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일대에는 5세기 삼국시대에 축성한 아차산성을 위시로 조망하기 좋은 봉우리에 20여 개의 보루성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 중 아차산4보루는 복원되었고, 일부는 발굴조사를 계획 중이고 몇몇은 심히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아차산에 적정을 살피거나 방어를 위한 보루성이 많습니다. 그 높이가 300m도 안 되는 작은 산이지만 결코 작지 않고, 단순한 동산 같지만, 결코 동산이 아닌 험준한 바위산이지요.
그래서 이름도 높을 峨에 우뚝 솟을 嵯라고 붙였습니다. 가파른 벼랑이 많고 측면은 깎아지른듯하여 주변을 관망하기 좋아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하여 山城으로는 맞춤한 곳이었기에 삼국시대에 서로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인 곳입니다. 고구려의 장군 온달이 전사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일전에 아차산 堡壘(작은 진지성)7개와 홍련봉 보루, 그리고 시루봉 보루와 옛 寺址(절터)를 답사하고, 정리한 사진을 올린바 있습니다. 이제 또 아차산 줄기의 하나인 용마산 보루성터를 답사한 사진을 올립니다.
지하철 7호선 용마산역 2번 출구를 나와 뒤로돌아서서 6m 앞 좌측 용마공원으로 올라가는 도로 좌우에는 아파트가 줄지어 있습니다. 그 길을 좀 더 올라가면 '중랑구용마폭포공원관리사무소'가 있습니다. 관리소 뒤 옛 채석장자리에 마련된 운동장에는 축구장, 정구장 등의 시설을 용마산의 두 줄기 봉우리가 ∩ 자형으로 절벽을 이루며 포진하고 있는데, 그 절벽은 50여 년 전에 화강암채석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두 줄기 능선에서 우측 능선을 타면 바로 7보루에 이르고, 좌측 능선을 타면 6보루에 이릅니다. 저는 릿지를 조금이라도 즐기기 위해 좌측 6보루가 있는 능선을 타기로 했습니다. 좌측 언덕진 길로 40m 정도 올라가다 우측 계단으로 올라서면 등산로 초입입니다. 이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6보루 성터가 있고 6보루에서 50m정도 용마산정상(3보루 터)을 향해 오르면 좌측으로 절벽을 끼고 있는 오솔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바로 7보루로 이어진 길입니다. 정상을 거쳐 다시 옆 능선으로 내려가는 만큼의 수고를 덜 수가 있습니다. 7보루를 보고 돌아서서 다시 능선을 오르면 용마산 정상인 제3보루입니다. 2보루와 1보루는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능선 끝에 있습니다. 아차산능선과 사이에 '긴고랑'을 두고 나란히 뻗었으며 아차산보루가 잡힐 듯이 보입니다. 용마산1.2보루를 거쳐 다시 용마산 정상을 거쳐 4,5보루를 지나 망우산으로 가다 구리시 쪽의 '시루봉보루'를 거쳐 조선 태종임금의 제1 후궁 효빈 묘까지의 사진입니다.
용마폭포공원관리사무소 우측 언덕진 길로 들어섭니다.
40m 정도 오르면 우측 시멘트계단 위에 수평대가 있는 마당이 있고 그 마당 안 끝에 안내판과 등산로 들머리인 계단이 있습니다.
들머리계단과 안내판입니다. 안내판에는 용마산의 7개의 보루성 위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계단은 철도침목으로 되어 있으며, 오십여 계단입니다.
바위사이 틈새에 뿌리를 내린 산딸기덩굴에 빨갛게 윤기 흐르는 딸기가 예쁩니다. 한낮의 열기만큼이나 정열적인 모습에 현혹되어 잠시나마 흐르는 땀도 잊고 달콤한 산딸기 맛에 취해 더위를 잊습니다.
제법 가파른 바위에 로프가 설치되어 있지만, 이쯤이야 로프의 의존 없이 네 발로 오르는 재미를 느껴볼만하지요.
자줏빛 싸리꽃이 피었습니다. 밤꿀에 이어 이 싸리꿀은 변함없는 아카시아꿀과는 달리 세월 따라 결정(結晶)이 됩니다.
한 그루의 노간주나무자태가 범상치 않습니다. 마치 무희의 요염한 몸놀림 같기도 하고 신라 원성왕릉 앞에 서있는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을 한 무인석의 몸가짐을 닮은 것 같아 눈길을 끕니다. 원성왕릉은 경주시에 있는 괘릉을 말합니다.
아차산은 제법 릿지를 맛볼 수 있는 바위산입니다. 옆 7보루성터가 있는 능선보다는 이 6보루성터로 가는 능선이 바위 타는 맛이 좀 있습니다. 예전에 북한산의 원효능선과 숨은 벽 그리고 여성봉을 넘나들 때가 아련히 그립습니다.
용마산 정상아래의 이 절벽은 채석으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입니다.
제7보루가 있는 옆 능선의 모습입니다.
용마산 정상아래 용마산제1보루와 제2보루로 내려가는 능선에 설치된 전망대입니다. 이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대원외고나 중곡동시장으로 이어지며 이 능선은 긴 고랑을 사이에 두고 아차산주능선과 나란히 동남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등성이에서 잠시 땀을 식히려고 돌아서서 서북방향으로 시선을 주니 연무에 흐리게나마 멀리 도봉산과 우이암과 그 너머 불곡산이 보입니다.
동서방향으로 보이는 남산과 타워 그리고 안산 등이 흐릿합니다. 가운데 중랑천이 왕십리 살곶이다리(箭串橋)로 이어져 흐르고 그 개천을 따라 강변북로와 의정부를 잇는 동서路가 있습니다.
용마산6보루 능선에서 바라본 용마산 제2보루와 1보루입니다. 아랫쪽 작은 봉우리가 1보루터입니다.
다시 출발에 앞서 이마의 땀을 바람에 삭히기 위해 서쪽으로 향해 바람을 맞으며 서니 나도 모르게 동요가 흥얼거려 집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아담했던 서울~~"
용마폭포공원을 내려다본 일부의 모습입니다.
바람과 물 한 모금으로 몸의 열기를 식히고 50m정도 오르니, 무너져 내린 많은 돌덩이들이 보입니다. 저 위가 6보루성터이겠지요.
언저리를 돌아 뒤로 가보니 안내판이 6보루성터임을 알려줍니다.
<용마산제6보루성터/중랑구 면목동 산75번지>사적제45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루성터에 올라서니 城을 쌓았던 돌들이 천오백년 세월의 비바람에 삭고 닳은 모습으로 세월의 무상함을 말없이 일러줍니다.
용마산6보루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일원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보루들과 함께 한강유역의 장악을 위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보루는 크기에 따라 10~100명 정도의 병사가 주둔한 군사시설입니다. 한강유역과 중랑천일대가 잘 보이는 곳에 화강암 할석으로 성벽을 쌓아 만든 용마산6보루는 성을 쌓는 방법이나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로 보아 6세기 전반경 고구려가 쌓았던 것을 신라가 다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크기는 둘레 195m, 면적 2,420㎡ 입니다.
용마산제6보루를 뒤로 하고 7보루성터가 있는 능선으로 가는 길입니다. 좌측에는 옛날 채석으로 인하여 생긴 수십 길 낭떠러지이다 싶으니 발길이 조심스러워집니다.
아차산 일대에는 소나무와 참나무와 진달래 철쭉과 함께 산초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습니다. 등산로는 풍화작용으로 바위가 부서져 내린 마사토여서 비탈진 곳은 잘 미끄러지는 곳입니다.
이렇게 바위가 있는 길은 보기에는 험해 보이지만 표면이 거칠게 살아있어 미끄럽지도 않고 오르기가 좋습니다.
바위에 올라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본 사진입니다. 나무숲사이로 비알진 좁은 등산로가 기둥처럼 곧추서 있습니다.
한 10분 힘들지 않게 왔을까! 앞에 7보루성이 있는 능선이 보입니다.
능선에 올라 7보루터가 있는 곳으로 능선을 타고 내려가는 길입니다.
15m정도 내려가니 앞이 확트인 곳에 작은 봉우리의 그 정수리에 돌무지와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보나마나 용마산제7보루이겠지요.
<용마산제7보루/龍馬山第七堡壘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 455호.>
중랑구 면목동 산 1-4번지 산등성이 작은 봉우리에 둘레 약 74m, 면적 400㎡의 작은 보루입니다. 아차산성 보다는 작은 규모인 보루(堡壘)는 그 크기에 따라 10~100명 정도의 병사가 주둔한 군사시설입니다. 이 일대와 한강 유역은 삼국의 접경 지역이었으니 이 보루들은 점령국에 따라 국경 수비지역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한강 유역과 중랑천 일대가 잘 보이는 곳에 화강암 할석(割石)으로 성벽을 쌓아 만든 용마산7보루는 성을 쌓는 방법이나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6세기 초기에 고구려가 쌓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7보루 아래 있는 바위에는 먹으로 "望巴臺"라는 글자와 비바람에 풍화되어 알아볼 수 없는 먹으로 쓴 글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망파대에서 줌으로 당겨보니 '용마산폭포공원관리사무소' 좌측 입구로 들어가는 도로와 아이 파크 아파트가 보입니다.
7보루에서 바라본 망우산줄기입니다. 저 능선을 타면 서울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 경계인 망우리고개에 이릅니다. 이 능선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이며 능선은 동구능까지 이어집니다.
연무로 흐리게나마 도봉산, 불곡산 의정부시와 수락산, 불암산이 조망됩니다.
망파대의 서쪽면의 모습입니다.
"望巴臺"라는 먹글씨가 보이는 남쪽 면모입니다.
다시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입니다.
쇠말뚝 아래 우측으로 가면 오던 길이 되며 6보루로 바로 통하는 길입니다, 곧바로 능선을 타고 100m 정도 오르면 3보루이자 용마산의 정상이 됩니다.
가파른 이 길은 거칠고 험합니다.
등성이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니 7보루성터의 봉우리로 이어진 길이 마치 공룡의 등뼈처럼 드러나 보입니다.
용마산정상 바로 목전에서 돌아본 7보루에서 올라온 길입니다.
용마산정상이자 제 3보루성터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측량기준점으로 정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용마산 대삼각본점>
이 삼각점은 1910년 우리나라 최초 토지조사사업을 위하여 설치된 "대삼각본점" (최상급 1등삼각점)으로 서울지역에 있는 2점 중 하나로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산1-2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경과되면서 자연풍화 및 훼손으로 붕괴될 우려가 있어 1994년 7월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설물을 정비하여 현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현재는 『세계측지계』도입에 따른 측량기준점으로 이용되는 역사성 있는 중요시설물입니다.
◎ 표 고 : 348.02m
◎ 「세계측지계 경위도좌표」 ◎ 세계측지계 평면직각좌표(중부원점)
● 위도(B) : 37도 34분 16.16325초 ● 종선(X) : - 47,594.075m
● 경도(C) : 127도 05분 44.67039초 ● 횡선(Y) : + 8,457.97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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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스테인리스강판에 새긴 글>
이 시설물은 세계측지계 도입에 따른 측량의 기준이 되는 "지적삼각점"으로 측지측량에도 공동활용이 가능하도록 설치한 측량기준점이오니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관리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08년 11월 서울특별시장
<용마산 정상 대삼각본점>
용마산정상입니다. 해발 348m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산이 가파르고 험해서 인지 상당이 높은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용마산3보루이자 용마산정상(최초의 측량기준점)에서 남쪽능선으로 300m정도 내려가다 우측능선으로 들어서면 바로 용마산6보루가 있습니다. 또한 남쪽능선과 서쪽능선(6보루가 있는 능선) 사이에는 팔각정이 있고, 남쪽능선으로 그냥 내려가면 용마산 2보루와 1보루가 있습니다. 이 길은 팔각정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용마산 팔각정/龍馬山八角亭>
팔각정에서 좌측의 용마산2보루가 있는 남쪽능선의 모습입니다.
용마산제2보루성 안내도와 입구.
훼손을 막기 위해 이 길의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용마2보루로 가는 길
용마2보루로 가는 길
용마2보루, 봉우리정상입구.
<용마산제2보루성(龍馬山2堡壘城址) / 사적 제 455호> 광진구 중곡동 176-123
장타원형에 면적 379㎡,의 용마산 제2보루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일원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보루들과 함께 한강유역의 장악을 위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성곽보다는 작은 규모인 보루는 크기에 따라 10~100명 정도의 병사가 주둔한 군사시설입니다. 이곳은 아차산주능선에서 바라볼 때 불록 솟아오른 두 번째 봉우리입니다. 둘레는 60m, 직경 20m, 폭 8m 정도의 윗부분이 평탄하게 조성되어 둘레를 돌아가며 쌓은 석축이 확인됩니다.
<용마산제2보루성터발굴조사 조감도 >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2005년 10월부터 2006년 6월까지 발굴조사한 용마산2보루성터입니다. 1,400여 년전 고구려 군사들이 사용하였던 군사 요새로 성벽 및 온돌을 포함한 건물지, 저수시절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또한 수백여점의 고구려토기와 다수의 철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용마산2보루성터 둘레주변에는 나무숲이 무성해 전망을 관찰하기가 여의치 않습니다. 동쪽으로는 아차산주능선과 아차산의 3.4보루가 닿을 듯 보이며 남쪽으로는 천호동일부에서 북한산까지 조망이 됩니다.
용마산2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능선에 3보루가 보입니다.
2보루에서 1보루로 가는 길에 보이는 전망입니다. 용마산1보루가 있는 봉우리가 사진 하단을 차지하고, 중단에는 중곡동일대와 아차산 끝자락의 홍련봉1.2보루가 보이며, 테크노마트의 검은 빌딩이 보입니다.
<용마산제1보루 입구>
긴고랑으로 내려가는 입구이기도 합니다.
용마산1보루가 있는 봉우리.
<용마산제1보루>
용마산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능선 끝자락 봉우리에 있는 보루로 고구려토기가 확인되었습니다.
용마산1보루터는 협소하며, 성을 쌓았던 할석을 쌓은 돌무더기가 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사진 중앙의 녹지는 건국대학교입니다.
용마1보루를 답사하고 다시 용마산능선을 거슬러오르다가 뒤돌아서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아차산주능선과 용마산능선 사이 긴고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주택들이 옹기종기 들어차 있습니다.
용마산정상으로 되돌아가다가 잠시 쉬며 돌아보니 방금 거쳐 온 용마산1보루가 있는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아차산 줄기가 마치 뱀의 꼬리 형상으로 늘어져있습니다.
정상에서 용마산1보루와 2보루로 내려올 때는 능선으로 내려왔지만, 다시 돌아가는 길은 능선우측 우회로를 택했습니다. 가파른 벼랑의 바위길이 무더위를 잊게 해줍니다.
산행 길가에 패랭이꽃이 곱습니다. 무더위로 힘든 내게 잠시나마 밝은 미소를 짓게 합니다.
가파르고 꾸불꾸불한 벼랑길은 다시 산등성이를 향해 뻗어 올라갑니다.
타는 듯 붉게 피어난 패랭이꽃 참 곱지요.
용마산정상이 저만치 보입니다.
용마산등성이에 다시 오르니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하고 맵씨 있는 참나리 꽃이 반깁니다.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차산능선을 보니 전망대에 몇 사람이 주변 경관을 관망하고 있습니다.
용마봉정상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 심술을 보이지만, 오히려 밋밋한 길보다는 그래서 재밌고 힘 듬을 덜어줍니다.
밋밋하던 울퉁불퉁하던 어느 한가지로만 이어진 길이라면 힘들거나 지루하겠지만, 아차산도 그렇지만, 용마산도 이렇듯이 여러 면면의 길이어서 등산객의 발이 즐겁고 힘든 줄 모릅니다. 예전에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을 모두 한 가지로 아차산이라 했습니다.
정상으로 가는 막바지 언덕 밑의 갈림길입니다.
이 길을 가노라니 마치 2억1천만 년 전 쥐라기에 살던 공룡의 등을 밟고 가는 기분입니다.
<용마산전망대>
이 전망대에서는 덕소에서 하남시 검단산, 남한산성, 관악산, 남산, 안산, 인왕산, 삼각산, 북한산, 도봉산까지 조망되며, 동쪽의 아차산 주능선과 홍련봉1.2보루와 우측 용마6보루와 7보루가 근접하며 뒤로는 용마산 정상인 3보루가 있습니다. 한강은 팔당댐과 미사리에서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가 조망됩니다.
전망대를 나서기 전 잠시 쳐다본 용마산정상(용마산3보루)
전망대와 용마산정상간의 중간 지점의 계단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용마산전망대와 용마산2보루와 1보루 그리고 아차산의 끝자락이 길게 드리어진 위에 연무가 뽀얗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용마산정상 동편 모습. 아까는 서쪽 6보루에서 올라와서 7보루를 거쳐 남쪽 능선으로 내려가 1, 2보루를 답사하고 동쪽 능선을 타고 용마산 정상인 3보루로 오르는 길입니다. 한마디로 용마산을 헤집고 다니고 있습니다. ^^
용마산7보루로 내려가는 길목의 바위에 앉아 야릇한 밤꽃향기를 즐기는 두 연인? 이길은 좀 전에 7보루에서 올라왔던 길입니다.
용마산정상 동쪽 바로 밑에 3보루건물터로 보이는 곳에 수평대, 철봉대 등 간단한 운동시설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 길은 용마산4보루가 있고 아차산과 망우산으로 이어주는 교통로 역할을 하던 '아차산장성터/峨嵯山長城址'로 가는 길입니다.
푯말에는 망우공원묘지사무소로 가는 길임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심심찮게 이런 길이 발길을 즐겁게 합니다. 이렇게 바윗길을 오르다보니 또 옛 생각이 납니다. 왕십리 무학여고 지나 안장사(寺) 뒤 금호동으로 넘어가는 길은 그냥 돌산에 판잣집들이 듬성듬성 있던 시절, 산마루로 올라가는 길이 꼭 이랬는데 도마뱀이 많았지요. 어떤 아이들은 자랑스레 보란 듯이 도마뱀을 붙잡아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그 위에 올려놓으면 입안으로 쏘옥 기어 들어가면 그대로 꼴깍 삼키던 일이 떠오릅니다. 몬도가네가 따로 없던 그때는 늘 배 골던 시절이고 산에서 놀다보면 허기가 져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할석으로 돌탑을 쌓은 것을 보니 보루성터가 뒤에 있겠지요. 이 돌들은 모두 보루성이 무너져 내린 割石일테니까요.
<용마산제4보루 / 아차산일대 보루군 사적455호>
용마산 정상(3보루)에서 북동쪽으로 약 260m 떨어진 주능선상의 돌출된 봉우리(해발327m)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평면에 긴 타원형으로 전체둘레가 263m, 면적 3,075㎡로 용마산 보루 중 가장 큰 규모입니다.
(서쪽에서 본 4보루 서쪽 모습)
현재 헬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용마산 4보루는 둘레가 228m이며 넓은 범위의 목탄이 포함된 부토 층이 유실되어 마사암반토가 노출 되어 있습니다. 동쪽의 民墓 주변으로 회흑색 연질토기와 큰 항아리 조각, 큰 손잡이 조각 등이 출토되었고 북서쪽에서는 철제 화살촉 한 점이 수습되었습니다. 동쪽 능선을 올라오면 보루와 접하는 지점에 석축구조물이 일부 노출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의 중간 지점인 저지대는 집수시설로 추정됩니다. 1994년 구리문화원의 조사에서 동서가 별개의 보루로 추정하였으나, 2003년 서울시 성곽조사 보고서에서 하나의 보루로 확인되어 용마산4보루로 명명하였습니다. 정식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유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작은 돌 하나도 함부로 옮기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합니다.
(4보루 서쪽의 터 )
<주춧돌>
(4보루 동쪽의 터)
동쪽 아래에서 본 4보루터 동쪽 (아차산과 망우산으로 가는 길 向).
<갈림길>
한 사람이 오고 있는 길은 아차산으로 바로 가는 길이고,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길은 헬기장이 있는 3갈레 지점, 그러니까, 망우산보루群, 아차산보루群, 용마산보루群을 연결하는 길목인 '아차산장성'이지요.
<아차산장성(峨嵯山長城)/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보루들을 이어주는 보루 연결로>
아차산장성(아차산-용마산-망우산-배봉산))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면목동 하북위례성 說)토성으로 추정하며, 고구려가 점령 후에는 각 보루를 이어주던 연결로로 사용되었고, 신라가 점령 후에 이곳에 장한성을 쌓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살곶이목마장의 담을 축성하였던 곳입니다. 아차산장성 길은 고운 흙을 다져서 만들어 1,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작은 돌, 토기 한 조각도 우리의 묻힌 역사를 풀어주는 증표이기에 함부로 옮기지 말아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이곳의 작은 돌 토기 한 조각도 함부로 옮기거나 훼손하면 학술적인 조사연구가 어려워집니다. 고구려보루와 아차산장성을 잘 보존하고 사랑하는 것도 중국의 '동북공정'(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라 주장)을 통한 역사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초석이 될 수 있고 든든한 방패가 됩니다.
아차산장성(峨嵯山長城)에서 바라본 아차산4보루성.
나무 사이로 본 한강과 운길산 검단산.
구리시와 암사동을 잇는 다리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아차산장성址에서 바라보이는 아차산4보루성.
아차산4보루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등에 산재한 보루 중에 유일하게 성곽이 복원되었으며, 시루봉은 구리시에서 복원하였으나 부실한 면이 있습니다.
전에 올린 아차산보루가 있어 이 사진들은 생략하려 했으나 제차 올리는 것은 아차산에서 유일하게 복원된 아차산4보루와 시루봉보루의 차이점과 복원상태를 비교해 보기위해서 '아차산장성'에서 아차산4보루까지 와서 다시 본 것을 사진으로 올립니다.
동쪽 성벽모습.
남쪽 아차산 주능선 길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二重雉의 모습, 양편으로 돌아가는 등산로가 있고 좌측의 돌아가는 길 초입에 보루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4보루의 서쪽 면모(面貌)를 측면에서 본 모습입니다. 보루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보입니다.
계단으로 올라가서 본 보루 위의 모습입니다.
보루 위에서 중심지 모양을 사진에 담은 모습입니다.
아차산주능선(南向)을 향하고 있는 이중치.
동남방향으로 설치된 이중치 좌측에 있는 치입니다. 천호동(풍납토성.몽촌토성)일대를 한 눈에 살필 수가 있습니다.
북동방향으로 있는 치입니다. 수락산에서 구리시, 마사리 암사동까지 조망되는 위치입니다.
북서방향에 위치한 이 치(雉)에서는 망우산 능선과 수락산이 조망되지만 지금은 자욱한 연무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차산4보루 상면에 있는 두 개의 방형은 물저장시설입니다.
다시 '아차산장성'으로 되돌아와서 망우산으로 向한 능선을 따라 용마산5보루로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돌들은 모두 성을 쌓았거나 보루를 축성하는데 쓰였던 할석들입니다. 이렇게 모아 쌓는 것은 이 지역의 문화유산을 말살하는 행위입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돌이나 토기파편일지라도 제자리에 있을 때는 우리에게 엄청난 사료적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되어주지만 그 자리를 떠났을 때는 한갓 돌조각이요 토기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망우리고개의 유래.
망우리에 정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정씨의 조상은 조선 태조와 같이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상당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느날 정사에 골치가 아프던 태조가 자기가 묻힐 자리를 찾는다고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동구릉 자리를 찾아 냈습니다. 묘 자리를 정해 놓고 흐믓해 하던 태조는 동문수학하던 정씨의 집이 가까이에 있어 그 집에 가서 "이제 나 후세에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까 이내 모든 시름을 잊었다네" 라고 말한 후 그다음부터 걱정을 잊었다는 의미로 망우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용마산5보루로 가는 길
<용마산5보루/龍馬山5堡壘>
서쪽의 중랑천 일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용마산능선에 있는 7개의 부루 중 하나로 해발 316m에 위치하고 둘레 약132m, 내부면적 936㎡ 정도의 크기로 추정되고 있으나, 둘레는 석축의 흔적으로 실제는 현재의 2배 정도로 추정하며, 5보루 북동쪽 비탈면에는 성벽으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가 지표면 위로 드러나 있고, 북쪽에서 파손되어 노출된 고구려의 전형적인 토기 양식인 회흑색 연질 토기 몸통긴 항아리(長胴壺) 1점과 물미(창을 바닥에 꽂을 수 있도록 자루 끝에 끼운 것)로 추정되는 철제품 1점을 수습되었다고 합니다. 석축 및 상층부에 건물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헬기장의 축조로 유적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습니다. 1994년 구리문화원 조사에서 처음 고구려의 보루로 확인 되었고, 2000년 서울대박물관에서 조사하였고, 2003년 서울시 성곽조사 때에 측량조사를 실시하였으나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한 적은 없습니다. 2011년 4월 16일 보수(유적지를 복토하여 훼손을 방지하여 보호)를 하였습니다.
<깔딱고개>
용마산줄기에서 망우산으로 이어지기 전에 있는 고개로 매우 가파르고 긴 편이지만 지금은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쉬엄쉬엄 오르면 그리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용마산줄기가 끝나는 곳은 골짜기이자 망우산이 시작되는 기점입니다.
깔딱고개에서 내려다 본 구리시 아천동 마을과 암사동 일대의 모습. 강동구 암사동과 구리시 아천동을 잇는 다리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한강줄기 넘어 매봉산도 보이고 검단산도 보입니다.
구리시 아천동 마을은 저의 고향 같은 추억이 서려있는 마을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의 토박이인 저의 친구가 조상대대로 이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기와집 2채에 초가집 열댓 채 있고 봄이면 복사꽃, 배꽃이 만발하고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고 뻐꾸기의 청아한 노래가 고요한 마을을 깨우던 곳이었습니다.
친구가 살고 있는 집을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입니다. 작가 고 박완서 님이 사셨고, 가수 조성모가 살기도 하는 전원마을입니다.
깔딱고개가 끝나면 망우산이 이어집니다.
용마산자락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깔딱고개라는 이곳은 광나루 아차산에서 구리시 망우리 고개까지 이어지는 등산로 종주에서 가장 가파른 곳입니다. 이 고개를 내려왔거나 오르기 전에 모든 등산객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좌측(서쪽)으로 하산 하면 면목동입니다 7호선 지하철 사가정역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우측(동쪽)으로 내려가면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으로 아치울이라는 동네입니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서 구리시 교문4거리를 거쳐 의정부, 청량리, 또는 춘천이나 양평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며 '남양주 구리시~강변 동서울터미널' 또는 천호동 간 운행되는 버스가 다니고 있습니다.
망우산으로 오르는 초입입니다. 이곳 용마산과 망우산을 6월23일과 6월26일 이틀간에 걸쳐 답사를 하였기에 사진에 따라 날짜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망우산1보루로 가는 길입니다. 주능선을 따라가면 봉우리에 보루가 있습니다.
<망우산1보루/忘憂山1堡壘> 동쪽 모습.
<망우산1보루/忘憂山1堡壘> 북쪽.
망우산1보루는 망우산의 보루 중 훼손이 심한 2,3보루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망우산 남쪽 끝 봉우리(해발280.3m)에 자리하고 있으며, 용마산 보루와 시루봉 보루일대가 잘 조망되는 곳입니다. 1994년 지표조사에서 고구려 토기편 여러 개가 발견되어 고구려 보루로 추정됩니다. 헬기장과 군용 참호 그리고 묘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지금은 헬기장과 참호를 없애고 유적지를 돌아 우회해 가도록 등산로를 새로 만들어 보루성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망우산1보루는 지적삼각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망우산1보루에 세워진 삼각점 표시판입니다.
망우산1보루가 있는 봉우리 정상 모습입니다.
망우산1보루 위에서 망우리고개로 가는 등산로 방향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밤나무꽃이 만개하였습니다.
망우1보루 위에서 바라본 시루봉보루입니다.
시루봉 아래 갈림길에 있는 안내판입니다.
구리시 둘레길 푯말이 있는 이곳은 사거리입니다. 곧장 가면 망우산능선이고 우측으로 170m가면 관룡탑을 거쳐 한다리 마을로 가고, 좌측으로 가면 아천동(아치울), 뒤로 가면 시루봉보루입니다.
20m 걸어가면 시루봉입니다.
<아차산 시루봉 보루>
시루봉 보루는 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시루봉 보루는 행정구역상 구리시 아천동 산7-2번지에 해당합니다. 시루봉 보루가 위치한 아차산 일대는 5~6세기에 속하는 고구려 보루가 밀집해서 존재하는 지역으로 남으로는 한강, 동으로는 왕숙천을 바라보고 있어 서울 강남지역과 구리시 토평동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지표조사에서 소량의 고구려 토기편이 채집되어 1999~2000년에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를 하여 토기와 철기 등 수백 점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성벽과 온돌, 저수시설, 건물지 등 성 내부시설의 구조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시루봉 보루의 조사는 1997~1998년에 발굴조사 된 아차산 4보루의 발굴성과와 함께 고구려 보루의 일반적인 구조를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며 한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삼국쟁패 時期의 경기도 일대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보루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시루봉보루 남쪽 모습입니다. 복원된 성축 위 외곽에 목책(木柵)이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돌려 박혀 있는데, 이는 아마도 본래 있던 울타리의 기둥을 구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축에 올라서서 본 시루봉보루의 서쪽(망우산능선 向) 성벽의 모습입니다.
시루봉보루 위 동쪽 상면의 모습입니다. 비에 흙이 쓸려내려 붕괴를 막으려고 천막을 덮었습니다. 부실공사의 여력이 분명합니다. 보고 있자니 입맛이 씁쓸합니다.
남서방향으로 배치된 이중雉의 모습입니다. 망우산주능선이 조망됩니다.
이중치 왼편에 있는 雉입니다. 천호동과 광진교, 아차산 봉우리들이 보입니다.
이 치에서는 천호동(위례성)과 그 넘어 남한산성이 조망됩니다.
시루봉보루 상면입니다. 보면 볼 수록 답답한 심경입니다. 짜임있게 성실히 복원공사를 했어도 저 파란색의 천막을 덮었을까! 복원 후 삼년 째 이 모양입니다.
보루 북쪽 끝에서 남쪽을 향해 본 시루봉보루의 상면입니다. 시루봉보루는 치가 모두 4개가 있습니다. 남쪽으로 이중치와 두 개의 치가 서로 근접해 배치되었고, 북쪽에는 끝머리에 1개의 치(雉)만 있습니다.
북쪽 끝에 있는 치의 모습입니다. 망우산주능선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시루봉보루 남쪽 아래에서 본 남쪽 성벽과 이중치와 옆에 위치해 있는 치雉의 모습입니다. 부실한 복원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아 이내 발길을 돌려 인근에 있는 효빈묘로 향합니다.
<효빈묘 입구 / 孝嬪墓入口>
극히 예외적인 일로 효빈 묘 아래에는 다른 후궁의 묘소와는 달리 그의 손자 종2품 정의대부 오성군 이치(正義大夫 梧城君 李치)와 배(配) 종2품 현부인 팔계 정씨(縣夫人 八溪 鄭氏) 묘소가 나란히 있습니다. 손자가 할머니의 고적함을 위로라도 하는 양하여 효빈 묘의 현 상태가 더욱 애처롭고 안타깝습니다.
시루봉 아래 북쪽 오솔길로 350m 내려가면 조선시대 내시들의 집성촌이었던 한다리 마을 윗 골짜기에 철판으로 된 효빈묘와 관룡탑 표지가 있고, 다시 우측 산허리로 50m 정도 올라서면 효빈묘가 있습니다.
효빈 김씨(孝嬪金氏)는 조선왕조 제3대 태종임금의 첫째 후궁으로 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第1男인 경녕군(敬寧君)을 낳은 生母입니다. 묘의 위치는 골이 깊은 골짜기 우측 산 중턱아래 있고 앞에는 망우산의 또 다른 가지능선이 앞을 가려 바람 한 줄기 없이 막혀 답답하고 적막한 곳입니다.
효빈의 아들 경녕군은 1395년(태조4년)12월13일 태조 이성계의 3째 아들 정안군(태종)과 후실 김씨 사이에서 개성의 사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휘(諱)는 비(裶),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제간(齊簡) 입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습니다. 적자인 양녕대군, 효령대군과 같이 수학하고 충령대군(세종대왕)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여 국정의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필히 자문에 응하였습니다. 1414년(태종14년)에 정윤이 되고 1417년(태종17년)9월에 정헌대부(정2품) 경녕군으로 봉작되었습니다. 1419년(세종1년) 8월 명나라와 마찰이 있자 상왕 태종대왕의 정사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나가 국교를 정상화 시키는 동시에 파격적인 후대를 받았으며, 특히 황제의 친필로 된 어제서(御製序)를 비롯한 많은 선물을 받았으며, 그 해11월 18일 귀국하였습니다. 상왕 태종대왕은 크게 기뻐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지금의 무악재까지 나와 환영하고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경녕군의 나이 24세였습니다. 공은 그 후에도 세종대왕을 수시로 보필하고 국방의 대비책과 불교문화의 정화에도 크게 공헌하였으며, 특히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는 조정을 대표하여 국교를 돈독히 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1425년(세종 7년)11월 숭록대부(종1품)에 오르고, 1430년(세종12년) 정월에 최고의 품계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정1품)로 승계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승하할 때 " 후일 경녕군 묘소는 왕릉에 못지않게 예우를 갖추어 드리라"고 했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묘지는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습니다.
이 비석은 효빈 김씨의 비석으로 후손들이 세운 것입니다. 비문은 경녕군에 대한 기록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잔디보다 잡초가 더 무성하고 석물도 온전히 자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웃해 있는 또 다른 태종의 후궁 묘인 명빈묘(明嬪墓)는 문화재관리청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이 효빈묘는 이리 방치하는 건지 인물의 비중이나 기록으로는 史蹟으로 국가에서 관리 할 만하건만 후손들이 돌보는 듯 한데 이 지역이 문화재관리청 토지가 아니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산이 가려 갑갑하고 보존이 허술하여 답답하네.
효빈의 손자 종2품 정의대부 오성군 이치(正義大夫 梧城君 李치)와 부인(配) 종2품 현부인 팔계 정씨(縣夫人 八溪 鄭氏) 묘 앞에 세운 문인석입니다.
오늘의 산행이 끝나는 구리시 이문안마을 샛다리저수지어린이공원입니다.
오후 3시경에 7호선용마산역으로부터 시작한 산행은 대략 4시간이 지난 오후6시51분에서야 마칩니다.
2013년 6월에 아차산에서, 鄕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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