성벽 산책길
<국립진주박물관 광장>
<국립진주박물관 본관 건물 모습>
임진왜란의 최대 격전지 진주성 내에 1984년11월2일 개관한 국립진주박물관은 개관 당시 가야문화를 소개하고 경남 지역의 고고학적 연구 . 조사를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나 1998년 1월부터는 국립김해박물관의 개관에 따라 임진왜란사를 전시주제로 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전환하였습니다. 2001년 경남 사천 출신의 제일교포 두암 김용두(1922~2003)선생이 소장한 문화재(도자기.회화 등)를 기증 받아 새로이 두암관을 개관하였습니다.
<진주성벽길>
<진주성포루/晋州城砲樓>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입니다. 선조40년(1607) 병사 김태허(1555~1620)에 의해 진주성 내.외성에 포루 12좌가 설치되었는데 "여지도서"의 '경상우도병마절도영' 조에 의하면 "내성의 포루는 3곳이니 삼가. 의렬. 곤양 등 3읍의 소속이고 외성의 포루는 9곳이니 진주. 단성. 초계. 거창. 함양. 남해. 합천 등 8읍 소속"이라고 하였는데 1969년부터 진주성을 복원하면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하였습니다.
<포루의 대포>
포루에서 바라 본 진주시 중심부
창렬사 앞에서 호국사로 가는 성내 순환길입니다.
<창렬사/彰烈祠>
창렬사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히 순국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정사호(鄭賜澔 1553~1616)가 건립하여 선조 40년(1607) 임금의 사액(賜額)을 받았습니다.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대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金時敏將軍)을 모신 충민사(忠愍祠)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어지게 되자 장군의 신위를 이곳으로 옮겨와 함께 모셨습니다. 지금 이 사당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忠武公 金時敏將軍)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倡義使 金千鎰),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忠淸道 兵馬節道使 黃進),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慶尙右道 兵馬節道使 崔慶會) 등 임진왜란 때 순국한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모두 목숨을 아까워 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분들로서 그 이름이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창렬사>
모두 3棟으로 정면과 좌우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장군졸지위/諸將軍卒之位>
제장군졸지위(諸將軍卒之位) 비는 창렬사를 중수하면서 세운 비석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장이 쓴 글씨라는 표석이 있습니다.
<비각/碑閣>
창렬사 바깥담장 안 축대와 안담장과 대나무
<호국사/護國寺>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오는 이 절은 원래의 이름은 내성사(內城寺) 였다고 합니다. 고려 말기에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 쌓고, 승병(僧兵)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절은 임진왜란 때는 승군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임금께서 호국사라는 이름으로 재건하였다고 전합니다.
최근에 진주성을 정화하면서 일주문(一柱門) 자리가 발견되어 새로 세웠으며, 사찰의 건물들은 모두 근년에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호국사 전경>
<서장대/西將臺>
진주성의 서문에 속하는 장군의 지휘소입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회룡루(回龍樓)로 기록되어 규모는 작으나 남장대인 촉석루와 같은 다락집이었다고 전합니다.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徐相弼)씨가 출자하여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옆에서 보면 八字 모양의 팔작지붕을 올린 목조기와집입니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의 글씨는 정명수(鄭命壽)씨가 썼다고 합니다.
서장대에서 남장대(촉석루)로 가는 길
진주성 내에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으며, 광장에는 민속공연 및 각종 행사를 열 수 있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 있습니다.
<진주성 촉석루/晋州城 矗石樓>
우측에서 바라본 모습.
<쌍충각/雙忠閣>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장군(諸沫將軍)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새긴 비를 세운 비각입니다. 제말장군은 징비록(懲毖錄)에 의하면 경상도 고성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웅천(熊川), 김해(金海), 의령(宜寧)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워 곽재우장군과 함께 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조카 제홍록은 숙부(제말)를 따라 공을 세운 후 이순신장군 휘하에서 있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전사 하였습니다. 정조 16년(1792) 왕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어 이조판서 서유린(徐有隣)에 명하여 비문(碑文)을 지어 쌍충각을 촉석루 옆에 세웠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일본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습니다.
<촉석루/矗石樓>
촉석루는 진주시의 상징으로 영남 제일의 명승(名勝)입니다. 전쟁때는 主將이 병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쓰였고 평상시에는 선비들이 풀류를 즐기던 곳으로 고려조 고종28년(1241년) 진주목사 김지대(1190~1266년)가 창건한 이후 지금까지 7차에 걸쳐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하였습니다. 촉석루는 강가에 돌이 쭝긋쭝긋 솟아 있어 유래된 이름이며, 일명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라 부르기도 하며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광해군(光海君 10년(1618년) 병사 남이흥(南以興1576~1627)이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48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불탔습니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하였으며 건물의 구조는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例부터 北에는 평양 부벽루(平壤 浮碧樓), 南은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라 할 만큼 경치가 아름다워 수많은 詩人 墨客들의 詩.書畵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현재 촉석루에는 하륜(河崙1347~1416)의 "촉석루기(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記文과 현판(懸板) 시판(詩板)이 걸려있습니다.
<의기사/義技祠>
의기사는 촉석루 옆에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1598년) 진주를 점령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論介)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입니다.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성민과 나라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왜장(倭將)을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으로 유인한 후 왜장을 부둥껴 안고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습니다.
<의암/義巖>
임진왜란 당시(1593년 癸巳年) 논개(論介)가 倭將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던 바위입니다. 원래는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危巖)이라 불리다가 논개가 이 바위에서 순국한 이후로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義巖이라 부르게 된 바위입니다.
<지수문/指水門>
지수문은 의기사(義妓祀)의 정문입니다.
의기사는 그 의로운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16년(1740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가 창건한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열회(義妓彰烈會)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중건한 것입니다. 건물구조는 정면3칸, 측면2칸의 맛배지붕의 기와집입니다.
<촉석문/矗石門>
안에서 본 촉석문 전경.
<촉석문/矗石門> 前面
2012년 12월18일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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