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에 따르면,"
옛날 충주 주변을 떠돌던 두 마고할머니가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답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두 마고할머니는 서로 힘자랑을 하게 되었는데 먼저 한 마고할머니가 큰 바위를 들어 던진 것이 날아가 논 가운데에 박혔습니다. 이를 본 다른 마고할머니가 다시 큰 바위를 들어서 날리니 그 바위도 논 가운데로 떨어져 먼저 던진 돌 위에 얹혀서 하나처럼 되었답니다.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 한 두 마고할머니는 제 갈 길을 갔고 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지금의 선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몸이 안 좋은 사람, 자식이 없는 사람이 몰래 와서 빌고 간다는 주술적 기자사상(祈子思想)과 관련된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오늘날 마을 이름을 입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입석리는 행정구역으로 충북 제천군 송학면 입석 1,2,3리로 분리되었으며 1995년 1월 제천시로 편입되어 현재는 입석동, 입석마을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조선조 말엽 입석2리(약400년 전)에 제일 먼저 마을이 형성되어 당골, 샛터, 백평, 잔다리, 선돌백이, 잦뒤 등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입석이라고 부르지만, 그 전 고려 때는 이 마을이 '입석부곡(立石部曲)'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부곡(部曲)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있었던 특수한 행정구획으로 그 특성이 무엇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향(鄕), 소(所)와 함께 대체로 전쟁포로나 범죄인을 집단으로 거주시키거나 또는 반란이 일어난 향읍(鄕邑)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데서 생긴 것으로 추측됩니다. 《태조실록》에 "고려 왕조 때 5도(五道) 양계(兩界)의 역자(驛子), 진척(津尺), 부곡(部曲)의 주민은 태조 때 명을 어긴 자들로서 모두 천한 역을 지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고려왕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고려에 저항한 호족이 있는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부곡민으로 편성했던 것을 알 수 있듯이 아마도 부곡에 거주한 백성들은 군현민(郡縣民)에 비해 신분적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부곡은 모두 412개소인데, 보다 더 많은 수의 부곡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수한 행정구획으로서의 부곡은 고려 중기 이후 그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하여 고려 말기에는 일반군현과 신분적 차이가 없어졌고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거의 소멸되었습니다. 15세기 중엽《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될 당시 남아 있던 부곡은 68개소였고, 16세기 전반《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무렵에는 14개소만이 남아 있었음이 이를 증명합니다.
"선돌(立石)"
선돌은 선사
생김새는 대부분 길쭉한 돌기둥이지만 가끔 넓적한 판석이나 제천 입석동 선돌과 같은 예도 있습니다. 세워져 있는 끝부분이 뾰족한 것과 뭉툭한 것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남성을 상징하고 후자는 여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간혹 선돌에 줄무늬나 원을 새긴 것이나 홈이 파여 있는 것도 있습니다. 원이 새겨진 것은 옥천군 안터1호 선돌에서, 줄무늬가 있는 것은 대청댐 수몰지역 언저리인 옥천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선돌을 세운 당시 사람들의 삶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7개의 홈이 팬 것도 있는데 이는 대부분 칠성믿음과 연관되며, 아들을 바라는 기자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선돌이 점차적으로 그러한 기원(祈願)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선돌이 있는 곳은 거의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나 평지이고 가끔 낮은 구릉지대나 논이나 밭 가운데에서도 보이고 또한 고인돌 옆에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인돌의 옆에 있는 경우로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금내리와 영암군 입석리, 광주직할시 북구 충효동, 충청북도 청원군 아득이, 옥천군 안터 등 입니다. 지금까지 조사된 몇 가지 예를 보면 이것은 제단을 나타내는 의미보다 묘표적(墓標的)인 성격이 더 짙은 것 같습니다, 이는 선돌을 세운 이후 오랜 세월에 환경과 풍습에 변화를 가져온 면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미치기도 합니다. 가까운 예로 보자면 옛 성인이나 장수를 신격화 해서 모시는 사당이 생기듯 말입니다. 선돌의 기능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대부분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첫째, 암석, 칠성, 성기 숭배에서 나타나듯이 다산, 생산, 장수를 바라는 풍요의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둘째, 벽사(辟邪), 수구막이의 역할을 하는 선돌은 수호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것은 1쌍으로 있든지 성(性)의 구별이 뚜렷한 점이 특징입니다.
셋째, 죽은 사람을 상징하거나 무덤을 표시하는 무덤돌의 기능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선돌이 세워진 시기는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것을 말하며, 대체로 고인돌과 같은 시기인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제천 입석리 선돌(堤川 立石里 立石)> 충북 기념물 제117호.
입석리 선돌은 용두산(동쪽)과 골미산(남쪽) 등의 여러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지대에 위치하며, 남한강 상류의 갈래인 시곡천이 앞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선돌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랫부분인 하단은 높이 66cm의 낮고 폭이 넓은 3개의 돌을 놓았고, 다시 그 위 가운데인 중단에도 세 개의 돌 ( 높이96cm,너비140cm,두께96 ~116cm)을 올리고, 마지막 상단 위에는 큰 돌 한덩어리(높이245cm,둘레654cm,너비258cm)를 올려놓아 전체로 보면 7개의 화강암을 쌓아서 하나의 선돌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전체 높이 395cm로 이제까지 충북지방에서 확인된 선돌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하며 위끝 한쪽이 뾰족한 남성선돌의 특징을 가집니다. 남한강 유역의 대표적 선돌의 하나인 입석리 선돌은 제천 황석리 선돌, 단양 각기리 선돌들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홀로 있으며, 마을 이름이 '입석리'로 된 것처럼 이 마을의 문화적 중심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이 선돌을 보존하기 위하여 1974년부터 주민들이 '선돌회'를 조직하여 관리하며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선돌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2012년 8월1일 - 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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