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하고 아득했던 잠에서 깨고나니 창가에 붉은 서광이 비칩니다.
저 토록 고운 아침 빛깔이 오로시 좋은 기운으로 우리를 감싸안으려 서서히 떠오릅니다.
고대로부터 신앙적으로 숭배의 대상인 태양이 건너 먼 산마루에서 붉고 장엄하게 마악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저 햇살의 상서로움이 '32명산올레'님들게 끊임없이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각기 오늘의 일정이 무난 무탈하시고 그 일들이 저 빛살처럼 밝은 기쁨으로 가득 채우시라 믿습니다. 특히 오늘 함께 산행하실 올레님들의 건승과 아름다운 월악산의 풍경과 준수하고 곧은 기운들이 내면 깊이 스며 좋은 양분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 기원과 바램으로 도착한 송계계곡 덕주골 들머리에 모여서 보니 몇 번의 산행으로 뵌 분이나 오늘 처음 뵙는 분들 모두가 한결같은 스스럼없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산 높고 묽 맑은 이 아름다운 지역적 풍토에서 살아온 이들만의 기질인가 싶도록 해맑음의 심성이 곱습니다.
오늘도 안전산행을 이끌어주실 산행대장의 안전지침을 듣고 있는 32명산올레 형제자매님들께 건승을 ..
들머리를 조금 지나다 보니 길가에 늘어놓은 각종 한약재들이 깔끔한 모습으로 낮설지 않게 다가옵니다. 사고 싶은 마음이지만, 이제 먼길을 위해 잔뜩 질머진 몸이고 보니 아쉽지만 발길를 돌립니다. 날머리에도 저 귀한 약재들이 있기를 바라며...
먼빛으로 바라 본 세 봉우리들이 서늘한 서기에 서리서리 서려옴에 보는 마음도 서늘해집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잠시 멈추기를 청합니다.
산행에 있어서 우리의 안전을 도모함과 자연보호를 위한 것이니 좀은 지체해도 손해볼 일은 아니겠지요.
그들의 일상적 업무이기 전에 고마움이 앞섭니다.
입구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산행객을 모아놓고 가볍게 준비운동도 시키고, 여러 가지 안전수칙을 알려줍니다.
덕분에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산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5~6시간의 여정이 시작되었지만, 참으로 많은 분들이 하나같이 사뿐 가벼움 걸음에서 경쾌함을 봅니다.
" 울적한 마음 달래려 산길로 들어섰다가 난 정말 반했다오. 정말 멋진 산아가씨 이름도 모르고요 의복은 낡았어도 맑고 고운 그 눈동자 정말 멋진 산아가씨~~ " 이런 노래가 나올 법도 하겠지요.
<수경대(水鏡臺)>
물이 마치 거울 같다해서 수경대라 이름 하였나봅니다. 바위 정면 상단에 아름다운 글씨로 멋지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거울처럼 사물이 비취도록 맑은 淸水가 삼각소에 담겨 있습니다 .
《덕주산성 남문》
날아갈듯 사뿐 올린 팔작지붕의 그 누각이 멋진, 덕주산성이 반깁니다.
석축과 네모진 바위돌, 그리고 소나무가 어우러져 한 치의 어색함도 없이 아름답게 조화롭습니다.
옛 사람들은 인위적인 것도 자연에 맞추어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창출합니다.
바위가 석축인지 석축이 바위인지 모를 그런 자연스러움을..
이 덕주산성은 월악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상덕주사를 중심으로 하여 그 위각을 여러 겹으로 둘러쌓은 석축산성이랍니다.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 싼 산성(내성으로 제1곽,상.하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일명 동문주변)과,그 외곽으로 하성(제3곽)이 있으며,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문을 막아 쌓은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을 이룬 외곽성(제4곽) 등 네 켭으로 이루어진 매우 큰 규모의 성성입니다. 고려 고종 때 몽고의 침입시 월악대왕의 가호와, 월악신사 등과 관련한 항몽의 유적지이기도 하며, 조선 중종 때 내성을 축성하고, 임진왜란 때에도 역활을 하였으며, 조선말기에는 명성황후와 관련이 있는 등 역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역활을 하였던 대표적인 사적입니다. 최근에 남문의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성벽도 일부 보수하고 있습니다.
이 거시기한 돌을 이렇듯 길목이나 마을 어귀에 세우는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생산을 위한 바람과 기원은 우리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민족신앙이지요. 이걸 미신으로 여기지 맙시다. 민족의 번성을 위한 신성한 선조들의 믿음의 정신세계입니다.
이 사진의 의제는 무제입니다. 그냥 남아있는 하얀 백설이 마냥 좋아서지요.
유난하게도 백색, 흰옷을, 순결함을 좋아한 민족, 백의민족의 자손이기에..
이 이끼 낀 바위 밑으로 생명인 물이 흐르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답니다. ㅎㅎ
번창했던 옛 신라의 천년사찰의 영화는 온전히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비연은 옛터로 남아 이제 다시 웅지를 펴고자 주춧돌은 돋고 부서져 내린 기왓장은 다시 날개를 달고 비상하나니 태동의 그 이름 월악의 '마애미륵불'. 나무관세음...
그나저나 저 차들은 왜 저 곳에 주차를 시켜 고졸한 산사의 그림을 망치게 할까, 아랫부분을 잘라봐야겠네.
어떻습니까 아랫부분을 잘라내니 한결 고풍스럽고 한국의 고유적 풍경이되지 않았나요.
현세의 조형미는 너무 가볍게만 보여짐은 무엇일까, 옛 것에 지우친 나의 편협한 까닭일까 ...
동양의 알프스라... 무언가 어울림이 없네,
동양은 무엇이고 알프스란 생경스러운 단어는 무엇인가 우리 산천에는 그리 비유할 만한 비경이 없다는 말인가,
얘야 제발 우리 것 좀 찾자 거름도 서양 것 보다는 우리 것이 좋으니라. 어쨌거나 우리는 이 길로 들어섰소이다.
이 나무로 된 홍예교(홍예교:虹霓橋:무지개다리 = 다리가 무지개처럼 곡선을 그렸다해서 홍예 또는 무지개다리라 합니다.)건너 수림 끝에 걸린 검은 봉우리가 내 가고자는 영봉이런가 거무죽하니 두려움이 넘치네.
내 아무리 불교를 믿지는 않는다지만, 내 조상, 내 문화가 숨쉬는 마애불을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은가,
월악산 중턱에 오로시 서쪽을 주시하는 '마애불' 그 사연이 있다는데,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맏 따님 덕주공주가 오빠 마의태자와 함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덕주사를 짓고 아버지 경순왕을 그리워했다는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경순왕이 나라를 왕건에게 넘기자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 일행은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하고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하늘재 : 미륵사지가 있는 곳)에 이르어, 마의태자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이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을 것이다.
그 곳에 불사를 하고 석불을 세우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조성하여 만백성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잊지말라"고 하였답니다. 일행은 그 장소를 찾아 석불입상을 세우고 북두칠성의 별빛이 한껏 비추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여 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덕주공주의 이름을 따른 덕주사입니다.
《寶物 第406號》『磨崖佛』
마애불 옆 불전건물 " 극락보전"
마애불에서 한참을 머물다 다시 길로 나섰지만, 이 가파른 언덕도 양반이었습니다.
앞에 그야말로 천국의 계단이 움츠리고 기다릴 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지요. 김소월 올림. ㅎㅎ
"저만치 앞서가는 님그림자 그림자 길게 드린 날, 님의 발자국 밟으려하니 여린 내가슴 애이네 ~~
해서 그냥 모르는 척 앞질러 내달렸습니다. 영봉을 향해~~
길치인 만큼 이정표는 가슴 아닌 머리에 담고,
무엇일까 파다만 갱구일까, 의구심도 가지며,
첩첩이 이어져 간 봉우리들이 참 ...
해골처럼 생긴 바위, 밤이라면 기겁을 했을 겁니다.
금봉이와 박달이를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 입석이네요.
드디어 영봉이 보이는군요. 그런데 올레님들은 어찌 보이질 않을까 도중에 식사들을 하고 오시는 것같아 저도 여기서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했지요.
저 정도라면 그리 어려울 건 없겠다 생각했는데, 영봉을 끼고 뒤돌아 올라가는 길은 오르고 내리는 깎아지른 눈 덮인 비탈이요 수도 모를 계단이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산세가 참 아름답지요.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쪽저쪽 아래쪽 바라보는 여유를 부렸는데,
앞서가는 이 분들 경상도 부산에서 오신 분들인데 고약스럽대요. 되 오는 길에 난간에 슬그머니 놓고 간 부산막거리병에 물병 모두 썩지도 않을 패드병이더이다. 그걸 줏어들고 오다가 난생처음 팔자에도 없는 메기 한 마리 잡았지 뭡니까. ㅜㅜ
무언가 보이시지요. 산양의 발자국이랍니다. 네가 살고 있음이 참 행복하다. 네가 살 수 있음에 내가 살만한 세상이 아니더냐,
부디 건강하게 아들 딸 며느리 손자 보고 더욱 건강하게 잘 살아다오.
참으로 사랑스럽구나 귀여운 네 모습,
이 흔적 ! 버러지만도 못한 내게, 참으로 귀한 선물을 주는구나, 네가 살아 있음이 기적처럼 경이롭구나.
오르고 또 오르고 내리고 또 내려서 오른 것은 다만 너를 보기 위함은 아니었단다.
나, 오직 나를 넘어서 있을 허공, 버리고 또 버리고자 함이요, 그 자체였건만...
이름 모를 봉우리 넘어로 뿌옇게 보이는 청풍호반과 산,
그리고 아득한 마을과 논밭들이그림처럼 펼쳐지는 아름다움에 새처럼 사람도 날고 싶었을 것이고, 비행체를 만들게 되었겠지요.
그런 아름다움으로 시작한 이기(利機)가 지금은 서로를 죽이기 위한 괴물도 되었음에 소름이 돋습니다.
연무가 자욱하니 이렇게 밖에 담아내지 못하겠습니다.
아직도 산에는 눈이 있고 서늘한 기운에 아침에나 느낄 수 있는 이내를 온종일 뿜어내고 있는 산상에서 느낄 수 있는 정기(精氣)랍니다.
왜 산에 가느뇨, 그 누가 물었다네,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그저, 산이 있으니까...
산, 그 산의 풍경은 벌거숭이처럼 온 몸을 드러낸 겨울산에 더한 묘미를 느낍니다. 등성이와 골이 마치 늑골처럼 보이고 아무런 가식도 없이 보이는 산세에서 참 모습을 볼 수 있음입니다.
허망함 입니까, 아쉬움이십니까. 저 영봉에 올라 서성이는 님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르리 없다지만, 하늘이야 어찌 오르겠습니까 이제 또 우리는 되 돌아가야 합니다. 저 속세의 내일을 위해서..
오가는 길목에서 고운 님들의 한 순간을 기억에 담아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사는 동안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기에 그 태산같이 갈구하는 여망을 한 순간 이렇게라도 잡을 수 있음이 우리에게 얼마다 다행스런 일인가요. 주사(主寫) 옆에서 덩달아 저도 담아 봤습니다.
하산길에 힘이 드셨나보다 한잔 가득 꾸욱 담아 정을 나누시네,
지나는 이 사람에게도 진솔함으로 권하신 형제님 그리고 자매님 고마웠습니다. 호응치 못한 저의 부족함을 이해 바랍니다.
여기서도 산길 2km라, 평지 이십리는 족히 되겠지,,
빼곡한 수림사이로 어느 님들의 정성일까,
수많은 사람의 무지한 발길에서 자연을 아끼자는 그 정성이 섬돌의 숫자만큼이나 눈물겹고 고맙습니다. 늘 福 되시옵소서.
다래넝쿨인지 머루넝쿨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으로 오래된 고목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굽어지고 감고 틀어져 용틀임을 한 그 조형미에서 경이로움을 봅니다.
내 가는 길 앞에 갈색의 가을 산을 넘어 눈(雪)으로 분장한 푸르른 산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이채롭습니다. 이렇게 자연은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없는 경이로움을 지닙니다.
반석 위에 하얀 면(白面), 병풍처럼 둘려진 암벽을 보자니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산수화를 보는 듯합니다. 정선은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처음으로 만들어(創法) 중국풍 산수와는 다른 우리 정서와 풍경을 그린 화법(畵法)을 널리 알린 으뜸 화가이지요.
수림사이로 하얀길이 열렸습니다. 낙엽이라면 사뿐히 츠려밟으련만, 모래알보다 많은 너를 어찌 사려 밟을 수 있으리요.
저 수많은 님의 발길도 내와 같은 심경이었으리..
오호라 이제 얼추 다왔구나 신륵사가 저 만치 앞이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구나, 이정표야.
뒤를 돌아보니 앞산 등성이 넘어 아득한 곳에 월악의 영봉이 아물거립니다. 내 발길이 저 곳에 머물었고 님들의 발자국이 남았있겠지요.
밤새 추위에 떨지는 않으련지 되돌아가 모두 줏어담아올까, 바라건대 바람아 솜같은 포근함으로 보듬어다오.
문은 열려 활짝인데, 들어오지는 말라는 푯말이 손사래를 칩니다. 하지만 저의 특권으로 침입을 하였습니다. 특권이 뭐냐고요?
보고자는 저의 이기지요. ㅎㅎ
저 정도의 비교적 작은 건물이 팔작지붕이었다면 날아갈듯한 가벼움이었으리, 아담한 건물이지만 맞배지붕이 주는 진중함이 있습니다.
고즈넉한 산사에 정적만 흐르는데, 두 채의 불전만 말없이 고요에 묻혀 긴 세월을 창려(彰麗)한 빛으로 뿜어내고 있나니 ...
《 제천 신륵사 삼층 석탑(神勒寺 三層 石塔)》(寶物 第 1296號)
이 탑은 통일신라의 이형적인 석탑양식을 계승한 삼층석탑으로 정상부분에는 원형의 상륜부가 남아있습니다. 간결한 구조와 장중한 양식이 조화된 이 탑은 높이 4m 정도에 정방형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이 올려져 있으며, 불국사의 석가탑을 방불케 할 만큼 정교하고 장중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탑은 1981년 해체 복원할 때 기단 내부에서 108개의 흙으로 만든 탑과 2개의 사리함 조각이 발견되었답니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堤川 神勒寺 極樂殿)》(제천시 덕산면 월악리도 유형문화재 제132호)
고풍스런 이 다포식 맛배지붕의 이 제천 신륵사 극락전은 신륵사의 주존불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신 불전(佛殿)입니다. 문이 굳게 닫혀 뵐 수는 없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4년(582年)에 처음 세웠고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중창하였으며, 조선 초에 무학화상이, 명종 때는 사명대사가 중수한 것으로 전합니다." 지금의 건물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다포식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정토에 있다는 부처로 무량광불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큰 소망을 품은 부처로 이 부처를 염(念) 즉 생각에 두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간다고 합니다.
신륵사를 좀 지나다 우측을 보니 고드름이 발을 쳤네요.
"고드름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 달아놓아요,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셔요~~~"
ㅎㅎ 괜시리 즐겁습니다.
저 만치 반가운 모습이 보입니다.
순간 힘들었던 피로가 가시는 듯 몸이 가벼워 짐은 시원한 막거리가 있겠다는 생각에서이지요. ♬
월악산 노래비로서 碑石 좌.우에 있는 사람처럼 생긴 석물에서 주현미의 '월악산'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여유롭고 담백함이 솔솔 풍기는 인품에서, 그 잔잔한 미소에서 마음이 끌리더이다. 언제 또한 이런 인연을 뵙기는 쉽지 않을 것 같소이다. 뵈어서 참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늘보 형제님...
큰 체격 만큼이나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고 늘 배려함을 잊지 않는 그 자세에서 참다운 사람의 향기를 맡습니다.
진한 솔향처럼, 때로는 묵향처럼...
위에는 삿갓을 묘사하고 몸돌은 여인의 엉덩이를 리드미컬하게 율동적으로 표현한 작가의 풍부한 美的 감각과 풍자적 재치에 즐거울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월악산 노래를 들려주는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어 삿갓아래 얼굴의 여러 方孔에서 노래가 흘러 나오도록 고안 된 작품입니다.
힘든 산행을 마치고 따끈 정이 듬뿍 담긴 오뎅과 막걸리로 많은 분들이 행복합니다. 이 쉽지 않은 한 분의 정성에 많은 분들이 훈훈하게 따습습니다. 이처럼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 강석주 전무님, 함께하신 많은 분들의 고마움을 모아 이렇게나마 감사를 올립니다..
두 분 뭐하시는 겁니까? "거참! 맛있겠는데, 그만 국자 좀 줘봐요. 조금 더 담고 드리지요, 허참 사람두 뭔 고집이래~~ "
두 분이 국자를 가지고 고집스런 얼굴로 신경전을 하십니다 그려 ㅎㅎㅎ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늘 행복하십시오. 고맙습니다.
2011년 3월 27일 월악산을 다녀와서 , - 仁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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