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송광사(松廣寺)

鄕香 2012. 11. 23. 12:19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禪을 전수하고 돌아 온 승려들은 자신들이 전수해 온 선(禪)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는 선종을 받아들이기에는 교종의 자리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서 禪僧들은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절을 짓고 禪門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九山禪門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 온 禪宗은 중국에 있던 남종선을 받아들인 것이며, 중국의 선종은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하였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해석이나 말, 문자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宗)의 골격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수행을 함으로써(내관자성(內觀自省) 자성(自性)을 깨닫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경(妙境)을 깨달는 것으로 합니다.
또한 선종이란 부처님의 교설(敎說)을 소의(所衣: 의지할 바 대상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로 삼는 교종에 대하여 좌선을 닦는 종지라는 뜻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에게서 정법(正法)을 유촉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있고, 28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건너와 2조 혜가(慧可, 487-593)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 5조인 홍인(弘忍, 602-675)에 이르러 그 문하(門下)에서 혜능(慧能, 638-713)을 제6조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神秀, ?-706)를 제6조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북종(北宗)은 오래지 않아 맥이 끊어지고 혜능(慧能) 남종만이 5가(家) 7종(宗)으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선종은 신라 선덕여왕 5년(784)에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法)을 받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돌아와 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그 초조(初祖)로 하고 있습니다. 서당지장 스님은 마조도일 스님의 법을 이었고, 마조 도일 스님은 조계 혜능 스님의 법을 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조계종은 6祖 혜능의 법맥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구산선문은 하나의 종파이며, 구산문으로 불리운 이유는 선문 가운데 선법을 널리 알린 아홉개의 선문이 있고, 이 선문을 말할 때 구산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선법을 크게 떨친 아홉개의 사찰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를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기존의 기반을 잡고 있던 교종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침체되어 신라 말기에 이를 무렵 불교의 새로운 풍조라고 할 수 있는 禪이 중국에서와 산문을 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며, 이 구산선문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의 선종계(禪宗界)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구산문은 구산선문 이라고도 하며, 九山禪門은 다음과 같습니다. 

(1)가지산문(迦智山門), (2)실상산문(實相山門), (3)동리산문(桐裡山門), (4)봉림산문(鳳林山門), (5)사자산문(獅子山門), (6)성주산문(聖住山門), (7)사굴산문, (8)수미산문(須彌山門), (9)희양산문(曦陽山門), 그 중 송광사는 사자산문(獅子山門) 중 하나입니다.

 

 

<청량각/淸凉閣>

 

 

 

 

조계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송광사는 우리나라 三寶寺刹의 하나인 僧寶宗刹의 근본도량으로서 참선을 중요시하는 禪宗寺刹로 한국불교와 역사를 함께해온 유서 깊은 古刹입니다. 신라 말 고승 혜린선사(古僧 慧璘先師)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창건 당시 이름은 松廣山 吉祥寺였고 100여 칸쯤되는 寺刹로 30-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 후 고려 인종때 釋照大師께서 重建하려다 입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후 50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고려 중기 古僧 不日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부터입니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 (명종27년, 1197년 희종 원년)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에 동참하는 수많은 大衆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습니다. 혜린선사가 창건한 이 후 보조국사를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입니다.

 

 

 

 

<송광사 조계문 / 松廣寺 曹溪門>

이 문은 송광사의 첫 관문으로 일주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일주문은 신라말에 처음 세운 것을 1310년, 1464년, 1676년, 1802년에 고쳐 지었으며 현재의 조계문은 양식으로 볼 때 1802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계단 좌우에는 알 수 없는 형상의 돌짐승이 있는데, 그 형태가 원숭이 같기도 하고 사자 같기도 하지만, 정확한 답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것은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선다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세월각(洗月閣/척주당(滌珠堂)>

일주문을 들어서니 일직선상 앞에 기와를 올린 낮은 돌담을 돌린 그 안에 맞배지붕의 한 칸 남짓한 작은 건물 두 채가 字형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작은 크기와는 달리 중압감을 풍깁니다. 한 채는 '洗月閣' 이란 현판이 걸렸고, 다른 한 채는 "滌珠堂"이란 현판이 걸렸습니다. 여기는 장례를 치른 망자의 위패를 사찰 안에 모시기 전에 죽은 이의 위패를 잠시 이곳에 모시고 망자의 영혼에 묻어 있을 세속의 업을 씻어내는 관욕 의식을 치루는 곳입니다. 관욕이란 불교의 영혼천도의식 때 행해지는 영혼에 대한 목욕의례로 세속의 인연과 더러움을 씻어 영가의 번뇌를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회복시키는 절차라고 합니다. 세월각(洗月閣)은 여자의 위패를  척주당(滌珠堂)에는 남자의 위패를 모시는 곳입니다. 죽은 영혼도 남녀가 유별한가 봅니다. 세월은 달을 씻는다는 의미이고 척주는 구슬을 씻는다는 의미로 달은 여자의 성을 구슬은 남자의 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 樓는 四天王門을 거쳐 대웅전으로 가는 初入으로, 溪川 위에 놓은 아치형의 무지개다리(虹霓橋) 위에 세운 일종의 樓형식의 통로이자 다리입니다. 이 다리 건너 바로 四天王門인데 사천왕像은 단청 중이었습니다. 안 대들보에 걸린 현판은 "松廣寺"입니다.

 

 

침계루<杭溪樓>

돌다리이자 누각형의 '松廣寺'현판이 걸린 門 좌우로 개울을 따라 있는 이 긴 침계루는 시냇가를 내려다 보는 누각이란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여기의 枕은 '배개 침'이 아닌 "임할 침"을 뜻합니다.

 

 

 

홍예교 밑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 쌓은 축대 위에 건축한 회랑처럼 긴 건물에서 돌출된 亭子의 모습입니다. 위치적으로 정면에서 볼 수 없어 정자의 이름은 확인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배롱나무/목백일홍>

대웅보전 앞 뜰 좌우에는 이처럼 잘 생긴 배롱나무 두 그루가 있습니다.

 

 

<송광사 지장전(松廣寺 地藏殿)>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전각으로 지장보살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섰고, 그 좌우로 시왕(十王)이 모셔져 있고 천도재(薦度齋)와 49재, 영가천도 등 각종 齋를 지내는 곳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겠다고 원을 세운 보살로 삭발한 모습입니다. 시왕은 인간이 살아 있을 당시 지은 죄의 輕重을 가리는 열분을 가리키며 사람이 죽으면 그날부터 사십구일까지는 7일 마다 그 뒤에는 100일, 1년(小祥), 2년(大祥)때에 차례로 각 왕에게 가서 생전에 지은 善惡業의 심판을 받는 다고 합니다. 지장전 측면입니다.

 

 

불일문과 인근 사찰건물의 풍경입니다. 2010년 가을에 와서 담은 사진들을 올린 것이 있어 이번에는 세세하게 담지 않고 대강 풍경위주로 담았습니다.

 

 

說法殿 뒤 고풍스러운 돌담과 배롱나무, 활엽관목과 파란하늘의 풍경..

 

 

<진여문 (眞如門)>

 참과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 진리는 바로 자연 그 자체라네..  진여문(眞如門) 안에 설법전(說法殿)이란 편액이 걸렸습니다. 설법 안에 진리가 있음을 암시하는가 봅니다.

 

 

眞如門, 그 안에 設法殿이 있습니다. 이리 고즈넉한 산사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어찌하여 설법이 필요한 건지.. 풀 한 포기에서 오묘한 섭리가 보이고 고요로운 자연의 숨결에서 마음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임에.. 

 

 

높디 높은 眞如門 그 안에 무엇 있을까, 하도 궁금하여 계단을 올라 문틈으로 들려다 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네. 본시 禪砦에 고요만 흐름을 내 어찌 몰랐던가.. 

 

 

<수선사>

구중궁궐이 저리 깊을까 높고 깊은 저 담장의 전각은 정적처럼 말없이 세월을 흘려 스님의 참선 안에 無憂로 흐르네. 雲霧처럼 드려진 나의 深憂, 그 흐름에 묻혀 가는 듯 햇살이 하얗게 빗어 내리네 ...

 

 

재작년에 담은 사진을 올린 것이 있으나 그래도 천릿길을 왔는데 싶어 또 담으려니 오후의 햇살이 관음전을 포옥 감싸고 있어 찍으나 마나.. 역광에 온전한 사진을 담을 실력이 없어 한쪽만 담아봤습니다.

 

 

<종고루/鐘鼓樓>

불전사물(佛殿四物)로 부르는 범종(梵鐘), 북(鼓), 목어고(木魚鼓), 운판(雲經) 이 있는 곳입니다.

목어는 큰 통나무를 겉은 물고기형상으로 조각하고 속은 파낸 것으로 막대기 두개를 양손에 쥐고 안쪽 양편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佛具로,  아침 저녁 예불하기 전에 범종(梵鐘)·과 법고와 운판(雲板) 등과 함께 사용합니다.     

목어는 목어고(木魚鼓)·어고(魚鼓)·어판(魚板)이라고도 하며 보통 잉어의 형상으로 만드는데, 영주 부석사의 목어처럼 용의 얼굴로 표현 한 것도 있습니다. 

 

 

<종고루/鐘鼓樓>

 

 

불일암으로 가는 길가에 붉게 타는 듯 물든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寺刹을 돌아 옆으로 끼고 오르는 불일암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휘돌아 가는 좀 먼 길입니다. 그냥 바로 입구쪽으로 내려가다 대나무 숲 우거진 길로 가는 것이 지름길이지요.

 

 

불일암으로 가기 전에 옆 개울가 단풍과 풍경을 담은 사진입니다.

 

 

불일암으로 가기 전에 옆 개울가 단풍과 풍경을 담은 사진입니다.

 

 

불일암으로 가기 전에 옆 개울가 단풍과 풍경을 담은 사진입니다.

 

 

불일암을 향해 5분쯤 걸어가니 우측에 대나무 숲이 있군요.

 

 

좌측 숲속에 사찰건물이 또 있습니다.

 

 

길을 따라 굽이 돌아오니 좀 전에 보이던 이름모를 사찰건물이 나옵니다.

 

 

사찰건물 앞에는 긴 세월에 입혀진 이끼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비석이 세워져있습니다. 거북의 형상이나 조각 솜씨가 돋보입니다. 

 

 

불일암으로 가는 대나무 숲길입니다. 대나무의 향그러움이 정신을 맑게 씻어 줍니다.

 

 

 

빽빽이 들어선 대나무 숲,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온 저에게는 흔히 볼 수 없음에 가벼운 설렘마저 주는 풍경입니다.

 

 

불일암 입구이자 문입니다. 정감어린 촌락의 여염집 사립문을 닮았습니다. 소재는 대나무지만..

 

 

대나무 숲이 터널처럼 이어진 곳을 나오니 숲속을 헤매다 무릉도원을 만났다는 수양대군의 꿈속에서처럼 확 트인 분지에 암자와 작은 밭과 주변의 풍경은 마치 별세계인양 감동입니다. 참으로 속세와 단절된 죽림 속 선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불일암/佛日庵>

이 불일암은 16국사 중 제7대 자정국사(慈靜國師)가 창건한 옛 자정암(慈靜庵)이 있었던 이 자리에 법정(法頂)스님이 1975년에 중건하여 불일암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곳에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시며 '무소유'.'선가귀감'.'서있는 사람들'.'영혼의 모음'.'오두막 편지.'맑고 향기롭게'.'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홀로사는 즐거움'.'말과 침묵'.'산방한담'.'진리의 말씀'.'산에는 꽃이 피네'.'물소리 바람소리'.'텅 빈 충만'.'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인도기행'.'내가 사랑한 책들'.'아름다운 마무리'.'버리고 떠나기' 등의 저술과 '깨달음의 거울(禪家龜鑑)'.'진리의 말씀(法句經)'.'불타석가모니'.정토 삼부경'.'신역화엄경'.'숫타니파타'.'因緣 이야기' 등의 번역서, 그리고 '일기일회(一期一會)'.'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一則一切多則一),의 법문집을 남기시고, 2010년 3월11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열반하셨습니다.

 

 

 

<빠삐용의자>

평소 햇볕 따슨 곳에 손수 만드신 이 걸상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셨다고...

오늘은 방명록과 방문객의 선물용인 책갈피꽂이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법정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 문하로 출가 하였습니다. 1970년대 봉은사 다래헌에 거주하며 한글대장경 역경에 헌신하였고 함석헌 등과 함께 "씨알의 소리" 발행에 참여 하였고, 불교신문사 주필을 지냈습니다. 1975년 모든 직함을 버리고 이곳 송광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지어 칩거하며 한 달에 한 편의 글로써  세상과 소통해 오면서 '선택한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라는 청빈의 도를 실천하며 '무소유'의 참된 가치를 널리 알렸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스님은 자신의 삶의 철학을 지키고자 1992년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오셨고, 2004년에는 그 동안 맡아왔던 길상사 회주직을 내놓으시고 세속의 명리와 번잡함을 멀리하여 운둔 수행하시다 2010년 3월11일 열반하셨습니다. 

 

 

저처럼 쌓아 놓았던 장작들로 스님은 겨우내 온돌을 따습게 달구워 따듯하게 겨울을 보내셨겠지요. 밑에 쌓여진 장작은 오래 묵은 것이니 생전의 법정스님 눈길이 머물기기도 했으리...

 

 

재작년에 왔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제자가 만들어 드렸다는 목욕간은 그 사이 비바람에 많이 삭아 보는 이의 마음이 젖어듭니다. 종내는 모두 세월에 묻어 없어지겠지요. 저 또한 살아 다시 이곳을 올 수나 있을지 모르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으니까요.  

 

 

두루 둘러보고 이제 다시 속세를 향해 대나무터널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길목마다 가는 눈길이 아쉽습니다.

 

 

 

 

 

 

이제 저 사천왕이 계신 문을 나서면 고요롭고 아름다운 이 선계에서 떨어져 속계의 한 티끌이 되겠지요.

 

 

고맙습니다. 2012년 10월29일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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