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능행도병(華城陵幸圖屛)은 정조대왕이 1796년 생부(生父) 사도세자(思悼世子 : 章獻世子)와 생모(生母)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동년(同年) 회갑(回甲)을 맞이하여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화성(華城:水原)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행차한 뒤 성대한 잔치를 열면서 거행했던 일련의 행사들를 8폭에 담은 기록화입니다. 조선시대 행사 기록화 중에서 가장풍부한 내용으로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뛰어난 작품으로서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정조시대의 난만한 회화 발달이 어울어져 만들어진 걸작입니다.
이 <화성능행도병>은 행사가 끝난 뒤 행사를 주관했던 정리소(整理所)에서 1796년에 완성한 계병(稧屛)이며, 김홍도(金弘道), 이인문(李寅文), 김득신(金得臣), 김득현(金得賢) 등 많은 화원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디 행사가 끝난 뒤 정조가 정리소에 명하여 행사의 내용을 묘사한 도설(圖說)을 제작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 도설작업은 윤2월 28일 의궤청의 건의로 이해 1월 연풍현감에서파직된 김홍도가 주관자(主管者 : '專管'者)로 임명되어그의 지휘 아래 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의궤의 도설을 병풍에 맞게 변형시키고 확대하여 묘사한 정리소 발의의 이 계병은 김홍도가 관여했거나 최소한 김홍도의 화풍이 부분적으로나마 직접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화성능행도병>은 넓은 의미에서 김홍도 등의 집단 제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현재 이 <화성능행도>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 호암미술관에 동일한 내용의 8폭병이 소장되어 있고, 이 이외에 낱폭으로 전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크기와 순서, 도상, 묘법, 채색 등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 제작연대의 편년과 작가의 비정, 8폭의 순서배치 문제가 아직도 미완의 연구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8폭의 순서 문제는 행사일정과 의궤도설의 순서 및 세 벌의 순서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어떤 원형의 순서를 눈중하여 확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기록화 병풍은 반드시 그 행사 내용을 기록화 병풍은 묵서(墨書)가 포함되는 것이 상례인데, 이 <화성능행도병>은 묵서가 없다는 점이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호암미술관 소장본은 고식의 양식을 보일 뿐만 아니라 화면상태도 좋고 근세에 개조되지 않은 조선표구 그대로이며 일반에는 처음 공개되는 것입니다. (1995년 김홍도 탄신250주년 기념 특별전시) 특히 원상태를 유지한 이 병풍은 8폭의 순서에 나름대로 하나의 질서가 있어 주목됩니다.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圖)》(第8幅)
(화성능행도병)의 마지막 폭으로서 윤 2월16일 노량진의 주교(舟橋)를 건너며 서울로 환궁하는 정조와 혜경궁의 행렬장면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고 묘사한 것이다. 멀리 남쪽의 노량진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뒤로 하고 혜경궁 홍씨의 화려한 가마가 지금 한강을 가로지른 거대한 주교의 한가운데 홍살문을 막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산선(繖扇) 시위(侍衛)에 겹겹이 둘러싸인 정조의 좌마(座馬)가 뒤따르는데, 조선시대의 기록화가 다 그러하듯 왕은 감히 묘사하지 못하고 말만 묘사하는 상징적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용양봉저정의 행군 앞 홍살문 뒤에는 군주쌍교(君主雙轎)가 막 길을 돌아 다리 쪽으로 다가 오고 있습니다. 36척의 교배선(橋排船)과 240쌍의 난간, 3개의 홍살문, 그리고 수많은 상풍기(相風旗)와 군기(軍旗)가 펄럭이는 거대하고 화려한 주교가 긴 병풍의 화면을 실로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전개되어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교는 기존의 부교가 위험성과 번거로움이 많았기 때문에 1789년 정조가 새로이 고안 설치한 것으로 정조의 지혜와 애민(愛民)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궤에 이 배다리(舟橋圖)가 강조되어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인데, 이 그림은 여기에 화려한 행렬을 첨가하여 완성함으로써 이제 정조의 효성까지 담고 있습니다. 이 병풍의 8폭 중에 환어장면이 2폭에 걸쳐 그려진 것도 주교가 시각적 효과도 좋지만 이처럼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배다리의 앞뒤로 끝이 없는 수행행렬은 장대한 배다리를 더욱 강조해 줍니다. 그리고 주변에 구경나온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을 더욱 풍부하고 다양하게 꾸며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생한 풍속화의 성격을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배다리의 인물과 주변의 경치가 분리되지 않고 적절히 연결되며 조합되도록 만드는 놀라운 조형적작용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시 주교(舟橋)가 뒤로 갈수록 좁아지고 주교 뒷편의 정조는 다리 앞의 백성들보다 작을 정도로 엄격한 초점투시법을 적용하여 묘사함으로써 화면 전체가 더욱 생생한 현장감을 얻고 있습니다.
《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第7幅)
윤 2월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제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장대한 행렬을 묘사하였습니다. 처음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함께 능행하여 무려 6,000여 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된 가장 성대했던 행렬의 장관을 묘사한 장면입니다. 이런 행렬장면을 더욱 상징적이고 뜻깊은 수원으로의 행차 모습으로 설정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이 행렬장면을 공자성묘(孔子聖廟)에 대한 배알이나 혜경궁의 회갑연보다 앞에 배치하기가 저어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8폭 중에서 회하성과 풍속성이 가장 뛰어난 명작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기록화 중에서도 비교될 수 없는 걸작입니다. 그림의 내용은 시흥행궁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남쪽의 안양교(安養橋) 앞길에서 행렬을 잠시 멈춘 다음 정조가 직접 혜경궁에게 미음(米飮)과 다반(茶盤)을 올리는 매우 효성스러운 장면을 담은 것입니다. 화면 밑에 정조가 능행을 위해 세운 시흥행궁이 정조의 치정(治政)을 자랑하듯 거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 뒤 화면 중앙의 큰 바위가 있는 곳에 미음을 들기 위해 푸른 휘장으로 가린 혜경궁의 가마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 산선(繖扇)을 받고 있는 정조의 좌마(座馬)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의 길가 빈터에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가 보이는데, 이 수레는 본래의 정상적인 행렬이라면 이보다 훨씬 앞의 기수대(旗手隊) 바로 뒤에 위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수대 앞의 길이 급격히 꺾인 부분에는 임금의 행차임을 알리는 거대한 용기(龍旗)가 펄럭이고, 그 앞에 지금은 비어있는 정조의 정가교(正駕轎)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경 행궁의 삼엄한 경비가 오늘밤 정조와 혜경궁이 이곳에서 유숙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길 양옆으로 구경하는 수만 군민(郡民)들의 다양하고 풍부하며 재미있는 모습들은 이 그림을 조선시대 최대 최고의 풍속화로 승화시켜 주는 더없이 정이 가는 귀중한 장면들입니다. 이 능행에서 정조가 그토록 신경을 썼던 민의(民意)까지 효과적으로 전해주는 우의(寓意)가 느껴집니다. 특히 이 그림은 주변의 지형을 교묘히 이용하여 수천 명의 긴 행렬을 한없는 지그재그로 배치함으로써 세장한 병풍 화면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무수한 지형의 변화에 이 행렬을 정확히 일치시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화면 전체에 매우 엄격하고 치밀한 단축법을 적용하여 이 그림에 실로 놀라운 현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 것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심지어 혜경궁 가마 뒤의 길이 꺾여 돌아가는 길 밖의 행렬은 열이 벌어지고 길 안쪽의 행렬은 열이 촘촘하여 행렬이 정확한 마름모 형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정조시대의 기록화가 투시법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사하고 있으며 시각적 사실성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를 여실이 보여주는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노량주교도섭도> <시흥환어행렬도>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第6幅)
윤 2월14일 오후 정조가 화성행궁 안의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다음 저녁에 혜경궁을 모시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입니다. 화면 뒷편의 왼쪽에 용마루가 보이고 큰 차일이 쳐지며 노란 용기(龍旗)가 보이는 것이 낙남헌(洛南軒)인데 지금 그 안의 오봉병(五峯屛)앞에 정조가 앉아 불꽃놀이를 구경합니다. 그 뒤 오른쪽으로 상변에연이어 길게 뻗은 일자집은 득중정이며, 그 계단 앞 어사대(御射臺)에는 지금 혜경궁이 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시 행차하여 가마를 열어 놓은 채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화면 중앙 아래의 행궁 밖에서 매화포가 폭발하여 신기전이 화늘로 치솟으며화려한 불꽃놀이의 장관이 펼쳐집니다. 주변에는 굉음을 울리며 밤하늘을 수놓는 신기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많은 부민(府民)들이 운집해 있습니다. 그리고 화면 맨아래 왼쪽 구석에는 행긍에서 동쪽으로 780보 떨어진 수원의 북문 장안문(長安門) 이층 팔작지붕의 위용을 과시하며 자리잡아 다소 위쪽으로 쏠린 화면의 무게를 적절히 조정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넓은 공간적 장소성을 알려줍니다.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第5幅)
윤 2월 12일 밤, 정조가 화성의 서장대(西將臺)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동서로 길게 뻗어 규형(圭形)을 이룬 총 4,600보 길이의 장대한 화성 전경을 세장한 병풍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아래 위로 길게 설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중앙의 행궁과 시가 및 민가를 배치하고, 사방의 성곽에 수많은 군사들을 묘사하여 실로 장대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가장 위쪽에 차일을 치고 호위군에 둘러싸인 거대한 누대는 팔달산(八達山) 최정상에 자리잡은 서장대로서 정조가 행차한 이 그림의 주제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크게 과장하여 강조하였습니다. 화면 제일 아래에 위치한 문은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이고, 중앙 좌우변의 대문은 오른쪽이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왼쪽이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입니다. 이 그림에 묘사된 장면은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훈련장면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장관인 햇불 밝히기의 연거(演炬) 장면과 오색등을 다는 현등(懸燈) 장면입니다. 본래는 햇불을 밝힌 다음(演炬), 햇불을 끄고(仆炬), 다시 깃발을 내린 뒤에(落旗), 등을 다는 것이지만(懸燈), 이를 한거번에 묘사하여 더욱 성대한 화면을 연출하였습니다.
<득중정어사도> <서장대성조도>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第4幅)
윤 2월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능행에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의 노인 등 총 348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입니다. 군병(軍兵)과 시위의장(侍衛儀仗)이 낙남헌 주변의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 차일을 친 낙남헌의 어좌에 정조가 앉아 있고, 그 앞 마루에 융복(戎服)차림의 노대신과 입시관원(入侍官員)들이 앉았습니다. 섬돌 앞 뜰에는 서인(庶人)들이 도포차림으로 줄지어 앉았고, 담장 사이에는 곱게 차린 무희와 붉은 옥을 입은 악사가 늘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시위군병 밖의 길가에는 부민(府民)들이 이 아름다운 광경을 흡족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습니다. 화면의 내용은 낙남헌의 섬돌 위에 악사(樂士)들이 시립한 가운데 정조가 노란수건을(黃細巾)을 내려 노인들의 지팡이 끝에 묶게한 다음 비단 1단(段)씩을 하사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마당에 앉은 노인들은 모두 지팡이에 노란 수건을 매고 있으며, 그 앞에 집사들이 비단을 받쳐든 채 나누어 주는 동작을 취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정면관과 상면관(上面觀)을 결합하여 수직수평성을 강조함으로써 차분하고 격조있는 양로연의 분위기를 연출하였습니다.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第3幅)
윤 2월13일, 정조가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에서 생모 혜경궁 홍씨의 회갑년을 기념하여 진찬례를 올리는 잔치 장면입니다. 본디 혜경궁의 생신은 6월18일이었기 때문에 후에 창덕궁 연회당(延禧堂)에서 간략한 진찬례가 다시 거행되었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본격적인 회갑연인 셈입니다. 이번 능행 중 가장 중요한 행사답게 매우 화려하고 성대하게 묘사되었습니다. 화면 위쪽에 거대한 차일을 친 봉수당이 보이고, 그 아래 작은 차일을 친 중양문(中陽門)을 지나 화면 밑으로 좌익문(左翊門)이 보입니다. 중양문 앞에 거대한 용기(龍旗)가 있고 봉수당 왼쪽 뜰에 가마가 있어 지금 혜경궁과 정조가 행차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혜경궁과 내외명부(內外命婦)는 내외(內外)를 하느라 발을 친 봉수당 안쪽에 있기 때문에 화면에는 보이지 않으며, 정조는 봉수당 안에도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만 봉수당 섬돌 위 왼쪽 병풍 앞에도 자리가 설치되어 화면에 묘사되었습니다. 봉수당 장전(帳殿)안에는 온갖 화려한 꽃들로 치장하고 곱게 차린 무희들이 춤추는 가운데 혜경궁의 친척인 의빈(儀賓)과 척신(戚臣)들이 둘러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멀리 화면 하부의 중양문 밖에는 시종한 문무백관들이 동서로 나뉘어 앉아있습니다. 지금 화면에 나타난 장면은 여러 단계로 진행된 진찬의 과정을한 장면에 종합하여 성대하고 화려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화면 중앙의 장전 안에서 화려하게 춤추는 무희들이 제 3착(爵)을 올릴 때 춘 무고(舞鼓)와 대개 끝날 때 추는 선유악(船游樂)을 동시에 추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석자들이 꽃을 꽂고 있는 것은 혜경궁이 꽃을 하사했기 때문인데, 이는 궁중연회에서 의례 있었던 관습입니다. 봉수당 섬돌에 올린 헌선도(獻仙桃)와 마당에 진열한 청개(靑蓋).홍개(紅蓋).정절(旌節).봉선(鳳扇).작선(雀扇) 등이 실로 아름다와 궁중연회의 호사스러운을 잘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의궤(儀軌)에서는 같은 제목을 중양문 안의 장전까지만 설정한 뒤 정조가 현선도 올리는 장면을 평행사선투시법으로 묘사하였지만, 이 계병(稧屛)은 이를 토대로 하여 병풍의 세장한 화면에 맞도록 장면을 확대하고 더 화려한 군무(群舞) 장면으로 바꾸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第2幅
윤 2월11일, 화성에서 문무 양과에 걸친 과거시험을 본 뒤 낙남헌에서 그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입니다. 10일 저녁 화성에 도착하여 허루밤을 유숙하고 난 정조는 가장 학문을 좋아한 제왕답게 공자(孔子)를 모신 성묘(聖廟)를 배알하고 별시(別試)를 보는 것으로서 화성에서의 첫 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정조는 먼저 과거를 시작하도록 하교한 다음 시험을 실시하는 사이 성묘를 배알하고 다시 행궁으로 돌아와 낙남헌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행사에 친임하였습니다. 낙남헌을 시위가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정조가 어좌에 앉아있고 그 앞에는 방방관(放榜官)과 대치사관(代致詞官) 등의 입시관원들이 배석하였습니다. 섬돌 바로 밑에는 탁자 위에 합격증서인 홍패(紅牌)와 어사화(御賜花), 술과 안주가 놓여 있고, 그 앞에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의 합격자들이 머리에 어사화를 꽂은 채 늘어서 있습니다. 합격자보다 많은 사람이 묘사된 것은 혹시 다른 회방(回榜)과 잡과(雜科)합격자들까지 모두 이 장면에 종합하여 그렸거나 아니면 단순히 화면 구성상 실제보다 많은 인원을 그렸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합격자 양옆으로는 동서로 나뉘어 문무반 조신들이 엄숙히 시립하였는데 화면 아래 길밖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시험에 동행했던 복건 차림의 문하들과 그 가족, 구경나온 부민(府民)들이 매우 자유롭게 늘어서 있습니다. 혹자는 합격의 기쁨을 축하하고 혹자는 낙방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등 풍속화가 난만하게 발달하던 시대답게 다양한 표정 연출이 재미있습니다.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殿拜圖》(第1幅)
윤 2월11일 정조가 화성에서의 첫 번째 공식행사로 거행했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인데, 이 호암미술관 소장본은 창덕궁 소장본과 달리 이 장면이 첫 번째로 배치되어 있어 특히 주목되고 있습니다. 공자를 모신 이 문선왕묘(文宣王廟)는 화성 남쪽 3리 쯤의 산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산자락으로 빙둘러 배치하고 그 안에 작게 묘당과 행사장면을 묘사한 색다른 구도를 이루었습니다.
가장 뒤쪽에 대성전(大成殿) 위에 큰 차일을 치고 뜰에는 청금복(靑衿服)을 입은 유생(儒生)들이 시좌한 가운데 지금 섬돌 위에 오른쪽에서 정조가 4배를 올리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대성전의 신문(神門) 앞에는 산선(繖扇) 시위(侍衛)들이 서있고, 그 앞에 수행한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시좌하였습니다. 그리고 작은 차일이 쳐진 중앙의 명륜당(明倫堂)과 外神門 주변에는 시위들이 겹겹이 서서 호위한 채 더욱 엄숙한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묘 밖의 길과 산자락에는 구경나온 부민들이 매우 자유로운 동작으로 묘사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8폭 중에서도 산수 표현이 가장 정중하고 뛰어나게 묘사되어 주목됩니다.
<낙남헌방방도> <화성성묘전배도>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8幅屛
朝鮮時代 (1795~1796年頃作) / 絹本彩色 163.7×531.2cm/ 湖巖美術館 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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