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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산성 / 赤城山城(단양/丹陽)

鄕香 2012. 7. 18. 21:43

적성산성(赤城山城)은 중앙고속도로 제천 방향 단양휴게소 뒤에 위치한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 변동을 알아보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둘레가 약 900m 이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붕괴되었고, 겹으로 쌓은 북동쪽의 안쪽 벽 등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일부 복원하였습니다. 성을 쌓은 축성 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 있어 당시 성 쌓는 기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됩니다. 성내에서 신라의 북진과 그에 따른 조처 등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 담긴 비석이 발견되었으며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적 제265호 /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소재> 

 

<외성곽 모습>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적성산성으로 올라가는 계단>

 

<갈래길 이정표> 바로 올라가면 적성비가 있고 우측으로 가면 성벽위로 성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적성비 있는 곳으로 가는 돌계단> 계단을 오르면 편평하게 정지된 곳에 비각이 있고 비각 뒤가 이 산성의 정상부이며 정상부에서 좀 더 가면 성곽을 돌아볼 수 있는 길로 이어집니다.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국보(國寶)제198호>

이 비문은 크게 세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문단은 국왕(新羅 眞興王)이 대중등(大衆等)이란 직명(職名)을 가진 훼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를 비롯한 9인의 고관들에게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도록 교(敎)를 내린 부분입니다. 교의 내용은 비문에 보이는 전체내용을 가리키는 듯한데 이 고관들은 고구려의 적성지방을 공략하는데 직접 참여한 군사지휘관들로 여기에는 김유신의 할아버지(祖父)로서 문헌상에도 확인되는 무력(武力)을 비롯하여 이사부 등 인물이 보입니다.

둘째문단은 적성지방 출신의 야이차란 인물이 행한 어떤 공로를 기려 그의 처 등 가족들 및 그와 일정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포상하는 내용입니다. 포상의 대상(對相)은 몇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체적인 포상의 내용이 각기 다른데 이는 그들이 주인공인 야이차(也尒次)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수행한 역활에서도 어느 정도 차이가 났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셋째문단에는 비문의 마무리 부분으로 결정된 사실을 현장에서 관련자들에게 전달하고 실제로 집행한 사람과 비를 쓰고 세운 사람을 열거하였는데 왕경인과 지방민의 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고 / 한국고대금석문 제2권)

 

 

<적성비와 비각>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국보(國寶)제198호>

이 비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 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국민이나 점령지 주민에게 본국의 시책을 이해시키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한 표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1978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는데,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 척경(국경 개척)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야이치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이와 같이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정책의 포고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비문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고관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 진흥왕 때 많은 功을 세운 인물로 이사부, 비차부, 무력 등이 주목됩니다. 이러한 인물들이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진흥왕6~11년(545~550)경으로 추정합니다.

 

 

비각뒤 정상부로 올라가는 돌계단

 

 

정상부를 오른쪽에 끼고 가는 잡초가 무성한 성곽 길

 

성곽에서 본 정상부

 

 

동쪽 성문 있는 곳의 전경

 

 

성문이 있던 곳

 

 

성곽위에서 바라본 동쪽 전경

 

 

 

 

 

성곽에서 바라본 남쪽 전경(全景)

 

 

남쪽 성벽

 

 

성벽 상면

 

성벽 측면

 

 

성벽위에서 본 서쪽 풍경 단양휴게소가 보입니다.

 

 

 

 

 

 

 

이 적성산성은 산성 내에 세워져 있는 적성비문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545 ~ 551년경에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이 성을 언제 축성했다는 문헌상으로 확인된 것이 없고 또한 비문은 점령자에 의한 것입니다. 문헌상에 의하면 당시 이 지방은 고구려의 영토 였고 고구려와 신라의 치열한 각축전이 있던 곳이며 가까운 곳에 있는 온달산성과 그 구조나 성을 쌓은 축조 방법이 거의 유사한 점으로 볼 때 실제 신라가 쌓은 것인지 고구려가 쌓은 것인지는 좀더 연구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적 제264호. 온달산성(둘레 682m.)은 석회암과 사암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서, 성벽이 산의 정상 부근부터 북쪽을 향해 형성된 경사면의 윗부분에 둘려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성벽의 구조는 내외협축(內外夾築 : 흔히 산에서 보는 돌탑 쌓은 방식)의 형식을 취해 축조되었습니다. 1989년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지표조사에 의하면, 성벽의 기단부는 암반을 이용해 기초를 삼고 있으나 일부 구간에는 암반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계단상으로 기단석축을 한 곳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축조방법은 고구려 산성에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수축된 북쪽 성벽의 기단 보축(補築)은 45° 각도로 역삼각형의 돌쌓기를 하고 거기서 1m 안쪽에 성벽이 축조되는 방법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방식은 적성산성에서도 볼 수 있으며 보은의 고구려가 축조한 삼년산성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가장 전형적인 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적성산성과 온달산성은 발굴 유물에 있어서도 그 성격이 비슷합니다.

 

 

 

지나온 곳을 뒤돌아 본 사진입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비각이 있는 곳과 단양휴게소에서 올라온 입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됩니다

 

 

 

성곽위에서 성벽 밖을 내려다본 사진입니다. 성벽이 3단으로 쌓여 있습니다. 1단의 성벽을 쌓고 안으로1m정도 좁혀 통로같은 대(帶)을 두고 2단의 성벽을 쌓고 같은 방법으로 3단을 쌓은 것이 확인됩니다.

 

 

성 밖에서 본 성안 정상부 사진입니다.

 

 

성 밖에서 본 3단으로 쌓은 성축의 사진입니다.

 

 

근접해서본 성벽 사진입니다.

 

 

1단에 올라서서 측면으로본 사진입니다.

 

 

상층부 3단 성벽의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중앙고속도로 제천 방향 단양휴게소 뒤에 위치한 적성산성 그 일부가 보입니다.

 

 

 

<단양휴게소 건물>

 

 

2012년 7월11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