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에 그냥

생육신 '원호' 관란정(觀瀾亭) 제천시 송학면

鄕香 2012. 8. 3. 18:08

 

『 생육신 '원호' 관란정(觀瀾亭) 』

 

 

 

원호(元昊 - 生歿未詳)의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 아버지는 별장 헌(憲)이며, 김시습(金時習:1435~95), 이맹전(李孟專), 조려(趙旅:1420~89),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1454~92)과 함께 생육신이라 부릅니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죽음을 당한 사육신에 비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켰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으로 불렀습니다.

원호公은 1423년(세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청환직(淸宦職) 등을 거치고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이 되었습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자, 고향인 원주로 돌아가 은거했으며, 그 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 등의 세조 제거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다음해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조석으로 영월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해 단종이 살해되자, 영월에 가서 삼년상을 마친 후 계속 원주에 칩거하였습니다. 이에 관직에 있던 조카 효연(孝然)이 찾아와 뵙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했으며, 세조가 호조참의로 임명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단종의 능이 집의 동쪽에 있다 하여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반드시 동쪽을 향했다고 합니다. 손자 숙강(叔康)이 예종 때 사관으로서 〈세조실록〉을 편찬하던 중 직필로 인해 주살 당하자, 책을 모두 소각하고 자손들에게 글을 읽어 명리를 탐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1703년(숙종 29) 원천석(元天錫)의 사당에 배향되었고, 1782년(정조 6) 생육신인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습니다. 함안 서산서원(西山書院), 원주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정간(貞簡)입니다.

 

 

<관란정과 비각>

 

관란정(觀瀾亭)

이 정자는 1845년(현종7년)에 중수하고 1941년에 改修하였고, 1970년과 1987년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원호는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내주자 관직을 버리고 원주로 내려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중 단종이 청령포에 유배되어 오자 원호는 서강 가에 단을 쌓고 조석으로 청령포를 향해 절을 올리고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습니다. 손수 가꾼 채소와 과일이며 음식을 단종에게 보낼 때는 풀잎에 글을 지어 빈 박통에 넣고 입구를 막아 물에 띄워 보내면 영월의 유배지 청령포의 물굽이 치는 곳에서 단종이 받아보게 되었다 합니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뒤에는 항상 단종이 묻힌(장릉) 동쪽을 향해 앉고 누웠습니다. 이렇듯 단종을 향한 원호의 일편단심은 깊고도 굳었던 것입니다. 그 뒤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이 원호의 충의를 기리고자 현종11년(1845년)에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관란정(觀瀾亭)이라 하였습니다.

 

 

정간공(貞簡公) 원호유허비(元昊遺墟碑) 비각 뒤 벼랑 가에 소나무등걸의 가지를 잘라낸 곳에 다른 수종(참나무?)이 뿌리를 박고 소나무몸통에서 공생을 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위 사진 細部)

 

(원호의 비각과 비석)

 

 

<이 비의 윗면(上面)에 큰 글씨 머릿글 전서체(篆書體)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충신관란원호생유허비>(朝鮮忠臣觀瀾元昊生遺墟碑)" 

 

비석 뒷면(碑後面)

 

이 싯귀(詩句)는 비석의 글 중 한 부분입니다.

 

"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울어 지나가다.

  이제와 생각하니, 임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고 져 나도 울어 보내도다. "

 

 

<관란정에서 내려다 본 '동강' 줄기와 전망>

 '서강'이 U자형으로 굽어 관란정 아래를 거쳐 흐릅니다.

 

 

관란정에서 서강가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은 두 길인데 관란정에서 바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가면 제1관망대에 먼저 도달하고 관란정에서 좀 떨어진 이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로 제 2 관망대에 이릅니다. 두 관망대는 연결되며 모두 원호가 영월을 향해 조석으로 절을 하고 곡(哭)을 하던 '아이고'바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이고'바위는 강가 암벽 위에 두어 사람이 머물 수 있을 정도의 넓이가 있는 바위로 멀리 청령포와 莊陵를 향해 바라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제 2 관망대 모습.

이곳은 '아이고'바위와 '함지박바위'를 볼 수 있게 마련된 곳인데 무수한 나뭇가지에 가려 보일 듯 말듯 관망이 어렵습니다. 좀 극성스럽게 난간에 올라서서 줌으로 아래 사진 두 장을 담았습니다.

 

 

제2전망대에서 좌측으로 본 동강과 영월 방면의 산들의 전경입니다.

 

 

제1전망대에서 서강과 오른편쪽  관란정 아래 '아이고 바위 절벽을 바라 본 전경입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바위절벽 위를 '아이고' 바위라 하고, 아래 물가 흰 바위를 '함지박' 바위라고 합니다.

 

 

<함지박 바위>

보이는 물가의 흰 바위가 "함지박"을 띄우던 바위라고 합니다. 

"어린 임금의 원통함을 달래주기 위해 채소와 과일을 준비하고 나뭇잎에 글을 적어 커다란 함지박에 담아서 이 바위에서 강물에 띄우면 그 함지박은 굽이치는 물길을 따라 단종이 자주 오르내리던 청령포 노산대 밑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단종이 원호가 보낸 글을 읽고 나면 빈 함지박은 또 다시 강물을 거슬러 관란정으로 올라갔다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제 1 전망대 모습입니다.

 

 

<아이고 바위>

제1전망대는 제2전망대 보다는 '아이고바위'있는 곳과  가까워 '아이고'바위를 보기에는 한결 좋습니다. 관란정 아래 절벽을 이룬 '아이고'바위주변경관이 뛰어난 곳으로, 원호가 단종의 승하를 애통해하며 이 바위절벽 위에서 곡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제2전망대에서 다시 올라오면 두 계단으로 양분됩니다. '관란정'과 좀 떨어진 아래쪽으로..

 

 

<세종世宗 이후 문종 - 단종 - 세조간 정세>

세종대왕(世宗)은 정도전의 재상중심 정치운영론이나 태종의 왕권강화론을 절충하면서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집현전의 설립·육성을 통해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학문연구기관을 만들어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유교의 정치론은 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론보다는 신하 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지향함으로써, 현실의 정치는 자연히 신하의 발언권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말년에 세종이 병으로 정치운영에 참여하는 기회가 적어지자 신하의 발언권은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세종이 죽자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런데 세종에 이어 즉위한 문종도 곧 죽자, 김종서·황보인 등 세종 이래의 유신들이 재상이 되어 정치운영을 독점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소수의 재상이 전권을 독단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되어, 많은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며 공론을 실현하는 신하 중심의 정치론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한편 태종 이래 강력해진 왕실은 소수의 재상에 의한 정치운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재상에 의한 권력독점에 반발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결과 중앙정치에서 전권을 장악한 김종서·황보인 등에 반발한 수양대군의 왕실과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적 변란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유정난(癸酉政亂)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계유정난에 의한 김종서·황보인 등의 축출과 수양대군에 의한 왕위찬탈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유교정치와 상이한 점이 많았다. 물론 집현전 학자들은 수양대군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뜻을 같이 하여 김종서·황보인 등 재상 중심의 정치운영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고, 그런 점에서 계유정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지향하게 되었는데, 이는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지향하는 신하중심의 정치운영론과 다른 것이었다.

그 결과 두 세력은 충돌하게 되고,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정변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단종복위운동이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되어 많은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가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고 유학자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죽음을 당한 사람을 사육신이라 부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사람을 생육신이라고 불렀다. 중종반정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고, 그 후에 빚어진 정치운영상의 변화 속에서 그들의 위치가 자주 바뀌었다. 

 

 

2012년8월1일 - 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