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1. 아차산 보루성 (阿且山堡壘城) 광장동-고구려정-1보루-5보루

鄕香 2012. 9. 17. 12:55

 

아차산은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 그리고 중랑구에 걸쳐 길게 뻗어 있어 산 자체가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수도서울의 방벽처럼 여겨지며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접전을 하던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일찍이 백제가 이곳에 아단성(아차산성)을 쌓았으나 고구려가 남진정책으로 이곳을 점령하여 아차산 여러 봉우리(요충지)에 진지를 구축하여 보루(堡壘)를 쌓고 아차산 아래 한강 건너 천호동 일대에 도읍을 둔 백제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백제의 하남 위례성을 압박하던 곳이며, 마침내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년)이 거느린 3만 병력에 의해 개전 7일 만에 백제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도성이 함락되어 탈출하려던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년)이 고구려 선봉장 재중걸루와 고이만년에게 사로잡혀 장수왕에 의해 참수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역사가 서려 있는 아차산의 군사적 요새였던 보루성을 사진으로 소개합니다.

 

 

아차산을 오르는 들머리는 10여 곳에 이르지만, 그 중에 가장 알려져 있는 주능선을 타고 아차산의 중요한 문화재인 보루성을 중점으로 답사할 수 있는 광장동 들머리에서 시작하여 용마산 정상에서 다시 아차산 주등산로인 능선을 타고 오다가 6보루에서 암굴사(대성암)쪽 등산로를 거쳐 광장동으로 원점회귀 하고자 합니다.

이곳은 5호선 전철 광나루역 12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150m 떨어진 광장동 동네 안에 있는 '광장초등학교'입니다. 

 

 

광장초등학교 우측 담을 끼고 들어가는 골목으로, 아차산생태공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30m정도 거리의 골목길로 광장초교 담이 끝나는 지점입니다. 

  

 

골목과 광장초교 담이 끝나는 지점에 각종 맛있는 전과 막걸리 한 잔에 즐거워지는 구수한 정이 묻어나는 주막같은  집입니다. 

 

 

골목을 빠져나오면 말끔하고 산뜻한 산책로가 시작됩니다.

 

 

산책을 즐기는 가벼운 차림의  이 마을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오후 3시 경 입니다.  

 

 

이 계단을 올라서면 구의동정수장에서 워커힐로 이어지는 도로입니다. 

 

 

삼거리,  좌측으로 가면 천호대로와 구의동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장신大와 워커힐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길 건너로 바로가면 중곡동으로 넘어가는 길인데 100m 앞에 아차산입구가 있습니다. 입구 전 우측 아래는 아담한 '생태공원입니다.

 

 

생태공원으로 내려가는 나무로 만든 계단과 길입니다.

 

 

생태공원의 모습입니다.

 

 

아차산입구로 올라가는 길이지요. 우측 아래 숲은 생태공원이구요,

 

 

 아차산 입구입니다. 옆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정원처럼 잘 꾸며진 아차산 들머리입니다.

아차산과 아차산성의 한자는 보통'峨嵯山' '峨嵯山城'으로 합니다. 아차산성에 대한 가장 앞선 기록인 「광개토왕비」(414년)에는 '아단성(阿旦城)'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阿旦'은 한자의 소리(音)를 빌어 표기한 것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아차성(阿且城)'으로도 표기 되면서 '阿旦'보다는 '阿且'가 자주 쓰였습니다. '단(旦)'과 '차(且)'가 금석문이나 판각인쇄에서 흔히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旦)'자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나중 이름과 같기 때문에 피휘(避諱:임금이나 조상의 이름자를 사용하지 않음)해서 '차(且)'로 썼다는 주장도 있으나, 피위할 경우 같은 뜻의 다른 글자를 택하므로 피휘한 것으로 보기 어렵기에, 고려시대 후기부터 본래의 '아차'에 뜻(訓)을 부여한 '峨嵯山'이 쓰이면서 현재까지도 '峨嵯山' '峨嵯山城'으로 표기합니다. 다만, 아차산성의 경우 문화재청이 1973년 사적 제234호로 지정 고시할 때 「삼국사기」를 근거로 '阿且山城'으로 표기하면서 공식 문화재 안내문 등에는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무자년 가을에 쓰고 새겨 세운 고구려의 기상과 혼을 이어받아 힘차고 활기찬 기백을 이루리라는 광진구민의 다짐글입니다. 글씨체가 예쁩니다.

 

 

들머리에서 30m 들어서면 암반20m을 뚫어 솟아나는 암충수를 공급하는 약수터라는 곳입니다.

 

 

약수터 앞 정자 우측능선을 타면 바로 아차산성에 도달합니다. 저는 좌측 길로  들어서 주능선을 타고 아차산1보루를 시작으로 용마산 정상까지 갔다가 다시 아차산 능선으로 회귀하다 도중에 대성암 길로 해서 아차산성을 마지막으로 원점회귀 할 생각입니다.

 

 

 

약수터에서 200m 정도  올라가면 소나무 울창한 곳에 야외공연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포크송과 함께하는 작은 음악회'라는 주제의 공연이 마악 끝났나봅니다.

 

 

공연장을 벗어나니 바로 여울을 가운데 두고 낙타고개로 가는 길과 고구려정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낙타고개에 올라서면 우측으로 가면 아차산성이고, 좌측으로 가면 고구려정과 아차산의 등선을 타고 각 보루성을 거쳐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이어지고, 낙타고개를 넘어가면 온달샘과 석곽묘로 갈 수 있습니다.  남녀가 다정하게 손잡고 낙타고개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위산 바닥 면과 주변에는 천오백년 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여기저기 떠놓은 돌과 돌을 뜬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바닥 면과 떠 논 돌덩어리의 높이만큼 안 뜬 곳과 뜬 곳의 높이가 차이 납니다. 보이는 것은 성을 쌓기 위해 뜬 덩어리 돌들입니다.

 

 

고구려정으로 가는 길은 바위산입니다. 45˚ 정도의 언덕인 이 바위산에서 돌을 떠서 성을 쌓는데 필요한 석재와 할석을 마련했습니다. 

   

 

성을 쌓던 당시 돌을 뜨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흔적입니다.

 

 

그 역사의 흔적을 무심한 발걸음들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층을 이룬 이 자리의 낮은 곳은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떠낸 자리입니다.

 

 

 

각종 고증을 통하여 고구려의 건축양식을 참고하여 지었다고 하는 '고구려정'입니다 

 

 

고구려정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올림픽대교가 보이고 중앙에 5호선 전철역인 강변역 앞 '테크노마트'가 보입니다.

 

 

고구려정 바로 뒤에 있는 주능선 길에 있는 이정표입니다. 우측으로 가면 낙타고개가 나오고 좀 더 가면 아차산성이 나옵니다. 좌측으로 가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갈림길입니다. 우측은 범굴사(대성암)로 가는 길이고, 좌측 나무계단으로 오르면 아차산 정상을 거쳐 능선을 타고 아차산1,5,3,4 보루를 거쳐 용마산과 망우산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아차산정상과 주능선으로 올라가는 계단입니다.>

 

 

< 아차산 일대 보루군(峨嵯山 一帶 堡壘群)>

이곳 아차산은 용마산과 망우산 등 주변 산지가 연결되어 있고, 조선시대까지는 이 모두를 아차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작은 봉우리마다 '보루'라고 하는 군사유적이 있습니다. 보루(堡壘)란, 적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인데, 점령지로서 일반인이 거주했던 산성과 달리 군사적 교통로 확보룰 위해 주변 전망과 감시를 주로 하는 곳이었으며, 여러 개가 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차산의 보루들은 삼국시대 고구려가 만든 것으로, 475년 고구려(장수왕63년)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은 백제와 신라에게는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하였고, 4세기 중반 이후부터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에게도 한강 남쪽 신라와 백제를 견제와 공략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특히, 아차산의 보루군은 백제 한성시기(漢城時期)의 도성(都城)인 풍납토성과 한강 건너 남쪽지역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에 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관계에 있었던 당시의 고구려와 백제의 긴장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차산에 산재한 약 20여개의 보루들은 각각의 위치에 따른 저마다의 기능이 있습니다. 가장 북쪽의 수락산 보루에서는 남쪽의 아차산 일대가 잘 보이며, 임진강 유역으로부터 양주분지, 중랑천 한강에 이르는 고대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적당합니다. 망우산 보루에서는 북쪽 의정부에 이르는 길목까지 볼 수 있고, 용마산 보루들은 중랑천 일대를 방어하기에 유리합니다. 지금은 개발로 사라졌지만 한강변 낮은 구릉인 구의동과 자양동에도 보루가 있어 아차산 일대와 한강변 평지를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구의동보루 발굴조사에서는 쇠솥, 보습, 무기류, 항아리류, 시루 등 많은 유물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아차산1보루 (阿且山1堡壘)>

아차산5보루에서 남쪽으로 200m 떨어진 봉우리(해발250m)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1994년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 조각이 여럿 발견되었고, 보루 동쪽과 남쪽 일부에서 성벽이 확인 됩니다. 유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남쪽 성벽 일부를 파괴하고 봉우리 정상을 지나는 등산로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지금은 보루 바깥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유적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곳 아차산1보루에서는 남쪽과 남동쪽으로 아차산성과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자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북동쪽으로는 아차산5보루를 볼 수 있습니다.

 

 

(1보루 안 모습) 

지표조사만 하고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차산5보루로 가는 길입니다. 넓은 신작로 같지만 좌우로 가파른 벼랑을 이루고 있는 산등성이길입니다. 좌로는 서울 장안과 남산, 관악산, 북한산 등이 한눈에 보이고 우로는 가깝게는 한강 미사리 덕소 검단산 옛 백제의 도읍이 멀리는 용문산 남한산성 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아차산5보루(峨嵯山5堡壘)>

아차산6보루에서 남쪽으로 약 250m 떨어진 작은 봉우리(해발267.2m)에 위치하며 둘레 약 158m, 내부면적은 약 1,818㎡로 추정됩니다. 이곳에서는 한강 남쪽의 암사동에서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 잠실까지 한 눈에 살필 수 있습니다. 정상부와 연결된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노출되어 훼손 되고 있던 것을 흙을 덮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곳 정상의 돌무더기는 비교적 최근에 쌓은 것으로 무너진 성돌을 주워 쌓은 것이며, 이곳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토기조각이 여러 점 발견되어, 삼국시대 보루를 파괴하고 통일신라시대 고분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곳은 아차산5보루 남쪽 가파른 위치이며 최근에 흩어져 있는 성돌을 모아놓은 돌무더기입니다.

 

 

돌무더기에서 본 5보루내 전경

 

 

북쪽에서 돌무지를 바라본 모양이며 보이는 시가지는 천호동 일대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습니다.

 

 

아차산5보루에서 바라 본 구리시, 한강, 미사리, 암사동, 입니다. 그 너머로 보이는 산들은 남양주시 덕소 인근의 예봉산과 광주산맥 끝자락인 하남시에 인접한 검단산입니다.

 

 

암사동과 천호동입니다. 앞에 골프연습장은 워커힐 내에 있는 것으로 아차산성이 있는 봉우리의 줄기입니다.

 

 

잠실벌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좌측에 올림픽대교가 보이고, 가운데 높이 솟은 검은 빌딩은 동서울터미널 앞에 있는 테크노마트빌딩입니다. 우측 봉우리는 아차산성 內 장수대입니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있는 능선은 아차산성입니다.

 

 

아차산성이 있는 능선너머로 남산과 남산타워가 보입니다.

 

 

5보루북쪽으로 내려와 돌아서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입니다.


 

이 지점은 정확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아차산6보루'가 있던 자리였음을 발견된 디딜방아로 인해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측에 아차산2보루와 범굴사(대성암)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주능선 등산로에 위치한 아차산6보루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주능선을 타고 아차산4보루를 거쳐 용마산정상(용마산3보루)을 답사하고 다시 되돌아와 이곳에서 범굴사(대성암)방향으로 들어설 예정입니다.  

 

 

전망대를 거쳐 '아차산3보루'로 이어집니다. 2012년 9월에 아차산에서, <鄕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