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3 . 아차산 보루성 (阿且山堡壘城) '아차산6보루-아차산2보루-암굴사(대성암)-아차산성'

鄕香 2012. 9. 20. 00:33

 

용마산 정상에서 다시 아차산4보루를 지나 3보루로 가는 길입니다.  

 

 

주능선을 따라 아차산4보루를 지나 3보루를 거쳐 200m정도 가면 우측에 가지능선이 있고 이정표와 함께 샛길이 나옵니다. 이 샛길 입구 옆 작은 봉우리는 아차산6보루이고, 이 샛길로 100m 정도가면 '아차산2보루'가 나오고, 그 앞 비탈진 바위로 내려가면 바로 범굴사(대성암)가 있습니다. 

 

 

<아차산6보루(阿且山6堡壘)>

아차산3보루에서 약2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합니다. 2005년 아차산3보루에서 디딜방아의 흔적인 볼씨가 조사된 후, 조사에 참여하였던 사람 중 한 명이 발견하였습니다. 정식으로 발굴조사 되지는 않았으며, 등산로 한 가운데 있었던 탓에 흙이 파여 볼씨의 끝이 드러났던 것으로 이후 학계에서는 지형 등을 고려하여 이곳을 또 하나의 보루로 인정하고 '아차산6보루'라고 하였습니다. 유적의 추정 둘레는 약80m이고 노출되었던 볼씨는 흙을 덮어 보전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아차산6보루 사진)

 

 

<아차산2보루((阿且山堡壘)>

아차산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갈라져 나온 가지줄기가 돌출하여 생긴 작은 봉우리(해발276.2m)에 둘레 50m의 원형으로 축성한 작은 보루입니다. 이곳은 미사리와 암사동 등 한강일대를 내려다보기 좋고 동쪽은 암벽이 있어 적의 침투로 부터 방어에 유리합니다. 흩트러진 성돌로 최근에 쌓은 돌탑 바로 남쪽에는 치(雉)로 추정되는 성벽 3단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흙으로 덮어 보존하고 있습니다. 성벽 안쪽과 유적 주변에서는 고구려 대표적인 토기로 꼽히는 몸통긴항아리(長胴壺)조각들이 지표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아차산2보루에서 내려다 본 풍경 중 석관묘와 그 아래 구리시에서 조성한 '대장간마을이 보입니다. 이 대장간마을입구에 여러 기의 고인돌무덤이 있었으나 대장간마을을 조성할 때 사라지고 일부 상석(上石)이 훼손된 채 버려져 있습니다. 뒤에 건물들은 워커힐호텔 건축물이고 위치는 아차산성이 있는 능선의 아랫자락입니다.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입니다.

 

 

아차산2보루에서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입니다. 2보루 아래 비탈진 암반을 50m 정도 내려가면 범굴사(대성암)입니다. 범굴사 좌측 분지에서 갈라진 우측 가파른 능선아래 1천년이 넘은 석곽묘가 있는 바위능선의 모습입니다. 석곽묘 앞에 두 남녀가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경사각도 50˚ 정도의 이 암반을 내려가면 '범굴사'(대성암)에 이릅니다.

 

 

<대성암 연혁 (大聖庵 沿革)>

이 寺庵은 약 1,300여 년 전(AD670年 頃) 신라 문무왕 때 義湘大師가 創建하였고 조선 초에는 無學大師가 重創하였다고는 하지만, 빙거(憑據)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1921년 故 安寶光和尙이 관음기도(觀音祈禱) 후 좋은 꿈(瑞夢)을 받고 이 山을 찾아와 石窟을 발견하고 범굴사(梵窟寺)라는 암각문(岩刻文)을 確認하고는 廢虛된 寺址를 인수하여 법당과 寮舍를 재창건하고 관음대성(觀音大聖)의 啓示를 받았다하여 寺名을 대성암으로 改稱하였다고 합니다. 法堂 뒷편 岩天井에는 바위구멍(岩穴)이 있는데, 傳設에 의상대사가 있을 당시 암혈에서 쌀이 나와 供養米로 썼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암혈 아래 돌확에 우물이 있어 寺用水로 쓰고 있습니다.  

1950년 6,25動亂의 砲火로 완전요실 된 것을 諸家佛子들의 정성어린 施主와 願力으로 1992년 2월부터 1996년6월에 걸쳐 完全 再重創하여 옛 聖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峨嵯山 大聖庵 住持 釋德庵>

 

 

큰 암벽으로 이루어진 그 밑에 세운 암자 경내입니다. 넓지 않은 마당에 배치해 놓은 프라스틱 의자에 등산객이나 내사(來寺)한 신자들이 앉아 조망되는 한강과 그 주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삼성각>

 

 

<大雄殿>

 

<대웅전 내부>

 

 

대웅전좌측 뒤 암굴의 모습입니다. 암벽 틈에서 물이 나와 수조를 만들어 절에서 이물을 음용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우측으로 돌아 뒤로 들어가 본 암굴의 모습입니다. 암굴을 콘크리트로 막아 수조를 만들고 수조 위를 방처럼  꾸미고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리창을 설치했습니다.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 본 암굴의 모습으로 맑은 석청수가 고여 있습니다.

 

 

아차산성은 날이 저물어 사진을 담을 수 없었으며 추후 재 답사 후 올릴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2012년 9월15일 - 鄕香 -  

 

이 후 사진들은 2012년 9월26일 재차 답사하여 올린 사진들입니다.

범굴사(대성암) 옆 넓은 분지입니다. 많은 기와조각들이 보입니다. 옛 건물터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진으로 보는 이 분지 좌측으로 능선이 있고 사진 가운데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석곽묘가 있는 능선입니다.

 

 

집선 문양의 기와편이 분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양 외에도 여러 가지 문양의 기와조각들이 아차산성과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무늬인 승렴문과 집선문 등이 표현된 토기 편과 기와조각 등이 보입니다.

 

 

아차산2보루에서 내려다보았던 석곽묘입니다. 범굴사 우측 능선에서 바로 내려오면 약 300m 지점 바위언덕 위에 있습니다.

 

 

 

학계에서 정식으로 조사된 보고서나 기록은 없지만, 대략 15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개로왕 21년(AD475년)조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북성을 7일 만에 빼앗고, 남성을 공격하여 성문에 불을 놓자 왕이 달아났다. 이에 고구려 장수 재중걸루와 고이만년 등이 개로왕을 붙잡아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 그 죄를 헤아린 다음 아단성 아래로 압송하여 죽였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비록 개로왕의 시신을 어디에 묻었다는 기록이나 문헌은 없지만, 당시 개로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북위(北魏) 사이를 이간시키는 발언과 장수왕을 어린아이라고 비하하고 고구려를 징벌하기 위해 북위에 원정군을 요청한 점 등으로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그 죄를 헤아렸다는 내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며, 아단성 아래서 처형하여 혼백조차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는 '천장(天葬)에 비견되는 바위산에 석곽묘를 조성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석곽묘가 있는 위치는 아차산성의 將臺를 향해 부복하는 모습이고 뒤에는 제2보루성이 지켜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석곽묘 옆에 보이는 큰 돌은 열린 입구를 막았던 돌입니다. 

  

 

南向의 석곽묘 내부 모습,

폭: 약 70cm . 길이: 대략 180m 이며 석재는 모두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습니다. 구성은 각 측면에 2개의 돌을 세웠고 앞뒤에는 각각 1개의 돌을 세워 그 위에 판석 2장으로 덮었으며 측면외부에는 잡석을 쌓아 무너짐을 방지했습니다. 입구는 아차산성의 장대(將臺 : 장수가 주변을 살펴보는 樓臺)를 向하고 있습니다.  

 

 

석곽묘 옆에 있는 자연스런 작은 웅덩이.

 

 

석곽묘 서쪽모습입니다. 아차산주능선 쪽입니다.

 

 

석곽묘의 뒷모양입니다. 앞산의 아차산성 內에서 가장 높은 곳인 북단에 위치한 장대(將臺.樓臺)가 바로 올려다 보이는 위치에 석곽묘가 있습니다. 석곽묘 뒤로는 제2보루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석곽묘 동쪽 모습입니다. 한강 미사리 방향입니다.

  

 

석곽묘 옆에 있는 하나의 밑동에서 6가지가 옆으로 뻗은 멋진 소나무입니다.  

 

 

석곽묘 정면에서 보이는 산 능선 정상에 있는 아차산성에 큰 나무들이 성근 모습으로 보이는 곳이 장대(將臺)입니다.

 

 

석곽묘 동쪽 전경입니다.

 

 

석곽묘 서쪽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아차산주능선이 보입니다.

 

 

석곽묘를 내려와서 뒤돌아본 풍경입니다. 숲 뒤에 석곽묘가 있습니다.

 

 

대장간마을을 내려다보며 우측 옆으로 돌아 계곡을 끼고 다시 오르다 다비터를 지나 옆 능선우측 온달샘을 거쳐 아차산성으로 갑니다.

 

 

대장간마을이 150m 아래 내려다 보이는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폭포)입니다.

 

 

<구리시에서 세운 '대장간마을'> 배용준이 출연한 영화 '태왕사신기'를 촬영한 장소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계곡을 끼고 50m정도 올라가면 있는 곳으로 사찰에서 다비식을 하던 곳입니다. 조금 올라가면 나무 성긴 넓은 공지가 있고, 그 옆 능선을 넘어가면 온달장군이 이용했다는 온달샘이 나옵니다.

 

 

온달샘터입니다.

이곳은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온달생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 근처에도 너른 옛 건물터로 여겨지는 나무 성근 자리가 있으며 주초석(柱礎石)과 석재들이 흩어져 있고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은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탑은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탑부재들이 훼손되고 유실되어서 정확한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탑은 현재 지대석 위에 기단면석(基壇面石)이 놓여 있고 옥개석(屋蓋石) 2매가 수습되어 놓여 있습니다. 한 장으로 되어 있는 기단면석은 높직하며 상면에 높은 사분원(四分圓) 낮은 각형(角形) 괴임이 있습니다. 기단면석은 각 면에 양우주(兩隅柱)와 하나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었고, 옥개석은 받침이 2-3단씩이며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대석의 양식이나 기단면석의 수법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고려시대로 보이며 신라의 전통을 이어받은 석탑으로 추정합니다. 현재 위치한 장소 옆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에서 수습하여 현재의 장소로 옮겨 보전하였습니다.

 

 

온달샘가에 피어 있던 들국화 야생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습니다.

 

 

온달샘 공터에 배드민턴과 체력단련장을 동호인들이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온달샘에서 아차산성으로 가는 길입니다.

 

 

200m정도 가면 아차산성입니다.

 

 

<아차산성 연혁> 사적 제234호

아차산성은 시대에 따라 아단성(阿旦城) . 아차성(阿且城) . 장한성(長漢城) 또는 아차산(峨嵯城)으로 불렸왔습니다. 또한 이 성은 문헌상 286년(백제 책계왕 28년)에 수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396년에는 광개토대왕이 이 성을 빼앗았으며, 475년에는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년)이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침략 당해 開戰 7일 만에 고구려에 귀화한 백제의 호족 출신 '고이만년'과 '재중걸루'에 의해 생포되어 이곳에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차산성은 1997년과 1999년에 성벽과 성 내부에 대한 조사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성은 부정 육각형의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1km가 조금 넘고 성벽은 높이 7m 가량으로 추정 되고 안팎 모두 잘 다듬어진 돌로 쌓았으며, 성벽 바깥쪽 기저부는 별도의 보광성벽을 쌓은 후 흙으로 다져서 덮었습니다. 해발 203m의 북쪽 모서리 가장 높은 곳에는 장대가 설치되어 있고, 동, 서, 남쪽에 문지가 남아 있습니다. 계단상 지형을 이루고 있는 성 내부에서 여러 기의 건물터와 연못, 우물,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차산성은 백제가 수도 한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으나 나중에 고구려와 신라가 점령하여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아차산 일대에 절을 지었으며 다시 고려가 통일한 후 전략상으로 그 중요성이 떨어졌으며 조선시대에 도읍을 한양으로 자리를 잡으며 아차산 일대가 '사복시" 살곶이 목장으로 이용되었으며 城으로서 의미는 쇠락하였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과 시설물들은 7세기 이후 신라가 축조한 것입니다. 이 산성은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시대의 각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아차산성은 1962년 워커힐 호텔이 건립되면서 현재까지 워커힐 호텔 부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워커힐 호텔측에서 경계철책을 둘러 불행 중 다행으로 보호되어 왔습니다. 아래 사진은 수습발굴조사 한 성벽입니다.

 

 

아차산성 안에서 지나올 때 들여다 보던 철책 밖을 내려다 본 사진입니다.

 

 

아차산성 서쪽성벽위에서 바라본 남쪽으로 뻗은 성벽입니다. 워커힐호텔측이 경내외곽 길로 사용하는 듯 하며 제가 워커힐에서 이곳까지 걸어 들어온 방향입니다. 

 

 

아차산성 안(內)으로 1996년에 광진구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발굴조사한 지역입니다.

 

 

북쪽 장대(將臺.樓臺)가 있는 곳으로 이어진 아차산성입니다.

 

 

아직 발굴조사되지 않은 성내(城內)의 모습입니다.

 

 

장대(將臺 : 將帥가 군졸을 지휘하거나 적정을 살펴보는 돈대.)가 있던 곳이 저만치 보입니다.

 

 

보이는 장대(將臺)는 아차산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북쪽 성벽에 위치합니다.

 

 

장대(將臺)의 지반은 잡석으로 2단 원형으로 구성하였습니다.  큰 원으로 1단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2단의 작은 원을 두었습니다. 장대에는 내가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성벽이 동쪽(한강 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동쪽(한강 쪽)으로 이어진 아차산성 성벽입니다.

 

 

사진가운데 나무 몇 그루 있는 바위봉우리가, 장대(將臺.樓臺)에서 바라본 아차산2보루(阿且山2堡壘)와 쌀바위입니다. 그 아래 대성암(범굴사)이 있고 우측 아래 석곽묘가 있으나 나무에 가려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 누각이 있을 당시는 석곽묘가 바로 아래 보였을 것입니다. 가시거리가 1백여 m 정도입니다.

 

 

다시 수습발굴조사했던 성벽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차산성 발굴유물 중 일부>

 (토제 인물상/土偶)

 

 (토제 인물상 옆면/土偶)

 

 (연화문수막새)

 

 (명문암키와편)

 

 (삼족철제솥)

 

외곽에서 본 수습발굴조사된 성벽입니다.

 

 

 <홍련봉 보루>

홍련봉 보루는 한강변을 경계로 중랑천변의 평지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을 하였습니다. 아차산성 아래 동남쪽의 남보루와 북서쪽의 북보루 등 2개소의 보루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보루는 해발 약 116m에 위치하며 둘레 169m 정도의 타원형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북보루의 긴 축(長軸)은 북서­남동 방향으로 약 70m이며 짧은 곳(短軸)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약 30m입니다. 보루 내부는 평탄하게 깎여 있는데, 북서쪽에서 약 40m까지는 보루 주위의 토루(土壘)와 같은 높이로 삭토(削土)되어 있고, 북서에서 단이 져서 낮아진 분지형태의 남동쪽 부분은 토루보다 2m 정도 낮게 평탄화되어 있습니다. 남보루는 북보루에서 동남쪽으로 약 100m 떨어져 위치하는데 둘레가 약 150m 되는 타원형으로 남보루의 장축은 남북방향으로 약 57m 정도이며 단축은 동서 방향에 약 36m 정도입니다. 내부는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홍련봉1보루에서는 남한 최초로 고구려 연꽃무늬 와당이 출토되어 아차산 보루군의 지휘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홍련봉2보루는 홍련봉의 북쪽 정상부에 위치하며, 북서쪽과 서쪽 중랑천 방면에 대한 조망에 유리한 위치이며 '경자(庚子)'(520년 추정)라는 연대가 표기된 접시를 통해 보루의 사용 시기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홍련봉1보루발굴당시모습(2004년)>

 

홍련봉1보루출토 (연화문수막새/蓮花文)

 

홍련봉1보루출토 (쇠창/鐵製)

 

<홍련봉2보루발굴당시현장모습(2005년)>

 

홍련봉2보루출토 (경자명 접시 / 庚子銘 楪匙)

홍련봉2보루출토 (집게/鐵鉗)

 

 

 홍련봉을 거쳐 아차산성으로 바로 올라가거나 아차산생태공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입니다.  

 

 

아차산생태공원입니다.

 

 

아차산생태공원의 연못과 인어상입니다.

 

 

생명의 원자는 물이요 잉태되어 자라는 곳도 물입니다. 물은 陰이요 음은 여성이요 어머니 입니다. 바로 숭고하고 끝없는 아름다움입니다.

 

 

아차산보루 6개와 용마산 정상과 아차산성 그리고 명빈묘와 다비터, 석곽묘를 거쳐 들머리이자 원점인 아차산생태공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광장초등학교로 내려가는 길가에 피어있는 큰 강아지풀,

 

 

광장초등학교 옆 길가에 핀 억새꽃이 간들간들 배웅을 합니다.

 

 

2012년9월26일 ㅡ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