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302호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 6년(1397)에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왜구를 토벌하고 쌓은 토성을 조선 세종6년(1424)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인조 4~6년(1626~1628)임경업 장군이 중수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근 6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계획도시로 성곽, 중요민속자료 등 문화재와 가야금병창, 판소리 등 전통문화와 고목 등 자연자원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성내에 주민이 직접 살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마을입니다.
<악풍루(동문)/樂豊樓> 매표 및 출입문
아늑한 옛 시골마을의 모습이 오롯합니다.
돌담장이 호박덩굴인지 호박넝쿨이 돌담장인지, 모르게 온통 호박덩굴이 돌담장을 뒤덮었습니다. 담장 안 초가지붕너머 보이는 산은 낙안의 진산인 금전산(金錢山)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금둔사(金鈍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이 금둔사에는 남도의 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는 아름다운 납월홍매가 유명합니다. 납월매가 꽃을 피웠다 질 무렵에야 일반 매화가 꽃을 핍니다. 납월매는 봄이 왔는지 안왔는지 살피기위한 꽃의 尖兵이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60년대 초의 서울 4대문 밖의 동네를 보는 듯 감회가 어립니다. 서대문 밖 신촌, 동소문 밖 안암동, 동대문 밖 왕십리 등의 마을지붕들이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보기에 창고나 헛간처럼 벽을 높게 돌로 쌓은 것은 이 지방의 특색인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의 온화하고 따사로운 품을 회상케 하는 돌담에 제비콩 넝쿨이 뒤엉켜 꽃과 열매가 함초롬히 달렸고 담 너머 해묵은 초가지붕이 봉곳이 오롯한 그리움으로 숨어 있습니다.
<제비콩 꽃>
<제비콩깍지>
<군수 임공 경업 선정비(郡守林公慶業善政碑)>
<군수 임경업 비각/郡守 林慶業 碑閣>
이곳은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낼 때 베푼 선정을 기념한 비각입니다.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선정비(善政碑)는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를 지내고(1626~1628) 이임한 직후인 인조 6년(1628)4월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각 내의 편액과 표격비에 영조 24년(1748)과 1893년, 1952년에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과 몸돌(碑身), 머릿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몸돌 중앙에 해서체의 종서(縱書)로 군수임공경업선정비(郡守林公慶業善政碑)라 새겨져 있습니다.
임경업의 號는 고송(孤松), 자(字)는 영백(英伯), 본관은 평택으로 충주 출신입니다. 1618년 무과에 급제하고1624년 이괄의 난 때 정충신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이 후 충주목사, 의주부윤,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완주군수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입니다. 낙안군수 재직시 낙안읍성의 수축과 선정을 베풀어 이에 관한 전설이 많고 이지방 수호신으로 신봉되고 있습니다. 매년 정월보름에 면민대제(面民大祭)를 지내고 있습니다.
碑頭에는 두 마리의 용이 하나의 붉은 여의주를 가지고 희롱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절지된 나뭇가지의 선과 배열은 어느 것을 봐도 멋있습니다. 특히 고목의 모습은 그 웅장함 고매함에 매료됩니다.
낙안읍성 동쪽 금전산(金錢山)입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자산문의 '금둔사(金鈍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은 도윤(道允800-868)의 제자 징효절충(831-895)이 헌강왕 때 강원도 영월에 사자산사를 세워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도윤은 헌덕왕 17년(825)에 입당하여 남천 보원(南泉 普願)에게서 법을 얻고 돌아와 동악(棟岳)에 머물다가 다시 쌍봉사(雙峯寺)로 자리를 옮겨 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그래서 도윤을 쌍봉화상(雙峯和尙)이라고 합니다. 문경왕 8년(868)에 71세로 입적하셨고, 시호(謚號)를 철감(哲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징효 석중(澄曉 析中, 831-895)이 흥령사(興寧寺)를 세우고 수 백명의 제자와 더불어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새로 엮어 올린 이엉의 빛깔로 조금은 운치가 떨어지지만 돌담과 감나무의 가지와 주홍빛 감이 아름답습니다.
<동헌/東軒> 동헌 건물에서 드라마 촬영을 하며 출입을 막습니다.
관아 앞 광장의 그네,
이 골목길의 집들은 지붕을 말끔하게 새 이엉으로 갈았네요.
비바람 눈보라에 삭은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탈곡하고 남은 볏짚을 엮어 만든 이엉으로 새롭게 지붕을 올리는 작업이 한창입니다.
어려서 왕십리에서 가을걷이가 끝난 후 흔히 보던 모습인데, 지금은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전통문화를 보존하는 곳 그것도 운이 좋아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홍도의 그림에서의 '기와 올리기'보다도 서민의 정겨움을 더 느낄 수 있는 모습입니다.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 중 하나가 잎 떨어지고 난 나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름내 켜켜이 입었던 옷을 훌훌 다 벗어 던진 모습이 裸身의 여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감나무의 모습은 선비의 고졸한 모습이라면 여인의 나신은 부드러움이 배어나는 유연한 선률의 온유한 아름다움이겠지요.
돌담과 말끔하게 새로 씌운 초가지붕. 멋진 자태의 감나무와 초록 이파리의 나무는 그 어우러짐이 보기에 좋건만, 모퉁이 돌담 위에 헌 타이어는 이질감을 줍니다. 이곳 옛 모습의 아름다운 정취를 옥에 티처럼 아름다움을 갈겨먹고 있습니다.
돌담 사잇길에 옛 추억이 새록새록 숨을 쉽니다.
이파리를 모두 떨구고 의연히 서 있는 나무의 가지들의 설긴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담장 안이 궁금해서 돌담 넘어로 들여다 보니 움메~~ 누구세요?
고을 원이 지나가다 마셨다나요 해서 '원님우물'이라고 한답니다.
제비콩 덩굴 넘어 초가마을 그 넘어 성벽이 있고 그 성벽 위에서 낙안읍성을 한 눈에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 경기도 지방에서는 싸리문이나 가는 나뭇가지로 엮은 문이 대다수 였는데. 이곳은 대나무로 엮은 문이 일반적입니다.
돌담 안에 빨간 열매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파란하늘을 향한 저 빨간 것은 열매인가 아님 꽃인가?
가까이 다가서보니 피마자(아주까리)였습니다. 이렇게 빨간 아주까리는 처음 봅니다. 줄기는 물론 잎 마저 붉은 빛을 띠고 있는 것이 있어 줄기에 흠집이라도 내면 붉은 진액이 쏟아질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삼거리 민박이라는 푯말을 보니 불현듯 하룻밤 자고 싶어 지건만... 내 몸을 내 뜻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제주도만큼이나 돌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도, 담장도, 동네 공동우물도 시선가는 곳마다 돌멩이가 지천입니다. 이 우물가는 왠지 아낙들의 수다도 아가씨들의 한 줄 로맨스도 없을 것 같은 깔끄러움만 느껴집니다.
게딱지처럼 낮은 초가지붕에서 포근함을 느낍니다.
흰 눈이 소복히 내려 쌓이면 퍽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감나무 가지에 달린 까치밥이 백열등처럼 주홍빛으로 반짝일 것 같아서요.
초가지붕 너머로 金錢山봉우리가 보입니다.
성벽 옆 집 마당에 이와 같은 모양의 많은 통나무에 먹글씨로 낙안읍성과 일렬번호를 써놓았습니다. 무엇에 쓰는 것일까 싶어 생각을 해봤는데, 아마도 마당극이나 무슨 공연을 할 때 관객들 걸상 용도로 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니면 마당이나 찰흙을 다질 용도로 쓰이는 것 같기도 한데 많은 수량과 일렬번호를 둔 것으로 보아 의자 대용품으로서 가능성이 큽니다. 옆 둘레에는 대칭으로 홈을 두어 들어 옮기기 좋게 손잡이를 두었습니다.
추녀 옆에 키가 큰 유자나무에 노랗게 익어가는 유자가 탐스럽습니다. 과수로 싶은 것이 아니어서인지 키가 크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줌으로 가깝게..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본 유자나무와 앞에 보이는 금전산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유자나무 있던 건물 마당 안쪽 건물이 판소리보존회란 간판을 걸어 놓은 것이 이 사진으로 볼 수 있었기에 그 통나무가 걸상임이 분명합니다.
조선시대 성벽 위로 순라군이 순찰하던 길이 지금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습니다. 성벽 윗길에서 바라 본 낙안읍성이 1950년대 시골마을의 모습으로 감동과 정겨움으로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성벽 윗길>
이 위치는 낙안성벽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여서 전망대 역활을 합니다. 아래쪽에 여러 사람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제 저 성벽 윗길로 낙안읍성의 면면을 보며 입구요 또한 출구인 낙풍루(동문)를 향해 갑니다.
빨래줄에 널린 옷에서 옛 시절의 추억이 마구 솟아납니다.
두루뭉술 못생겼어도 향기로움은 으뜸이지요.
60년대에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다보면 멀리 보이는 농촌 마을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도란도란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땅거미 질 무렵이면 굴뚝마다 뿜어내는 뽀얀 연기가 모락모락 마을에 서렸고 하얀 창호지 바른 문살 안에 등잔불빛이 비치면 떠오르던 생각, 아! 저 안에는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한 가슴들이 오손도손 정을 나누고 있을까 싶어 달려가 들어가고 싶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쌍청루/雙淸樓>(남문) 서쪽에서,
도자기를 구워내는 가마굴뚝 옆 초가지붕. 보는 내가 불안하네
굴뚝과 초가지붕을 측면으로 보니 더욱 가깝게 붙어 있어 걱정스럽네
물레방앗간 정경
기록에 의하면 김빈길 장군은 낙안군 옥산부근에서 1369년에 태어났습니다. 이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낙안군 지역이 피폐하고 혼란스러울 때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태어났다는 것은 큰 불행일수도 있지만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겠지요.
그가 왜구와 전쟁을 벌였던 기록을 보면 1394년 낙안군 지역에서 전라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받아 경상도 사천앞바다까지 출전해 왜적을 무찔러 왕이 크게 탄복하고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 3년(1394) 왜선 3척을 섬멸, 왜선 1척을 섬멸, 왜선 3척을 섬멸한 전라 수군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이후, 1397년 왜구와 맞서기 위해 현재의 낙안읍성을 흙으로 쌓았다고 합니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약 30여년 후인 1426년에 그 토성을 근거로 다시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략 현재 낙안읍성의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는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조선시대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글을 써서 아뢰는 문서)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김빈길 장군은 관직을 버리고 낙안군 백이산 부근에 망해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노후를 보내면서 낙안군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낙안팔경:망해당기>인 <금강모종> <백이청풍> <보람명월> <옥산취죽영> <징산숙로> <평지부사> <단교어화> <원포귀범>은 이 지역에 지금까지 내려오는 가장 유명한 한시가 되었습니다.
늘그막에 김빈길 장군은 전북 고창으로 친인척과 함께 모두 이주하게 되는데 고향인 낙안과는 약 100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생소한 곳이며 낙안군 지역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장수가 일가친척을 모두 데리고 고향을 떠나게 된 점은 뭔가 말 못할 고민이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해 김빈길 장군 후손들은 "당시 남해안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잦고 국가적으로도 혼란스러운 가운데 모함이 난무해 야인으로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고 증언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고 백의종군하던 것을 연상케 합니다. 하지만 전북 고창에서의 야인 생활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그곳에서도 왜적의 침입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다시 전쟁터로 나갔는데 결국 사진포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왕은 김빈길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증의정부(贈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하고 양혜(養惠)라는 시호까지 내렸다고합니다.
현재, 전북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의 김빈길 장군 묘소에는 신도비 등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고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에는 김빈길 장군 영정을 모신 화천사라는 사당이 있어 매년 2월 보름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고향땅인 낙안에는 옥산 부근의 생가나 백이산 자락의 정자인 망해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고작 낙안향교내 충민사의 영정 한 장이 전부입니다. 특히, 그가 쌓았던 낙안읍성내에도 김빈길 장군과 관련해 흔한 비석조차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빈길 장군이 낙안군의 중시조나 마찬가지며 낙안읍성을 최초로 쌓은 인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이런 모습은 지금이라도 시정해야할 부끄러운 일입니다.
<쌍청루/雙淸樓>(남문) 동쪽에서,
어느덧 출구인 낙풍루가 보입니다. 낙안의 진산이라고 하는 금전산(金錢山) 봉우리를 보니 지지난해(2010)에 들렸던 금전산의 금둔사의 홍매화와 신비로움을 느꼈던 사찰 경내의 경치와 어우러진 마애불상과 신라 때의 석불비상과 삼층석탑이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석불비상은 복연대에 연좌를 올리고 그 위에 부처의 입상이 양각된 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탑개석의 덮개를 올린 특이한 문화재입니다. 금전사에 관한 사진들은 본'세월에 그냥" 9 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낙안읍성 앞 주차장에는 이곳 가까운 시골 아낙들이 손수 경작한 농산물과 약초 등 이것저것 조금씩 가지고 나와 팔고 있었습니다.
<금전산 금둔사 석불비상 / 金錢山 金芚寺址 石佛碑像>寶物 제 946호
통일신라시대삼층석탑(9세기)과 나란히 서있는 이 석불입상은 비석과 같은 형식을 한 특이한 불상입니다. 긴 네모꼴의 돌에 돋을새김으로 佛立像을 새겼고 석불 머리 위에는 석탑에서 볼 수 있는 지붕돌을 얹어 놓았습니다. 받침돌 또한 부도에서 볼 수 있는 연꽃무늬를 둥근 모양의 돌에 위 아래로 새겨 複蓮座臺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단아한 모습의 둥근 얼굴과 우아한 느낌을 주는 신체 그리고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세세하게 묘사한 세부표현 등으로 보아 수준 높은 역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독특한 碑像形式과 세련된 수법을 보여주는 이 석불상은 9세기 신라불상을 연구하는데 가장 귀중한 例 가운데 하나로 주목됩니다.
(2010년11월18일 글.사진촬영) -鄕-
2012년10월30일 - 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