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과 해의 사투> 2012/07/31 아침
<제천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보물(寶物)제459호
《장락동 7층모전석탑(長樂洞 七層模塼石塔)》(제천시) 보물(寶物)제459호
회흑색의 점판암(粘板岩)으로 조성된 모전탑(模塼塔)으로 현재 높이가 9.1m이며 건립연대는 탑의 형식이나 돌 가공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됩니다. 자연석으로 단층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사각형 화강암기둥을 네 모퉁이에 세우고 동.북쪽면에는 다시 화강암 문틀과 각각 2장의 판석으로 문을 두고 기둥돌과 문틀 사이 여백은 점판암전돌로 쌓아 채웠으며 서.남쪽 벽면은 전면(全面)을 전돌로 쌓았습니다. 또한 1층 지붕돌부터 7층 지붕돌 까지 몸돌과 지붕돌을 모두 모전돌로 쌓았는데 특히 지붕은 밑은 내물림 방식으로 위는 들이물림으로 상하 맞물림으로 지붕위와 밑이 똑같은 비율을 준 모양으로 1.2.3층은 몸신으로부터 중심판을 제외한 상하 같은 모양으로 9단에서 1단씩 줄여나가 중심판(상하 공용 1단)인 지붕 끝단에 이르도록 두께를 조절해 층단을 이루었습니다. 4.5층은 탑신에서 8단으로 시작하여 지붕 끝머리(1단)에 이르도록 같은 방법으로, 6.7층은 탑신에서 7단으로 시작하여 추녀 끝단(중심판)인 1단에 이르기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지붕 두께와 폭을 조절해 절묘한 비율로 칠층에 이르는 높은 탑을 상.하층의 크기를 두어 1,200년 세월의 모진 풍파에도 견뎌올 수 있도록 신기에 가까울 지혜와 솜씨로 조형미가 아름답고 장중하고 안정감이 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무너지기 직전의 것을 1967년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이때 7층 지붕돌 위에서 꽃모양이 새겨진 청동편이 발견되어 상륜부(相輪部)는 청동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모서리 방향으로 본 모전탑>
<남쪽 면(南向面)>
<동쪽 면(東向面)>
<북쪽 면(北向面)>
<서쪽 면(西向面)>
모전탑 앞개울가 달맞이 꽃
<장락사지(長樂寺址)全景>
장락사지는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동65-2번지 일대에 위치한 옛 절터로서 2003년에서 2008년까지 시굴조사와 세 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34개 동(棟)의 건물터와 담장터, 보도시설, 우물을 학인하였고, 기와류, 토기류, 자기류, 흙거푸집, 글씨 없는 비석(白碑), 쇠솥, 쇠못, 쇠자물쇠, 청동 숟가락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출토된 각 유물의 종류와 성격으로 볼 때 장락사지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이래 조선 중기까지 존속하다가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장락사지는 창건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중창불사가 이루어졌고 가장 번성했던 때는 고려시대로 조사지역 전역에서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유물 또한 가장 많은 양이 출토되었습니다. 장락사지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제천 지역에서는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불교유적이라는 점과 발굴된 연화문수막새와 새끼줄무늬 및 직선문이 새겨진 기와 등은 제작시기가 6세기 후반 경으로 확인되고 있어 고대의 문화 흐름의 경로와 이 지역의 고대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입니다.
<장락사지 발굴 현황도>
<1차 발굴 당시 모습>
<2차 발굴 당시 모습>
<3차 발굴당시 모습>
<장락사지 (삼국.통일신라시대 제7 . 8건물터)>
제7건물터는 장락사지 여러 건물터 중 최초의 건물터로 가장 오래된 건물지이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원한 제8건물터는 장락사지의 1차 중창기 유구로 통일 신라시대에 만들어 졌습니다. 건물터의 기단렬은 서쪽과 북쪽 일부가 확인되었고 서쪽 기단의 남은 길이는 9.1m이며 북쪽 기단의 남은 길이는4.4m입니다. 기단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기초의 내부 흙속에서 삼국시대 직선문, 사선문, 무문 기와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제7 건물지 (삼국 . 통일신라 때 건물지) 사진>
<장락사터 지킴이 거미>
<장락사지 (고려시대 건물터)>
제17건물터는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습니다. 4기의 적심석(주춧돌의 기초)이 확인되었고, 적심열 서쪽으로 기단열이 있어 건물지와 건물지를 구분지어 주고 있습니다. 복원한 제18 건물터도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10기의 주춧돌이 확인되었는데 2기는 주춧돌이 없어졌습니다. 정면4칸, 측면 1칸으로 서쪽 열 1칸이 다른 곳 보다 넓습니다. 건물의 기단이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고 결구력을 높이기 위해 기단열 사이에 대형 석재를 끼워 넣었습니다. 제19건물터도 고려 후기의 건물터로 5기의 적심석이 확인되었습니다.
<장락사지(고려시대 건물터) 사진>
<장락사지(고려.조선시대 제13,14, 20,21,22건물지 . 우물터)>
복원한 제13건물터는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고 서쪽을 바라보는 건물입니다. 장락사터에 남아 있는 유구(옛 건축물의 남은 흔적)중 가장 잘 남아 있는 건물터입니다. 긴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만들고 안쪽에 온돌시설을 마련하였습니다. 제14건물터는 제12건물터와 제13건물터 윗면에 조성된 것으로 3차례에 걸쳐 지어진 건물터로 확인 되었습니다. 제20 . 21건물터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 졌고, 제22건물터는 고려 중기에 해당되고 건물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만 남아 있습니다. 우물터는 제11건물터 서쪽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물의 폭은 2.3m이고 깊이는 3m가 넘습니다.
장락사지 건물지 중 (고려 후기 건물터)
(우물터 발굴 모습) 깊이 3m 이상, 폭 2.3m .
장락사지 출토 <수막새기와>
장락사지 출토 <암막새기와>
장락사지 출토<명문 암키와>
장락사지 출토<각종 수막새>
장락사지 출토<각종 항아리>
<장락사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
<측면으로 본 관음전 과 그 뒤 관음보살입상 >
<장락사 전경>
<한 마디>
웅장한 칠층모전탑과 옛 터가 보여주 듯 신라 때 아담한 절로 창건된 장락사를 통일신라 때에 소담한 이 절에 걸맞지 않는 웅대한 모전탑을 세운 것은 아마도 삼국통일 후 이 지방의 민심을 불심으로 다스리려한 통일신라의 의도적 의미가 아닐까... 그런 기미는 충북지방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적성산성에 세운 적성비와 이 모전탑과 충주시 탑평리에 세워진 국보 제6호 칠층석탑(일명 중앙탑) 그리고 가깝게 예를 들자면 송학면 시곡리 여래입상(양감있는 얼굴과 어깨와 잘록한 허리 긴 법의와 양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불상으로 추정함)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예는 모두 통일신라가 중원지방에 세운 기념비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조심스런 추측을 해 봅니다. 2012년7월31~8월1일,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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