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지코지」
신양해수욕장에서 2km 에 걸쳐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섭지'란 才士가 많이 배출된 지세라는 뜻이며, "코지"는 곶을 뜻하는 제주 방언입니다. '곶'이란 바다쪽으로 방죽처럼 길게 뻗어 있는 육지를 말합니다. 뱃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바닷가 쪽의 '고자옷코지'와 해수욕장 가까이에 있는 '정지코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송이라는 붉은 화산재로 형성된 언덕 위에는 왜적이 침입하면 봉화를 피워 마을의 위급함을 알렸다는 봉수대(연대)가 있습니다. 해안은 해수면의 높이에 따라 물속에 잠겼다 나타났다 하는 기암괴석들로 절경을 이룹니다.
"외돌개"처럼 생긴 높이30m, 둘레 15m의 선녀바위가 솟아 있는데, 용왕의 아들이 이곳에 내려온 선녀에게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그 자리에서 선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어렸습니다. 주위에 삼성혈에서 나온 산신인과 혼례를 올린 세 여인이 목함을 타고 도착했다는 황노일이 있습니다. TV 드라마 '올인'(2003년), "꽃보다 남자"(2009년), "시크릿 가든"(2010년)의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행복한 문>
큰 돌들로 꾸며 만든 이 문을 통과하며 세가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문이 3개
중세 유럽의 역마차를 닮은 이 마차는 섭지코지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유료교통수단입니다.
<송이길>
잔디광장을 에워 싼 송이길은 붉은 색의 천연 세라믹으로 인체의 신진대사 촉진, 노화방지 기능이 있는 건강한 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붉은 색의 길, 녹색의 잔디, 회백색의 하늘, 삼색의 조화를 담았습니다.)
<진달래무대>
진달래 군락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달래가 심겨져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진달래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 까닭은 모르겠습니다.
형태로 보아서는 '영국 서남부 워트셔(Wiltshire) 솔즈베리(Salisbury) 평원에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장엄하게 우뚝 서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사시대 거석기념물로 불가사의 한 거대한 선돌 "스톤헨지(Stonehenge)" 에서 착안해 낸 발상으로 세워 논 설치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올래길 미로> 올레를 올래로 잘못 쓴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표지판에 올래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길찾기게임을 할 수 있게 돌담을 쌓아 미로를 만든 것입니다.
<삼석총(三石塚)>
여기저기 널여 있던 돌들을 모아 세개의 돌무지탑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말인 즉 부서지고 쪼개어 버려져 제자리를 잃어버린 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쌓은 위렵탑이랍니다. 가운데 탑에는 풍요와 장수를 상징하는 두꺼비 형상을 닮은 돌을 올렸습니다.
"TV 드라마 "올인"을 촬영한 성당입니다. 모퉁이에 별도의 올인기념관(기념품매점)이 있습니다.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 뱃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는 '고자옷코지'입니다.
乞人의 모습이 따로 있던가!
벙거지에 헐렁한 면바지, 이 차림에 6.25사변 직후 나돌던 큰 미제분유깡통 하나에 미군용 큰 수저하나만 걸치면 얼추 걸인이네.
난 아무래도 이런 차림이 좋다. 너무 몸이 편하니까 이젠 몸에 배서 다른 옷은 못 입는다네.
옛날 내 한 시절에 종로 뒷골목에서 그런 적이 있었다오. 낡고 기운 헐렁한 미군바지 윗도리에 땟국에 절은 하얀 미해군모자를 꾸 욱 눌러 쓰고 허리에는 숟가락 끝에 구멍 뚫린 커다란 미군용스푼을 꿰어 차고 큼지막한 캉통을 들고 다닌 적이 있었다지 아마..
"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절씨구 들어간다 얼씨구 들어간다.
내란 놈이 이래뵈도 정승판서 자제로서 팔도 감사 마다하고 돈한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네. 얼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들어간다.
각설이라 역설이라 동설이를 짊어지고 지리구지리구 돌아왔네. 얼씨구 들어간다. 절씨구 들어간다.
동삼먹고 배운공부 기운차게도 잘헌다. 초당 짓고 배운공부 실수 없이 잘헌다. 논어맹자 읽었는지 자왈자왈 잘헌다. 목구멍에 불을 켰나 훤하게도 잘헌다. 얼씨구 들어간다 얼씨구 들어간다.
일자 한자 들고 보니 ~~ 일선에 계신 우리 낭군 돌아 오기만 기다린다 얼씨구 씨구 절씨구 들어간다, 이자 한자 들고 보니 .."
<선녀바위>
"외돌개"처럼 곧게 솟아 선 높이30m, 둘레 15m의 선녀바위가 솟아 있는데, 용왕의 아들이 이곳에 내려온 선녀에게 반하여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그 자리에서 선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바람의 언덕>
섭지코지의 다른 설치물과 달리 자연 그대로를 간직한 곳으로 수평선과 선돌바위, 방두포 등대를 함께 담은 풍경입니다.
<협자연대(봉수대)>
송이라는 붉은 화산재로 형성된 언덕 위에 왜적이 침입하면 연기를 피워 마을의 위급함을 알렸다는 연대(煙臺)입니다.
연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정치 . 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수단을 말합니다. 봉수대와는 기능면에서 차이가 없으나 연대는 주로 구릉이나 해변지역에 설치되었고 '봉수대'는 산 정상에 설치하여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피워 신호를 보냈습니다. 협자연대는 상부에는 직경 8.6m의 화덕 원형이 남아 있으며, 정의縣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습니다.
전체 크기는 하부9m×8.9m, 상부 8.6m×8.6m, 높이 3.1m 입니다. 북쪽으로 '오소포연대(직선거리 4.5km), 성산봉수대(직선거리 3.2km)와 서쪽으로는 말등포연대(직선거리 5.2km)와 교신하였습니다. (도지정기념물 23-2호) 성산읍 고성리 57번지.
방두포 등대에서 바라 본 동쪽 정지코지 전경입니다. 보이는 길은 해수욕장 쪽으로 가는 길 위쪽 수평선 선상에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겹친 모양새로 일부 보입니다.
바람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고자옷코지 일대입니다. TV 연속극 "올인"에 나오는 성당이 보입니다.
<방두포 등대>
바람의 언덕에 서 있는 등대의 모습입니다. 이곳에 서있자니 이름이 무색치 않게 참으로 바람이 드셉니다.
해수욕장 쪽에서 바라본 풍경입니다. 선돌바위(선녀바위)와 몰려드는 파도와 방두포 등대가 어울려진 풍경입니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 몇 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산책길 앞에 저 작은 봉우리가 '정지코지' 끝머리입니다. 올라가볼걸 그냥 지나친 것이 지금 후회스럽네..
에메랄드 빛 물결에 하얀 물보라가 순간적으로 끝없이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모습에 넋조차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태초로부터 끝없이 출렁이는 옥빛 바다 물결위로 뜨거운 용암이 붉게 솟아올라 주변의 바닷물이 용솟음쳤을 성산일출봉, 당시의 정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환상적인 일입니다.
바람이 드세어서일까, 억새풀이 키가 작습니다.
아까 지나 온 멀어진 '진달래문" 옆 선돌에서 검은 염소 둘이서 힘을 겨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영역 다툼이 아닌지, 아니면 옛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하얀 염소와 검은 염소의 외나무다리위에서처럼 서로 " 내가 먼저 건널 테야! 아니야 내가 먼저 건널 테야! 하며 다투는 건 아닐까? " 두 녀석이 똑 같이 앞다리를 번쩍 들었다가는 내리는 동시에 그 힘을 머리에 실어 박치기를 합니다. 이제 또 두 앞다리를 번쩍 들고 한 컷 우아한 품새로 곤두박질하겠지요.
<용굼부리>
용의 분화구라는 뜻이겠지요.
대접모양의 기생분화구 안에 용의 발모양으로 굳은 용암과 물이 보입니다.
바위는 용의 앞발처럼 생겼고, 작고 둥근 못(淵)은 여의주처럼 보여 마치 용의 앞발이 여의주를 움켜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늘로 승천하려던 용이 일출봉의 폭발로 바위가 되어 땅에 묻히고 앞발만이 화산체 분화구인 굼부리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 언덕배기에 앙상한 나뭇가지를 마지막으로 '섭지코지'를 떠납니다.
섭지코지를 나와 성산일출봉으로 가다가 잠시 길에 멈춰 담아본 서편의 성산일출봉의 모습입니다.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峰>
해 뜨는 오름으로도 불리는 성산일봉의 입구의 정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천 년 전 얕은 수심의 해저에서 수성화산분출에 의해 형성된 전형적인 응회구라고 합니다. 높이 180m로 제주도 동쪽 해안에 거대한 고성채(古城砦)처럼 자리잡고 있는 이 응회구는 사발모양의 분화구를 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안 절벽을 떠라 다양한 내부구조를 훌륭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은 일출봉의 과거 화산활동은 물론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수성화산의 분출과 퇴적과정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420호)
성산일출봉 분화구로 오르는 계단
<등경돌/징경돌>
이 바위를 성산마을 사람들은 등경돌(燈檠石), 또는 징경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앞을 지나는 마을주민들은 네 번씩 절을 하는 풍습이 있었답니다. 두 번의 절은 옛날 제주섬을 창조한 어질고 아름다운 여신 설문대할망에 대한 것이요, 또 두 번의 절은 고려 말 원나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김몽정 장군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설문대 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퍼 날라 낮에는 섬을 만들고 밤에는 이 바위위에 등잔을 올려놓고 흙을 나르느라 헤어진 치마폭을 바느질했다. 이때 등잔높이가 낮아서 작은 바위를 하나 더 얹어 현재의 모양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합니다.
김몽정 장군은 성산마을에 성을 쌓아 나라를 지켰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습니다. 등경돌 아래에 앉아 바다를 응시하고 때로는 바위 위로 뛰어오르며 심신을 단련했다고 하는데 바위의 중간에 큰 발자국 모양이 패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전해 옵니다.
예전에는 마을주민들이 이 바위 앞에서 제를 지내 마을의 번영과 가족의 안녕을 빌었으며 전쟁터에 나간 젊은이도 김몽정 장군의 정기를 받은 이 바위의 수호로 무사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 글 : 성산리 마을회 >
<성산일출봉의 독특한 바위들>
성산일출봉 오름 길 주변에는 수직으로 뾰족하게 서있는 거대한 바위들을 볼 수 있는데 이 바위도 그 중 하나입니다. 성산일출봉을 형성한 수성화산활동이 발생할 당시, 화산체 주변에는 굳어지지 않은 많은 화산재가 가파른 사면(斜面)을 형성하면서 쌓였습니다. 화산재 지층 위로 비가 내리면 빗물은 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지층을 침식시키며 점차 아래로 깊어진 지형을 형성하고, 상대적으로 침식을 덜 받은 지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직으로 서있는 형태로 남게 됩니다. 따라서 등반길 주위에 있는 독특한 바위들은 솟아난 것이 아니라 차별적인 침식작용에 의해 형성된 것입니다. 이 바위는 봉황의 얼굴처럼 생겼군요.
움집처럼 생긴 바위입니다.
<짚이나 억새로 지은 초막처럼 생긴 바위>
우리 어려서 가을이면 강으로 흘러드는 여울가나 좁은 개울에 싸리로 엮은 울타리를 흐르는 물에 쳐놓고 울타리에 수수를 걸쳐 놓고서 그 옆에 수숫대와 볏짚으로 이런 모양의 초막을 짓고 밤새워 앉아 있으면 참게가 쳐놓은 그물막에 걸쳐놓은 수수를 먹으려고 기어오르는 것을 광목으로 만든 밀가루포대에 가득하도록 붙잡던 참게 잡이가 생각납니다.
고릴라의 얼굴을 닮았져~~,
옛날 1959~60년대 초기 월간시리즈 인기 만화 "라이파이"에 나오는 마법의 성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분화구근처에 거의 도달한 것 같습니다.
곰은 아니고 아무튼 짐승이 곰처럼 쪼그리고 앉아 포구를 내려다보는 형상입니다. 옆에 있는 전망대에는 조망하는 사람, 기념사진 촬영하는 사람들이 북적대 지나와서 그 풍경을 담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들끓는 세계 속의 관광지이지만, 조금만 떨어져 보면 이처럼 조용하고 아늑하고 정겨운 포구로 가슴에 닿습니다. 모든 사물이나 삶도 가까이 보는 것에서 느끼지 못하는 것을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더없이 아름답고 보기에 좋습니다.
마주보고 있는 두 형상이 마치 야차(두억시니)의 얼굴처럼 보입니다. 내가 죄가 많은 까닭이겠지만, 어쨌든 무서워..
성산일출봉 정상에 도달하였습니다. 상당히 높게 생각 되었는데 해발180m 입니다. 생각보다 낮은 것은 바로 바다 옆이기 때문이겠지요. 내륙의 산들은 대체로 높은 지대에 있으니 산 자체는 낮아도 해발 높이는 높게 측정이 되는 것이겠지요.
성산일출봉의 분화구 남쪽 방향
성산일출봉 분화구(응회구) 동쪽
성산일출봉의 정상에 있는 조망대입니다. 콘크리트와 철조가 아닌 나무로 설치하여 자연을 보호하고 오름과 관찰하기 용이하게 하여 느낌도 보기도 좋았습니다.
분화구 언저리에는 여러 형상의 화산석들이 마치 전시해 놓은 듯이 솟아 있습니다.
제주도는 약 180만 년 전부터 역사시대까지 분출이 일어나 만들어진 방패모양의 화산입니다. 초기에는 주로 수성화산활동이 일어나 제주도의 기반이 만들어졌고 이후에는 주로 용암이 분출하여 방패 모양의 지형이 만들어졌습니다. 약 5천 - 7천 년 전에는 바닷가 몇 곳에서 수성화산분출이 또다시 일어나 일출봉 응회구와 송악산 응회환이 만들어졌습니다. 일출봉에서는 방패形 화산재위에 수많은 소규모 분석구가 흩어져 있는 제주도 동부지역의 지형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산중턱에서 내려다보니 성산일출봉 아래 성산읍이 배산임수(背山臨水) 의 지세입니다. 산을 등지고 바다을 안고 있으니 말입니다.
푸른 잔디밭을 쳐다보니 마음을 평화롭고 편하게 순화시켜 보듬어줍니다.
가꾸어진 잔디와 야생의 잡초를 아우르고 있는 성산일출봉
바다 쪽의 성산일출봉의 측면모습은 표면이 칼로 잘라낸 것 같은 벼랑입니다.
성산일출봉의 바다 쪽 면은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 아닌 때어 낸 것처럼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 본래의 암벽입니다.
검은 구름과 갈색의 넓은 잔디밭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노래, "(Aloha‘oe )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가 작사 작곡하였다고 하는 하와이 민요 "안녕하라 그대여" 라는 이별의 노래, 나 이제 다시 발길을 돌려 이곳을 떠나려니 왠지 서글퍼지는 심사에서..
"성산일출봉" 오로지 널 보기 위해 수천리길을 날아와 단 몇 십 분을 상봉하고 떠나려니 또 아쉬운 건 나로구나, 넌 언제나 변함없는 표정과 감정으로 이 자리를 지키며 특유의 과묵함과 빼어난 모습으로 수많은 이들의 발길을 불러들이고 있으리..
시각을 보니 11시 50분, 유람선을 타고 바다관광을 마치고 난 후 점심을 할 생각으로 제주특산품 "올레빵" 하나를 간식으로 천원을 주고 사먹습니다. 겉은 아몬드, 땅콩 등을 조청으로 묻혔고 속에는 통팥이 들었습니다. 맛은, 더 먹고 싶다는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습니다.
<하도해수욕장>
유람선 승선까지는 1시간 정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가까운 해수욕장으로 발이라도 담가보려고 왔습니다. 제주도에서는 보기 드문 제법 큰 흰모래사장이었습니다. 당연히 평범한 모래사장인데도 자꾸만 신기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제주도는 바다고 산이고 온통 검은 현무암만 보았고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듭니다.
파도가 남긴 물결자국,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추억의 기쁨이었습니다. 내 어릴적 금호나루를 건너 압구정으로 가는 한강은 물줄기가 둘이었는데, 하나는 "무시막 강"이라고 불렀고 다른 한 줄기는 샛강으로 불렀는데 두 강 사이에 넓은 모래섬(백사장)이 있었지요. 그 샛강 물가 얕은 곳에 이렇게 물결자국이 있었던 기억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지금 한강에서는 이런 물결의 흔적은 볼 수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는 그 백사장과 샛강에는 재첩과 말조개, 홍합 모양과 비슷한 칼조개, 새끼자라, 다슬기가 참 많아서 좋은 친구였고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쪽 해변 끝에 아스라히 성산일출봉이 보입니다.
잔파도가 밀려와선 정강이를 적시고, 이내 발등을 간질리고는 어느 틈에 사라졌다가, 다시 몰려와 희롱하기를 반복하는 파도는 개구쟁이입니다.
동쪽 해변입니다.
성산일출봉에서 좀 떨어진 여객선선착장인근에 있는 해변입니다. 온통 화산재로 이루어진 해안절벽입니다.
파도에 깎이고 무너져 내린 벼랑에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화산재입니다. 어찌나 가벼운지 물에 뜨는 부석(浮石)이라고나 할까, 불을 피워 쇠를 녹이거나 달구는데 쓰이는 석탄 종류인 검은 색 '콕스'라는 것과 생김이 똑같습니다. 지금 이 사진의 모양이 콕스(cox 粘結炭)에 불을 붙여 붉게 타는 것과 똑 같은 모습입니다. 풍구로 바람을 불면 더욱 시뻘겋게 타오를 것처럼 기세등등해 보입니다.
제주도 기념물매장에서 이 화산재를 둥글개 가공해서 각질제거용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자배기에 담은 물에 여러 개를 띄어 놓고 호기심을 갖게 하는 판매촉진을 하기도 합니다.
화산재는 성질이 따뜻하고 건조한데도 식물이 자생을 합니다.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을 봅니다.
수많은 기공과 색깔과 불규칙한 구성에서 특이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느낌을 줍니다.
유람선 우도도항선 대합실
바라보이는 배는 우도도항선입니다. 많은 승객과 차량을 실고 우도를 향해 가고, 내가 탄 이 유람선은 우도 주변 해상을 둘러보고 성상일출봉 바닷가를 돌아보기 위해 파도를 가르고 있습니다. 선실 유리창을 통해 사진을 담았더니 유리창에 모자와 안경을 쓰고 검지에 커플반지를 낀 멋쟁이 여인이 얼비침으로 담겼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수상리조트라고 합니다.
짙푸른 바다가 환상적인 물결무늬를 창출하여 끝도 없이 뱃전을 두드립니다.
우도 측면의 한 부분입니다. 수성화산분출한 곳에 다시 화산재가 쌓일 때마다 굳어 층을 형성한 모습이 물결처럼 층을 이른 형태나 지각변동으로 꺾이거나 어긋난 모양이 단면으로 보여 우도가 생성될 당시의 과정을 상상해 보는 재미를 부여합니다.
강태공 아닌 바다낚시를 즐기는 海태공을 실은 낚시관광 배라고 합니다. 노란색의 통통배가 동력선으로 지붕이 달린 긴 회랑처럼 생긴 배를 물고기가 잘 물리는 곳으로 옮겨놓기 위해 끌고 갑니다.
소가 누워 있는 형세라 하여 '우도'라고 한답니다. 그 우도의 머리 부분입니다. 화면상으로는 긴수염고래 머리 부분처럼 생겼네요.
화산재가 쌓여 층을 이루며 굳어진 바위여서 용암이 굳은 것보다 응결이 약해서 직선으로 떨어져나가 단면이 들어난 것 같은 생각이듭니다.
우도 끝머리에서 정면으로 본 모습입니다.
등대와 부속건물로 보이는 건축물과 철망으로 된 담이 보입니다.
우도관광을 마치고 뱃머리를 성산일출봉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참 싱겁죠?
저만치 성산일출봉이 보입니다.
동쪽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의 전체모습입니다. 기와집 팔작지붕처럼 생겼어요.
남쪽 끝을 정면으로 본 성산일출봉입니다. 커다란 석탄덩어리(코크스Cokes)를 보는 느낌입니다.
성산일출봉의 서쪽에서 본 남쪽 부분입니다.
서쪽에서 본 성산이출봉의 북쪽 끝부분입니다.
귀항하는 유람선 옆으로 고기잡이배들이 연달아 지나갑니다. 보다 한참 큰 이 유람선에서도 휘청거릴 때마다 겁나는데 파도가 갑판으로 넘실대는 저 작은 배로 창망대해를 떠다닌다니 할 말이 없고 기가 찹니다.
저 배는 滿船의 희망을 안고 망망대해로 힘차게 나갑니다.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마음으로 빌어요.
그러나 바다의 바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다는 이렇게 말 하겠지요. 너희가 바라는 것을 얻으려면 나를 더럽히고 욕되게 하지 말라고.. 이 지구상의 모든 자연이 너희의 소유가 아니라 너희가 나에게 예속된 하나의 미미한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의 세계에 한 시라도 저당 잡히지 말라고..
잠시 파도에 넋을 주는 사이 선착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바다로 하여금 많은 것을 각성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쁨입니다. 고맙습니다.
시각은 16시 서귀포 금호리조트로 가는 길에 민속마을을 들려보기로 하였습니다. 십여 년 전 공무로 제주도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만해도 제주도의 옛 모습을 보기 위해 구태여 민속마을을 찾아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는 마을마다 그대로 민속촌이나 다름없이 집집마다 지붕에 바둑판처럼 튼튼한 줄로 바람에 지붕이 들뜨지 않게 엮여있는 초가지붕이었고 마당에는 농기구며 어망이 널려 있었으니까요.
길가에 감귤농장이 보입니다. 제주도의 특산물 중 하나인데, 사진 한 장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다른 사과나 배처럼 열매가 일률적으로 한꺼번에 익는 것이 아니라 황금빛처럼 빛나게 잘 익은 것 옆에는 짙은 초록빛 그대로 전혀 익지 않은 것이 나란히 있습니다. 차를 세우고 살펴보고 사진에 담았습니다.
잘 익은 것과 안 익은 것이 반반입니다.
『성읍민속마을』
조선조 태종 16년(1416년)성산읍(城山邑) 고성리(古城里)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旌義縣廳)이 조선조 세종 5년(1423년) 이곳으로 옮겨진 이래 500여 년간 현청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정의현은 태종 16년(1416년) 암무사(按撫使) 오식(吳湜)의 건의에 따라 성산읍 고성리에 정의현을 축성하였으나, 현청이 동쪽에 너누 치우쳐 행정상 불편할 뿐만 아니라 태풍의 피해가 잦고 또한 우도가 가까이 있어 외적으로부터 침입이 빈번하였으므로 안무사 정간(鄭幹)이 건의하여 세종 5년(1423년), 당시 진사리(晉舍里 . 현 표선면 성읍리,)로 현청(縣廳)를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진사성(晉舍城)이라고도 불리었던 정의성(旌義城)은 축성을 시작한지 5일 만인 세종 5년 정월 13일에 총 둘레 2,986척, 높이 13척의 규모로 완공되었다는데 성에는 동서남으로 세 개의 문을 두었고 성안에는 두 곳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숙종 28년(1702년)이형상(李衡祥) 목사(牧使)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정의현의 당시 민가 호수가 1436호, 전답이 140경, 성수비군(城守備軍)이 664명, 밭 1,178필, 흑우 228수를 보유할 정도의 상당히 번성하였던 읍성이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1423년 이후부터는 약 5세기 동안 정의현의 도읍지로 번성하였던 성읍은 평범한 농촌마을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1915년 5월1일부로 제주군제도 마저 폐지되고 도제가 실시되면서 정의고을이었던 성읍은 표선면 면소재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성읍민속마을은 그 역사적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며 문화재적 차원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성읍 고평오 가옥>
이 가옥은 현 거주인 고평오(高平五)씨의 증조부가 1829년(순조 29년)에 건립한 초가로서,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목거리(헛간채) 및 대문간이 갖추어진 집입니다. 서쪽 목거리는 70년대 중반에 헐렸고 안거리와 밖거리는 최근 보수되었습니다.
안거리는 제주도의 전형적인 작은 구들 없는 3칸집으로 정지(부엌)안에 시설된 붙박이 화로인 '부섭'이 있었는데 1979년 보수 시 없애 버렸습니다. 밖거리는 원래 관원들이 하숙을 하던 곳으로 제주도의 어느 집과 달라서 상방(대청)이 가운데 있지 아니합니다. 여기서 거리라는 말은 건물을 말합니다.
<안에서 본 대문간과 옆에는 잿간이 반쯤 보입니다. >
밖거리(바깥채)
안거리(안채)로 들어가는 입구와 안거리(안채)
안거리(안채) 전경
<초가집(草家)> 제주특유의 돌담으로 울타리를 두르고 지붕은 띠풀(제주에서 "새"라고 함)로 덮은 다음 띠풀을 꼬아서 만든 밧줄로 바둑판처럼 단단히 동여맨 제주의 전형적인 초가집입니다. 제주의 초가집은 바람 많은 제주 섬에서 바람과 싸워온 제주도 옛 조상들의 생활의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마을 전경
(초가집 모양)
성루(城樓)에서 바라 본 성루 앞
성문(城門)앞을 지키는 하르방, 성문 좌측에 세워진 하르방입니다.
성문(城門)앞을 지키는 하르방, 성문 우측에 세워진 하르방입니다.
2011년 9월 28일 - 鄕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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