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법흥동 7층모전탑 .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鄕香 2012. 8. 17. 16:17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法興洞 固城李氏 塔洞波 宗宅)>중요민속자료 제 185호.

이 집은 임청각 고택에 이어진 듯 옆에 있는 가옥으로 법흥사지 7층전탑을 솟을 대문 옆에 둔 고택으로 옛 절터(法興寺址)에다 지은 집입니다. 본채는 조선 숙종(肅宗)30년(1704)에 좌승지 이후식(左承旨 李後植)이 지었고, 북쪽 정자(北亭)는 영조(英祖)51년(1775)에 진사 이종주(進士 李宗周)가 지었다고 합니다.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사당, 정자와 연못 등이 보존되어 있고 나중에 방앗간, 행랑채, 외양간채가 더 지어졌다고 합니다. 사랑채 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안채의 동쪽에는 3칸 크기의 사당이 있습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6칸으로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야산과 계곡에 흐르는 물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그대로 살려 건물을 그 안에 잘 조화시킨 조선시대 사대부 저택으로서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 보고자 한 탑은 천으로 가려져 있고 가옥은 대대적으로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공사기간이 지난해 12월14일부터 4월10일로 되어 있는데... 담 넘어 보이는 공사 상황을 보니 사랑채와 안채는 지붕과 벽 이외는 모두 뜯어낸 상태입니다. 훗날 다시 와야 겠습니다.  - 鄕 -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이 탑은 조선 성종 18년(1487)에 개축되었으며 <영가지(永嘉誌)>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법흥사전탑’이라고 합니다.
탑의 높이는 17m, 기단너비는 7.75m이며 1층 단에 7층의 탑신을 안정감 있게 쌓아 올렸습니다. 기단 평면은 방형이고 지표에 팔부중상과 사천왕상이 새겨진 화강석 판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해 1층 몸돌(옥신석)에 있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로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몸돌의 각층은 무늬가 없는 진한 회색의 벽돌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는데, 이것은 전탑(벽돌탑)이 목탑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벽돌로 쌓은 탑입니다.

 

<찾아간 날 공교롭게도 보수를 위한 것인지 탑을 천으로 가려 살펴만 보고 사진은 찍을 방법이 없어 아쉬운 데로 문화재청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위로 7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8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세워놓았고, 기단 남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여 1층 몸돌에 만들어진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향하도록 하였다. 진한 회색의 무늬없는 벽돌로 쌓아 올린 탑신은 1층 몸돌에 감실을 마련하였고, 지붕돌은 위아래 모두 계단모양의 층단을 이루는 일반적인 전탑양식과는 달리, 윗면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윗면을 시멘트로 발라 놓아 아쉬움을 남기는 이 탑은 7층이나 되는 높은 층수에 높이 17m, 기단너비 7.75m의 거대한 탑임에도 매우 안정된 자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에 속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한 지붕에 기와를 얹었던 자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목탑을 모방하여 전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