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안동 법흥동 임청각(臨淸閣)

鄕香 2012. 8. 16. 09:29

 

<임청각(臨淸閣) 안동시 법흥동 >보물(寶物)제182호.

<임청각(臨淸閣)>은 세종(世宗)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의 여섯 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세조(수양대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안동으로 낙향하였고, 중종(中宗)14년(1519)에 형조좌랑(刑曹左郞)을 지내던 그의 셋째 아들 이명(李洺)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519년에 이 집을 지었습니다. 이 집은 원래 99칸의 집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70여칸만 남아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중 하나이며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선생의 생가이자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곳으로 현재는 보물 제182호로 국가 현충시설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의 모양은 用자를 가로 뉜 뜻한 모습으로 독특한 평면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남녀와 계층별로 뚜렷한 공간구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분명함을 볼 수 있습니다. 

별당형식의 亭子 건물인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로 안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운 자연에 취하여 지은 찬시(讚詩)들이 걸려 있습니다.

임청각(臨淸閣)이란 당호는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 / 등동고이서소 임청류이부시)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읊기도 하노라."에서 두 글자를 따온 것입니다. 건물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예전에는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묻혀 자연환경과 잘 어울렸겠으나 지금은 집 앞에 대로와 철로가 있어 굉음과 홍진만이 고고한 옛 풍치에 덧칠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합니다.

 

<솟을대문과 외곽 담장>

 

 

<중문과 내곽담장>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일정 간격의 뜰을 두고 중설문을 둔 담장이 전 가옥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당 / 祀堂)

사당은 임청각에서 50m 정도 떨어진 북쪽에 있으며, 임청각과 사당 사이에 연못이 있습니다. 

  

 

(중문)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중설 안으로 임청각 사랑채 현판인 군자정(君子亭)이 보입니다.

 

<군자정(임청각)>

임청각의 문을 열면 정원과 연못, 사당과 주변 경관이 환하게 들어 옵니다.

 

 

군자정 내부 임청각 현판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때 국무령을 지내신 석주 이상룡 선생 및 선생의 아들과 조카이자 독립운동가인 이 분들의 사진과 훈장증이 걸려 있습니다. 임청각은 이 분들의 생가이자 집 주인입니다. 이분들은 일제 강점기 치하에 주인으로 창씨 개명도 호적도 하지 않아 지금은 소유권이 없어져 있는 상태로 보훈처에 의해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임청각(군자정) 외측과 안채사이의 담장입니다.

 

 

임청각 마당에서 본 안채 모습입니다.

 

안채마당우물가에서 본 임청각 일부와 담장과 안채의 사랑방입니다.

 


그다지 깊지 않고 물은 맑았습니다.

 

 

사랑채 모습입니다.

 

사랑채 서편입니다. 회랑처럼 된 밑으로 별채로 갈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회랑(다락방?)밑을 지나 별채마당에서 사랑채 쪽을 바라본 사진입니다.

 

 

 

별채의 모습입니다. 전체적인 안채(별채 포함) 의 건물 모양은 '用'字를 뉘어 놓은 형태입니다.

 

 

별채에서 하늘을 올려다 본 모습입니다. 지붕이 ▣형으로 보입니다. 사진을 찍은 자리는 지붕이 이어져 있는(회랑 또는 헛간)공간인데 등 뒤 벽에 문이 있어 열어 보니 돌계단이 있고 그 아래 다음 사진의 모습처럼 건물이 이어져 있습니다.

 

 

별채 회랑 벽에 달린 문을 열고 본 건물입니다.

 

 

 

위 사진에서 본 건물의 외관입니다.

 

 

밖에서 본 건물의 모습 일부입니다.


 

2012년 8월14일 - 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