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처음으로 운주사를 찾아갔을 때는 火魔가 온 산을 휩쓸고 간 상흔이 다 아물지 않은 채 검버섯처럼 남아있었는데 아직도 그 흔적은 지우질 못하고 있었지만 두어 채의 사찰도 새로 지었고 또 짓고 있었습니다. 천불 천 탑을 꿈꾸던 사찰답게 여기저기 유난히 많은 불상과 탑도 인상 깊었지만 다른 어느 사찰이나 옛 절터에서도 볼 수 없던 마치 미루나무처럼 미끈하게 높은 탑과 그 탑에 새겨진 기하학적 새김 그리고 해학적이고 서민적 모습의 불상들이 주던 편함과 질박한 정 묻어나는 남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아스라한 농가의 향수 잊을 수 없어 다시 찾았습니다.
① 매표소 | ⑧ 광배 있는 좌불상 | ⑮ 칠성바위 | 22 화장실 | 29 4층석탑 |
② 일주문 | ⑨ 석조불감 | 16 종각 | 23 목욕탕 | 30 명당탑 |
③ 사천왕 | ⑩ 원형다층석탑 | 17 보제루(종무소) | 24 공양간 | 31 마애여래좌상 |
④ 5층석탑 | ⑪ 5층석탑 |
18 대웅전 |
25 법성료 | 32 불사바위 |
⑤ 9층석탑 | ⑫ 7층석탑 | 19 지장전 | 26 원융당 | 33 원구형석탑 |
⑥ 7층석탑(무늬없음) | ⑬ 시위불 | 20 지혜당 (서점.찻집) | 27 운주선원 | A~F 석불群 |
⑦ 7층석탑(XX문양) | ⑭ 와불 | 21 화장실 | 28 산신각 |
운주사는 돌로 된 石佛石塔이 각각 1천구씩 있었던 우리나라의 유일한 사찰로 유명합니다.
현재는 석불 93구와 석탑 21기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1481년에 편찬된 「東國與地勝覽」에는, "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유일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 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조선초기까지는 분명히 실재했었다고 판단됩니다. 또한 조선조 인조 10년(1632)에 발간된 능주읍지에는 ‘운주사 재현남이십오리천불산좌우산협석불석탑 일천 우유석실이석불상배이좌(雲住寺 在縣南二十五里千佛山左右山峽石佛石塔 一千又有 石室二石佛相背而座)’ 운주사는 현의 남쪽 이십 오리에 있으며 천불산 좌우 산 협곡에 석불 석탑이 일천씩 있고 석실에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일천씩의 석불 석탑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그 말미에 금폐(今廢) 라는 추기가 있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소실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석불상은 10m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작은 불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불상들이 산과 들에 흩어져 있습니다. 이들 불상은 대개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모양, 돌기둥 모양의 신체, 어색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팔과 손, 어색하면서도 규칙적인 옷주름, 해학적인 표정과 자세에 둔중한 기법 등은 운주사에 있는 불상만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시대에 지역적 특성화 된 불상양식과 비슷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이는 백제인의 후예로 백제의 예술적 기술적 감각을 이어 받은 石人像을 제작하던 이 지방 석공들이 대거 동원되어 만든 고려 석불이라 하겠습니다. 석탑21기도 山野 여기저기 즐비하게 서 있는데 둥근 원형탑, 원판형탑, 같은 특이한 모양의 탑도 있으며 3층, 5층, 7층, 9층 등 층수도 다양한 편입니다. 일반적인 사각형 탑들은 너비가 좁고 높이가 高峻하며 屋蓋石이 평면적이어서 고려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연꽃모양 받침돌(蓮花臺)들이 더러 보이는 것 또한 고려양식의 특징입니다. 특히 이 석탑에서 눈에 띄는 것은 基壇이나 塔身石의 面石에 × ◇ Ⅲ같은 幾何學 무늬들이 돋을새김(陽刻)과 선 새김(線刻) 등으로 새겨져 있는 점입니다. 이런 기하학적 무늬의 애용은 불상의 기하학적 주름과 더불어 이 운주사 유적의 가장 특징적인 양식으로 크게 주목됩니다. 이처럼 특이한 석불, 석탑 천 여구씩이 한 절 안에 봉안되어 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例이어서 千佛千塔에 대한 독특한 신앙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높이 평가되며, 아울러 美術史 내지 佛敎史 연구에 크게 이바지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운주사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네 차례의 發掘調査와 두 차례의 學術調査를 하였지만 운주사의 정확한 創建時代와 창건세력, 造成背景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을 밝히지 못하여 여전히 신비로운 사찰로 남아 있습니다.
영구산 운주사(靈龜山 雲住寺)의 일주문을 들어서 30m 정도 걸어가면 늘씬한 9층탑이 있고 연이어 약간 빗겨선 종대로 20여m 간격으로 7층탑 5구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9층석탑 / 보물 제796호> (1번째 탑)
일주문으로부터 첫 탑인 이 탑은 9층으로 자연암반 상면을 깎고 다듬어 삼단의 층을 두어 지대석모양으로 만든 위에 바로 탑신을 올린 형식입니다. 상륜부 9,8,7,6,5,4번 옥개석 사이의 탑신 5개는 1개의 돌로 방형으로 만든 4면에 겹친 마름모형(◈)을 돋을 새김한 그 중앙에 상하좌우를 잇는 꽃잎을 선각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4번 옥개석에서 1번 옥개석 사이의 3개의 탑신은 각각 4매의 판석을 조합하여 세운 것으로 각 면마다 2개의 마름모형을 돋음 선각하고 그 안에 4잎 꽃문양이 선각되었습니다. 지붕돌(屋蓋石)네 모서리 끝은 위로 솟아있고 옥개석추녀에는 모서리 방향으로 일정한 간격의 대각선을 음각하여 추녀 밑 석가래 모양을 표현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러한 형식의 문양과 탑의 형식은 일찍이 목격한 예가 없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입니다.
<9층석탑 문양세부>
<A석불군/石佛群>
첫 탑 우측 바위너설 야지에 세워져 있는 불상들 하나같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암벽 위에 훼손된 5층탑이 서 있습니다. 암벽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돌아보기 위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5층석탑> (2번째 탑)
이 탑은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깨지고 부서져 주변에 나뒹굴던 것을 찾아 모아 다시 올린 것으로 자연암반의 상면을 깎아내고 바로 긴 탑신를 새워 조성한 탑으로 탑신은 모두 하나의 돌을 방형으로 만들었으며 문양 표현은 없습니다.
골짜기를 따라 새로 조성된 운주사 모습입니다. 몇 해 전만해도 논밭에 불상과 탑과 그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기념 샷입니다. 이 먼 곳을 언제 또 올지도 모르고... 사진 우측 산허리에 있는 탑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운주사계곡 일주문에서 두 번째 탑 위치에 도달합니다.
운주사계곡 건너편 산입니다. 우측 능선 소나무 있는 곳에 거대한 불상으로서 좌상과 입상을 암반에 조각해 놓은 부처 즉 일명 와불(臥佛)이 있고 조금 좌측 아래 목책아래 바위들 있는 곳이 탑과 부처를 조형할 석재를 뜨던 채석장이고, 좌측에 원반형 돌과 석탑이 있는데 원반으로 만든 돌은 모두 7개로 배치 간격이나 각도가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으로 놓여 있어 칠성바위라고 하며 북두칠성 신앙을 예지할 수 있는 유적입니다.
<6층석탑>(3번째 탑)
우측(동쪽) 산 중간허리에 있는 6층 석탑입니다. 지대석과 갑석 없이 자연암반 위에 곧 바로 4매의 판석을 조합한 탑신을 세운 6층 석탑입니다. 판석 양쪽에 우주(隅柱)를 표현한 두 장의 판석을 세우고 그 사이에 보조우주를 표현한 두 개의 면석을 앞뒤로 끼워 세운 1번 탑신과 일층 옥개석 위의 같은 방식으로 올린 2번 탑신은 2장의 면석을 보조우주 대신 8개의 선을 종(縱)으로 음각하였습니다. 2번 옥개석 위 나머지 탑신은 모두 방형의 통으로 된 하나의 탑신에 일정한 간격을 둔 종선11~7 개를 새겼습니다. 옥개석받침은 빗금을 상반시켜 마름모를 형성하였고 옥개석 모서리 끝은 위로 솟아 있습니다.
<석불군/石佛群>
운주사계곡으로 내려와 돌아 본 탑과 그 아래 좌측으로 여러 협시불을 거느린 주존불상입니다.
<석불군/石佛群>
바위너설 야지에 석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연화대(蓮花臺)에 가부좌한 주존불 좌우로 협시불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참고하면 근래에 배치한 것은 아닙니다.
<석불군/石佛群>
이 석불群은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출연했던 석불군입니다.
운주사 동쪽 바위너설 야지에 모셔져 있는 7분 중 4분의 석불입니다. 우측으로 주존불을 포함하여 3분의 부처가 더 모셔져 있습니다.
측면으로 본 바위너설 야지에 모셔 놓은 석불군의 모습입니다. 크고 긴 석불이 이 석불군의 주존불입니다.
동쪽 산자락위에 있는 탑을 보고 돌아 내려와 다시 접한 제일먼저 보았던 첫 번째의 9층탑입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부서진 탑신과 조각난 불상들의 잔해들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和順 雲住寺 七層石塔〉(4번째 탑)
일주문을 들어서서 골짜기 평지에 세워져 있는 두 번째의 석탑으로 7층 석탑입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른 탑으로 기단이 잘 다듬어져 있습니다. 石塊形 기단상면에는 원형 1단의 괴임을 만들어 윗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습니다.
初層과 二層 탑신은 4매의 판석을 짜 맞춘 것으로 각 면 모서리에는 隅柱가 표현되었으며, 3층 이상의 탑신들은 모두 하나의 돌(단석單石)로 만든 탑신으로 각 면에 우주가 모각되었습니다. 각층 옥개석은 추녀와 처마가 직선형이며 모서리 지붕 끝자락인 우동만 살짝 돋아 올렸습니다. 상륜부는 유실되었지만 비교적 단정하고 소박한 신라 전형양식을 계승한 9.6m 높이의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 쌍교차문 칠층석탑(雙交叉文 七層石塔)> (5번째 탑)
이 석탑은 운주사에서 유일하게 光背를 갖춘 불상 4분 중 하나인 석불좌상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탑 역시 높고 큼직한 하나의 方形基壇石 위에 1단의 방형 고임대를 만들고 그 위에 장주형탑신부를 얹었습니다. 2번 탑과 마찬가지로 추녀와 처마가 직선형이며 모서리 지붕 끝자락인 우동만 살짝 돋아 올린, 이 석탑의 외형을 보면 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각층 탑신석에 특이한 쌍교차문(XX) 과 측면의 마름모꼴(◇)의 형태를 장식하는 등 국내 석탑에서는 그 유래가 없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정감을 주는 7층 석탑으로 높이는 7.75m입니다.
동쪽 석불군과 산중턱에 탑이 보입니다.
3번 째 탑 뒤에 세워져 있는 3구의 석불입니다. 운주사의 석불은 대다수가 판석에 전면만 부처상을 조각하고 뒷면은 조각을 하지 않은 판석 그대로입니다. 좌측의 거친 화염문이 새겨진 광배가 있는 불상은 사각형 좌대에 대좌한 석불좌상으로 운주사의 광배가 표현된 4구의 석불 중 하나입니다.
<석조불감 앞 칠층석탑 石造佛龕七層石塔> (6번째 탑)
석조불감(보물 제797호)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이 칠층석탑은 높고 큼직한 하나의 方形基壇石 위에 1단의 방형 고임대를 만들고 장주형탑신(長柱形塔身)을 설치한 다른 석탑과 달리 아주 낮은 지대석 위에 그대로 장주형탑신부를 구성하였습니다. 또 커다란 네모의 지대석 상면에 높이 5cm 정도의 1단괴임을 마련하여 그 위로 우주(隅柱)가 표현된 탑신을 얹었으며, 옥개석 상면 네 귀퉁이를 이루고 있는 우동마루(내림마루)가 예리한 각을 이루지 않고 통통하게 묘사된 것은 백제계 석탑에서 나타나는 기법이어서 주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옥개석의 폭과 탑신 높이의 구성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감을 주는 탑으로 높이는 7.5m이며 고려시대 세운 탑입니다.
<감실/龕室>
1481년에 편찬된 「東國與地勝覽」에도 기록되어 있는 감실안에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불상입니다.
원반형 연화탑에서 남쪽으로 5m에 자리한 이불감은 팔작지붕 형태로 된 석조로 그 안에 2구의 석불이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등을 마주한 채 남북으로 앉아 있습니다. 「東國與地勝覽」에 기록된, "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 에서 편찬자가 '우유석실이석불 상배이좌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고 언급한 것은 유독 불감 안에 서로 등을 대고 있는 相背佛을 주목하였다는 것은 상배(相背)불상이 수많은 석불, 석탑 가운데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불감의 평면은 방형으로 평평한 기단석 위에 5매의 판석을 이용하여 방형으로 짜 맞춘 단상을 마련한 다음 그 위에 각 면에 13엽의 양련이 선 새김 된 1매의 갑석이 있고 불감 안에는 1매의 판석을 세워 공간을 남북으로 이분하였으며 윗부분이 터져 있는 이 판석의 양면에는 화염문이 새겨져 있어 두 불상의 광배 역활을 겸하고 있습니다. 불감 양 측면 벽은 각각 1장의 판석으로 되었으며, 남쪽과 북쪽의 양면은 좌우에 판석으로 벽체를 두고 중앙은 열려 있는데 좌우상하로 문설주에 턱을 두었고 좌우 상단 문설주 부분에 여닫이문 시설로 보이는 구멍이 있습니다. 8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에는 석조로 된 용마루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작년에 왔을 때는 보수 중이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지붕돌 일부를 교체하는 등 말끔히 보수되었습니다.
<남쪽 감실 안 부처坐像>
일주문이 있는 남쪽을 주시하고 있는 이 불상은 육계 부분이 유실되었고 얼굴은 둥근 편으로 눈에서 입 부근까지 양각으로 길게 표현된 귀에 귓바퀴는 음각으로 새겼습니다. 가느다란 눈썹과 콧등이 파손된 상태이고 가느다란 눈은 선각으로 눈썹보다 약간 낮게 묘사되었으며 목은 짧고 삼도가 표현되었습니다. 법의는 양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으로 오른쪽 어깨에 걸쳐있는 옷자락은 왼쪽 어깨에서 명치부분을 지나 가부좌한 무릎까지 덮은 형태입니다. 수인은 오른손은 복부에 대고 왼손은 무릎위에 얹은 모습인데 손목까지 웃주름이 음각되었고 손가락 표현되어 있습니다. 앉은 자세는 오른발을 들어 얹은 결가부좌 형태로 길상좌에 속하며 왼발의 꼬여진 모습이 옷자락에 덮여 보이지 않습니다. 발가락과 발바닥을 제외한 다리에는 사선의 옷 주름이 흘러내렸으며 광배는 사다리꼴 판석에 두광과 신광 구분 없이 구불구불한 문양이 선각되어 있는데 아마도 화염문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쪽 감실 안 부처坐像>
원반형 연화탑을 바라보고 있는 이 불상의 얼굴은 원만상이며 가느다란 눈썹, 얇게 뜬 눈. 희미한 입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귀는 형태만 갖추었고 코는 유실되어 시멘트로 보수되었고 머리에는 육계가 없습니다. 짧은 목에 삼도가 있고 양어깨에서 내려오는 옷 주름이 좌정한 신체의 전신을 덮고 있고 옷 주름이 가슴 중앙에서 솟아 모아져 있어 그 안에 양 손이 합쳐져 있음을 암시할 뿐 정확한 수인을 알 수 없습니다. 광배는 남쪽 석불좌상과 마찬가지로 불상과 약간 떨어져 있으며 남쪽 좌상이 한 줄의 선각임에 비해 북쪽 좌상은 꼬리가 가는 길쭉한 타원형으로 이것도 화염문의 변형으로 보입니다. 운주사 불상 가운데 광배 표현이 있는 것은 불감 안의 두 불상과 마애여래 좌상, 광배를 갖춘 석불 좌상, 모두 앉아 있는 4구의 불상뿐입니다.
불감과 대웅전을 향해 종대를 이루고 있는 원반형 연화탑
<운주사 원형 다층석탑(雲住寺 圓形 多層石塔)> (7번째 탑) 1번 9층탑에서 7번 원형탑에 이르는 7개의 탑의 위치가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과 같은 모양이고 별의 밝기에 따라 탑의 크기를 다르게 하였습니다.
탑신과 옥개석 모두가 원형을 이룬 탑입니다. 운주사의 원형 석탑은 다시 원구형(圓球形)과 원반형(圓盤形)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옥개석이 원구에 가까운 주판알 또는 떡시루 형태의 탑이 있으며 옥개석이 얇고 넓은 원반 모양을 한 탑이 있습니다. 원형 석탑은 중국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희귀한 유구로 운주사에는 이런 형식에 속한 탑이 모두 4기가 있습니다.
<운주사 원반형 다층석탑(雲住寺 圓盤形 多層石塔)>
이 탑의 구성은 거북이 모양의 한장의 지대석이고 기단(基壇)은 2단의 둥근 바닥돌에 높직한 5매의 돌에 角을 두어 모아 짜 맞춰 세워10각을 이루게 하고 그 위로 16장의 연꽃잎을 장식한 蓮座臺 모양의 돌(甲石)을 올려 마무리하였습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원형이고, 층마다 몸돌 측면에 2줄의 선이 돌려져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6층 뿐이나 원래는 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탑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조형 면에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드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에서 나타난 특이한 특유의 양식이라 하겠습니다. 기단의 맨 윗돌이 윗면이 편평하고 옆면이 둥근데 비해, 탑신의 지붕돌은 정반대로 아래가 편평하고 윗면이 둥글합니다. 이는 상하의 조화와 안정감을 꾀하려 한 의도로 추측됩니다.
<지혜당>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전 원반형탑 측면에 있는 건물로서 서점 겸 한방차를 마실 수 있는 '운주찻집'입니다. 지난 늦가을 왔다가 마셨던 그 진한 차맛이 다시금 떠올라 경내로 들어가기 전에 전통 차의 그 은은한 여운을 느끼기로 하였습니다.
한 편에는 찻잔이나 불교서적 기념품을 팔기도 하는 곳입니다.
솔 향내 짙은 솔잎차와 달큼한 살구차 그리고 새콤하고 감칠맛의 오미자차 입니다. 꿀에 잰 매실 셋 쪽도 쫀득하고 참 좋았습니다.
보제루(종무소)
대웅전 앞 마당으로 들어가는 건물입니다. '운주사'라는 현판이 걸렸습니다.
<대웅전/모전석탑>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상과 그 뒤에 '영취사(靈鷲寺)'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1742년)에 가야산에서 초빙해온 혜식(慧式)을 비롯하여 7명의 畵僧이 그린 "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靈山會相圖) "를 모사한 불화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석탑은 벽돌로 쌓은 모전탑(模塼塔)모양을 본떠 돌로 만든 탑입니다. 낙뢰를 맞은 탓인지 옥개석 일부가 유실되어 있습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란, 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을 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석가후불화보다 그 내용을 보다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즉 석가후불화에서는 석가와 보살 및 제자, 사천왕과 팔부중만이 등장하지만, 영산회상도에서는 설법을 듣는 국왕과 대신이 더해지고 여기에 제석천, 천자와 천녀를 거느린 범천과 왕비가 등장하며, 또한 중앙불단 아래에 사리불(舍利佛)이 부처님께 질문하는 장면까지 나타나 있어 훨씬 생생한 느낌을 줍니다.
이 그림은 부처가 영축산에서 제자들을 모아 설법하는 정경을 그린 것으로, 화면의 중앙에는 일상의 미혹함에서 벗어나 바른 가르침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이 있고, 영산회에 모인 이들은 그 가르침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찰의 중심 불화로 영산회상도를 걸고, 영혼의 천도를 위해 『묘법연화경』을 읽고 모든 의식을 영산작법으로 시작하는 것, 영산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윤회와 선악의 업보가 존재하는 삶과의 이별을 뜻합니다.
<법성료>
스님들의 수양처입니다.
대웅전 앞 마당의 풍경, 고추 등을 볕에 건조시키려고 널어 놓았군요 뒤 건물은 '법성료'라는 건물로 스님들의 요사채인 듯합니다.
<지장전/地藏殿>
대웅전 우측에 있습니다.
지장전 내부
대웅전과 지장전 사이에 있는 길입니다. 대웅전 뒤 산으로 오르는 길이며 의상대사가 운주사를 짓기 위해 바위에 앉아서 운주사계곡을 내려다보았다는 불사바위와 그리고 마애불상이 새겨진 암벽으로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산신각/山神閣>
대웅전 뒤 언덕에 있습니다.
산신각 내부
<원구형석탑>
우측 길옆에 있는 圓球形 탑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하나로 된 방형의 4면에 우주(隅柱)가 표현된 장석주(長石柱)를 세우고 그 위에 갑석처럼 덮개를 올리고 탑신과 옥개석이라는 개념 없이 마치 주판알 모양의 돌을 쌓아 올린 탑입니다. "조선고적도보"(일제강점기 총독부에서 만든 화보집)에 실린 사진에는 원구가 7개가 올려져있었습니다.
<석불군/石佛群>
제5번째 석불군으로 층을 이룬 푸른 끼가 도는 바위너설 야지에 좌상의 주존불과 협시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岩質은 백악기(약 1억4천400만년~7,000만년)에 돌멩이와 모래가 풍화작용으로 혼합되어 이루어진 마치 자갈과 모래를 콘크리트 한 것처럼 보이는 청회색의 퇴적암(堆積巖)입니다.
바위너설 야지에 주존불, 탑신일부, 그리고 기이한 암벽에 붉게 물든 담쟁이
눈썹과 코, 이마와 어렴픗한 육두, 그 모습 부처의 얼굴이 분명할 진데, 가운데 일직선으로 4개의 홈은 어찌하여 뚫었을까?
의상대사가 앉아 불사를 구상했다는 바위로 가는 길
<불사바위/佛事岩>
의상대사가 운주사 계곡을 내려다 보며 불사를 구상하던 곳으로 불사바위라고 부릅니다.
불사바위 정수리에 정좌하기 좋게 움푹 파인 이곳이 의상대사가 앉아 운주사 창건불사를 구상하던 자리라고 합니다.
바위에 앉아 내려다본 운주사 전경.
불사바위에서 바라본 동쪽 능선입니다.
불사바위에서 바라본 서쪽 능선입니다.
바위에서 내려오는 길 옆 암벽의 모습입니다. 이 운주사주변 석질은 대부분 이러한 퇴적암이어서인지 불상이나 탑의 석질이 십중팔구는 이와 같은 재질로 되어있어 좌측 언덕에 명시되어 있는 채석장에서 모든 석재를 마련 제작되었음을 뒤받침하고 있습니다.
마애불이 있는 암벽에서 바라본 운주사의 전경입니다.
<화순 운주사 마애여래 좌상 / 和順 雲住寺 磨崖如來坐像>
마애불은 현 대웅전에서 북쪽으로 40m 떨어져 있는 퇴적암 벼랑에 새겨져 있습니다. 육계는 두툼하게 솟아있고 희미한 눈썹과 긴 코는 양각이며 귓바퀴는 음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왼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음각선의 옷 주름과 오른 소매에 사선의 옷 주름이 Λ形 手印(손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운주사의 대부분 석불들이 이 수인을 취하고 있습니다. 座臺는 8葉의 覆蓮으로 음각되었으며, 광배는 頭光과 身光의 구분이 없이 무릎 위쪽까지만 陰刻線文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마애불은 운주사의 石佛群 가운데 유일한 마애불로 광배와 좌대를 포함한 전체 높이가 5.16m로 규모가 큽니다. 운주사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바위벼랑에 새겨진 이 마애여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발길이 뜸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대웅전 뒤 산 정수리에 있는 도선 국사가 운주사 계곡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불사를 진두지휘하였다는 불사바위 아래의 벼랑 암벽에 새겨진 마애 여래 좌상은 운주사 계곡 안의 좌우(東西)의 모든 돌부처와 석탑, 칠성바위를 거느리고 절로 들어오는 신도들을 한눈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계곡에 배치된 돌부처 가운데 대형의 주존 석불 좌상들과 유사한 자태의 이 마애불은 이목구비와 화염무늬 광배 등을 뚜렷이 갖춘 운주사의 주존불이라 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마애불 앞 일직선상에는 원반형석탑과 석탑, 두 탑이 있고, 그 앞에 운주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앞에 다시 원반형석탑과 불감 안에 여래와 비로자나불, 두 불상이 있으며 다시 칠층석탑이 있고 좀 떨어져 3부처상이 횡대로 있으며, 그 아래로 2개의 7층 석탑과 끝으로 9층 석탑이 계곡을 따라 종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동서) 산 위에 있는 모든 불상과 탑 그리고 칠성바위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마애불이 있습니다.
<원반형탑/圓盤形塔>
마애불 7m아래에 있는 이 원반형 탑은 운주사에서는 유일하게 기단과 기단면석, 그리고 기단갑석을 갖춘 원반형 탑입니다. 현재는 3층이나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서는 4층이었습니다. 위의 원반형(옥개석)면적 크기로 보아 처음 쌓았을 때는 6~7층으로 쌓은 탑일 가능성이 큽니다.
<4층석탑/四層石塔>
원반형 탑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탑의 전형을 내려 받은 석탑입니다. 마애불 정면에서 볼 때 두 탑은 계곡을 향해 일직선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대웅전 뒤 불사바위와 마애불을 돌아보고 다시 운주사경내로 내려 왔습니다. 보이는 이 건물은 표시판에 스님들의 수양공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담장 옆에 상륜부가 유실된 장주형탑신의 원반형 탑 1기가 보입니다.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요사채를 겸하고 있는 듯합니다. 자연암반 위에 우주가 표현된 장방형 탑신을 바로 세우고 4면에 선각으로 마름모문양이 표현된 탑신과 통일신라 석탑의 옥개석처럼 층을 이룬 옥개받침이 표현된 옥개석을 올린 탑으로 상륜부가 유실된 채 세워져 있습니다.
요사채 담장 옆 석류나무에 석류 두 알이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발갛게 익어가는 운주사의 오후,
<범종각/梵鐘閣>
범종(銅鐘)은 법고(金鼓), 운판(雲板), 목어(木魚)와 함께 불전사물(佛殿四物)의 하나입니다.
목어는 큰 통나무를 겉은 물고기형상으로 조각하고 속은 파낸 것으로 막대기 두개를 양손에 쥐고 안쪽 양편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佛具로, 아침 저녁 예불하기 전에 범종(銅鐘)·과 법고와 운판(雲板) 등과 함께 사용합니다. 목어는 목어고(木魚鼓)· 어고(魚鼓)· 어판(魚板)이라고도 하며 보통 잉어의 형상으로 만드는데, 얼굴을 용의 얼굴로 표현한 것도 있습니다.
운주사경내를 나서 서쪽 산으로 오르는 이 계단으로 오르면 거북 형상의 큰 암반 위에 두개의 탑이 세워져 있고 그 바위벼랑 아래 너널 야지에 불상군이 있으며 더 올라가면 시위불(侍衛佛)이 있고 그 뒤 등성이에 거대한 미완성불상(와불) 2구가 있습니다.
계단에서 돌아서서 바라본 운주사 모습
<7층석탑/七層石塔>
산중턱 커다란 암반 경사진 곳에 정방형으로 파고 各 面 兩 모서리에 隅柱를 표현한 4장의 판석을 방주형으로 맞춰 긴 탑신을 안치하고 2번째 탑신 면에는 두 우주 가운데 면에 X形 무늬를 양각으로 새겼으며 3,4,5,6,7번 탑신의 각 면에는 우주 없이 X문양만을 양각한 7층 석탑입니다.
탑 모서리 면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5층석탑/五層石塔>
X형 문양이 새겨진 탑을 세운 암반 7m정도 아래에 세워진 탑으로 각 탑신에는 면 마다 모서리에 隅柱를 표현한 탑입니다. 이 탑도 위에서 소개한 X자형문양 탑과 같이 거북 모양 바위 등에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불상군/佛像群>
운주사에는 바위절벽 너설 아래 불상들을 모셔 놓은 곳이 모두 여섯 곳이 있는데, 다섯 곳은 모두 동쪽산기슭에 있고 이 불상군만 운주사 서쪽산기슭 거북형암반 머리모양 아래 주존불과 협시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거북바위와 두 탑과 그 아래 불상군의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가운데 봉우리에 불사바위가 보입니다.
시위불 좌측 낮은 골짜기의 거무죽죽한 연둣빛회색암반으로 된 골 바닥에 물기가 촉촉하여 검은 윤기가 납니다.
<머슴부처/侍衛佛>
정상부에 누워 있는 와불(석불좌상.석불입상)로 가는 입구에 언뜻 보기에 관모를 쓴 조선시대 내관(內侍) 같은 느낌을 주는 시위불(侍衛佛), 뉘를 기다리는 양 큰 부처로 가는 입구 암반위에 오독하니 서 있습니다.
이 불상은 서 있는 위치적으로나 모습이 머슴 같다하여 일명 머슴부처라고도 불리기도 하는데, 아마도 정상부의 두 부처가 엄청나게 크고 그 아래 서 있는 이 부처를 함께 연계해서 볼 때 느껴지는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머슴부처>
시위불(머슴부처)로 불리는 석불 입상은 와불의 입구에 있습니다. 부처의 용모(상호/相好)가 다른 돌부처와 달리 비교적 갸름한 모습에 관모를 쓴 것처럼 단이 진 육계와 머리와 이마를 구분한 표현이 보이며 이마는 한 단 낮고 좁으며, 동그란 상호에는 눈썹과 연결된 코가 오뚝하고 눈은 선으로 새긴 초승달모양입니다. 입은 희미하여 잘 알 수 없고 귀는 이마 위에서부터 입 부근까지 길고 좁게 구현되었고 볼은 도톰합니다. 목에는 삼도의 표현이 없고 수인은 오른팔을 들어 왼쪽 가슴에 대고 있고 왼팔을 쭉 펴서 왼쪽 다리에 붙이고 있는데 시무에 .여원인의 변형으로 보입니다. 법의는 右肩偏單式으로 보이나 왼쪽 어깨 윗부분의 옷주름이 조각되지 않았고 왼쪽 가슴에서 늘어진 옷주름이 상체 전면을 휘감고 있습니다. 하체에는 양다리를 구분한 선이 보이고 좌우에 'U字'형의 옷주름이 무릎까지 내려 왔으며 그 아래로 직선으로 내리그은 옷주름을 끝으로 돌출된 발 부분은 위쪽으로 조금 높이 발가락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상의 크기는 정상에 있는 와불(坐像)의 오른쪽에 길이 6m, 너비 95~115cm, 두께 68cm 크기로 떼어 낸 흔적과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와불 옆에서 떼어 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와 부합합니다. 이 석불 입상은 아래 올린 와불과 함께 짝을 이룬 삼존불일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옷주름이나 상호 표현 등이 달라 양식상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와불(臥佛) / 좌상 과 입상(坐像.立像)>
누워있는 두 불상(坐像.立像)은 머리 부분이 산정상 쪽이 아닌 남쪽에 두고 있어 시각적으로 볼 때 가로로 누워 있어 애초에 와불(臥佛)로 조성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두 석불은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어 암반의 생김과 크기에 맞춰서 좌상과 입상의 두 불상을 조형한 것으로 보이며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과 좌상과 입상의 사이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어 산정(山頂)의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보입니다. 주변 어딘가에 안치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이 불상을 안치할 자리인 대좌나 그 비슷한 흔적도 찾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엄청난 이 부처상을 실제로 세우려 했는지는 알 수 없는 화두이나 이는 운주사에 관련된 설화(통일신라 말의 禪僧 도선이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쌓으려다 새벽닭이 울어 역사를 중단했다.')상의 내용과 연계해 볼 때 시사 하는 바가 큽니다. 불좌상의 육계는 부처 얼굴 옆에 별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암반이 부족하여 만들어진 궁여지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좌상 옆에 떼어낸 흔적이 있는데, 이 흔적에서 '머슴부처를 떼어낸 것이라는 口傳이 있고, 실제로 머슴부처와 흔적의 크기가 비등한 것은 구전을 뒷받침하는 비중이 크고 그러한 점에서도 계곡의 서쪽 산 정상에 와불이라 불리는 이 석불 좌상과 입상이 있고 그 아래 시위불(侍衛佛)로 불리는 석불 입상이 자리한 세 부처는 운주사 일대의 돌부처 가운데에서 가장 전형적이며 특히 운주사에 관련된 설화의 중심 부분이기도 합니다.
<칠성바위/七星岩>
일주문을 지나 운주사계곡에 들어서면 왼쪽 산허리에 원판모양으로 만든 7개의 큰 바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운주사 창건 당시의 채석장 옆이어서 이곳에서 원반형 탑을 제작하던 곳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7개의 원반형 바위 배열이 마치 북두칠성의 그림자가 땅 위에 드리운 듯이 배열 상태와 원반 지름의 크기가 북두칠성의 방위각이나 밝기와 흡사하여 칠성을 표현한 바위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고려시대 칠성신앙의 근거지로도, 천문학적 관측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높습니다.
<칠층석탑>
칠성바위 바로 옆 아래쪽 비탈진 자연 암반에 바로 우주를 표현한 탑신을 세워 쌓은 7층 석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운주사 일주문 서편 넓은 공터 끝 산자락에 여러 석불이 모셔져 있는 모습입니다.
<千佛千塔道場>
일주문 안쪽의 편액에는 바깥쪽과 달리 " 千佛千塔道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영구산 운주사/靈龜山雲住寺>
일주문을 나와 돌아보니 일주문 바깥쪽의 편액에는 안쪽의 " 千佛千塔道場"과 다르게 "靈龜山雲住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① 매표소 | ⑧ 광배 있는 좌불상 | ⑮ 칠성바위 | 22 화장실 | 29 4층석탑 |
② 일주문 | ⑨ 석조불감 | 16 종각 | 23 목욕탕 | 30 명당탑 |
③ 사천왕 | ⑩ 원형다층석탑 | 17 보제루(종무소) | 24 공양간 | 31 마애여래좌상 |
④ 5층석탑 | ⑪ 5층석탑 |
18 대웅전 |
25 법성료 | 32 불사바위 |
⑤ 9층석탑 | ⑫ 7층석탑 | 19 지장전 | 26 원융당 | 33 원구형석탑 |
⑥ 7층석탑(무늬없음) | ⑬ 시위불 | 20 지혜당 (서점.찻집) | 27 운주선원 | A~F 석불群 |
⑦ 7층석탑(XX문양) | ⑭ 와불 | 21 화장실 | 28 산신각 |
2012년10월29일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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