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이천동 '마애여래입상' (일명 제비원 미륵)(泥川洞 磨崖如來立像)

鄕香 2012. 8. 15. 15:27

 <泥川洞 磨崖如來立像)>보물(寶物)제115호

 

오층 전탑을 보고 '마애여래입상' 이 있는 이천동으로 가기 위해 안동역에서 왼쪽 도로를 달리다 네 번째로 맞은 큰 사거리에서 5번국도 영주방향(우측)으로 다시 폐달을 힘차게 밟고 10분 정도 달리니 고개가 나옵니다. 제법 긴 언덕이어서 크랭크기어를 1단에 두고 R-gear를 8단에 놓아 가장 느리고 힘 좋은 상태로 어느 정도 힘들었지만 거뜬히 오르고 나서 내리막을 달릴 때는 돋아났던 땀이 오간 데를 모른다싶게 느끼기도 전에 우측에 ' 새로 공원으로 꾸민 넓은 잔디밭과 산 중턱에 거대한 불상이 미소를 머금고 반깁니다. 

 

 

안동시 북쪽 이천동 태화산 기슭에 있는 이 불상은 전체 높이가 12.38m에 이르는 매우 큰 불상으로, 일명 ‘제비원 석불’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높고 커다란 암벽에 부처의 몸을 얕게 새겨 넣고 얼굴과 머리를 따로 조각하여 올려놓았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 옛날 어떤 형제가 가장 뛰어난 조각가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조각공부를 하였다. 문득 세상에서  제일 가는 조각가는 둘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형제는 실력을 겨루어서 지는 쪽이 죽기로 했다. 약속한 날까지 훌륭한 미륵을 다듬기로 했는데, 아우는 부지런히 돌을 갈고 다듬었으나 형은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동생은 약속한 날까지 미륵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형은 형은 미륵의 머리만 잘 다듬어서 바위 위에 얹어 지금의 미륵불을 만들었다. 겨루기에 진 아우는 죽었으며, 형이 완성한 미륵불에는 지금도 큰 바위에 조각한 머리를 얹어서 만든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몸에 얕게 새겨진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도식적이고, 두 손 모두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 손을 배에 대고 왼손은 가슴 높이로 올린 모습으로 발밑엔 큰 단판의 연꽃이 음각된 대좌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큰 육계는 머리와는 별도로 만든 것으로 뒷면과 옆면이 결실되었습니다.

 

 

<우측면 모습>

얼굴은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눈썹 사이에 백호(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를 양각으로 크게 새겼습니다. 또한 좁고 긴 눈과 우뚝 솟은 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입술은 두툼하고 다부지며 측면으로 본 얼굴의 모습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78호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측면 얼굴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로 닮았습니다.

 

 

미륵불의 목 부분을 보면 반구슬처럼 생긴 돌기들이 있는 것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정군 대장 이여송은 난이 평정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큰 인물이 날 명당자리를 찾아다니며 혈을 끊었다. 말을 타고 전국을 다니는 길에 제비원 앞을 지나는데 말발굽이 땅에 붙어서 꼼짝하지 못했다. 이여송은 길 곁의 큰 미륵불을 발견하고 칼로 목을 쳐서 떨어뜨렸더니 미륵불 목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아직도 가슴에 핏자국이 보이고 왼쪽 어깨에 말발굽 자리가 남아 있다고 한다. 안타깝게 여긴 스님이 떨어진 머리를 제자리에 올려놓고 횟가루로 붙였는데 그 자취가 미륵불 목에 염주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 불상은 자연암벽에 신체를 선으로 새기고 머리는 따로 올려놓은 큰 불상으로 이와 같은 불상은 고려시대에 많이 만든 것으로, 파주 용미리 마애불입상(보물 제93호)도 이와 비슷한 수법을 보입니다. 이 불상의 머리 뒷부분은 어떤 연유로 파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절묘하게 잘려 나갔고 앞부분은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높게 솟아 있고,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가 흐르고 있어 거구의 불상임에도 균형 있게 자연스럽습니다. 머리와 얼굴 특히 입에는 주홍색이 남아 있어서 원래는 채색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몇 개 안되는 옷주름은 매우 도식적(圖式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양 손은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어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작품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지방화된 거구의 불상 가운데 하나로 당시 불상 양식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불상의 뒷모습으로 불상의 머리 뒷부분은 수직으로 잘려나갔으나 얼굴은 온전히 남아있습니다.

 

 

<안동 이천동 삼층석탑(泥川洞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

 

 

마애여래입상 우측 뒤쪽 위에 있는 이 탑은 상륜부는 유실되어 없고 1층 탑신과 2층의 탑신의 높이가 큰 차이를 보이는 등 균등함이 없어 1층과 2층 사이에 있던 탑신과 지붕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이 되고 따라서 이탑은 3층탑이 아닌 5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탑과 마애미륵불 뒷모습을 함께 찍은 것입니다.


 

 <연미사 대웅전>

지금의 이 절은 근래에 세운 것으로 십 몇 년 전에 왔을 때만해도 이 사찰은 없었습니다.

 

 

(솔씨공원)

작년에 이곳을 정지작업하여 공원을 꾸몄는데,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답니다.


"옛날 이 자리에는 관리들이 출장길에 묵어가는 '원(院)'이 있었다. 일찍이 부모를 잃은 '연이'처녀가 '원'에서 심부름을 하며 길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부잣집 김씨 총각이 죽어서 저승에 가니 염라대왕이 "너는 세상에서 못된 일을 많이 하여 저승 창고가 비었다. 아직 젊으니 착한 일을 많이 한 '연이'의 인정을 빌려 재물을 베풀라." 하며, 저승에서 인심을 쓰니 이승으로 돌아왔다. 김총각이 저승 일을 말하고 재물을 나누어 주자 '연이'는 그 재물로 큰 법당을 지었다. 대목(大木 : 큰 건물을 짓는 목수)이 법당의 마지막 기와를 덮고 제비가 되어 날아갔으므로 연비사(燕飛寺)라 하고  '원(院)'이름도 '제비원'이라 하였다. 아침저녁 법당에 기도하던 '연이'처녀가 38세의 나이로 죽자, 바위가 갈라지면서 큰 돌부처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연이'의 혼이 변해서 지금의 미륵불이 되었다고 한다. "

 

 

제비원가는 길 고갯마루에서.. 

 

 

 2012년 8월14일 - 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