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先史)/신석기시대(磨製石器간석기)

新石器時 美沙里遺蹟址 . 遺物

鄕香 2011. 1. 7. 17:22

 

京畿道 河南市 美沙洞 일대에 위치한 미사리유적은 1960년 김원용 선생에 의해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학계에 보고된 이래로 수차에 걸쳐 지표조사가 실시되었으며, 1979년에는 미사리 섬의 북쪽 일부가 사적 26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1980년에는 사적지 일대에 대한 긴급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최근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유적 일대의 江流幅을 확장하여 江岸을 정비하고자 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유적에 대한 구제발굴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조사는 1987년부터 1992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3차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미사리 신석기시대유적 전경 (1988)>

 

미사리유적 일대의 퇴적물 구성은 하부의 자갈층과 상부의 모래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부의 자갈층은 한강의 수면으로부터 2~3m 깊이에서부터 방달하기 시작하여 기반암을 부정합적으로 피복하고 있으며, 수면 상부로도 약 10m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갈층의 상부에는 모래층이 퇴적되어 있는데, 표고 20m 내외의 높이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래층은 대체로 中粒의 모래가 우세하며, 느슨한 구조로서 지하수 침투가 용이하여 건조한 상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모래층의 두께는 지점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나 자갈층이 두꺼운 하류쪽은 6m 가량되고, 자갈층이 얇은 상류쪽은 9m 가량됩니다. 발굴지역의 층위는 표토에서 자갈층에 이르기까지 모두 17개의 자연층위로 구분되며, 신석기시대 문화층은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됩니다.

 

< 미사리유적의 동서층위 (손으로 가리키는 부분이 신석기시대층) 1992년>

 

미사리유적의 신석기시대문화층은 전기와 후기의 2기로 나누어집니다.

전기는 층위상으로는 하층에 해당되며, 주거지는 모두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원형노지의 존재로 보아 주거지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하층이 조사된 서울대 A지구의 경우 직경 50m의 범위에 모두 8기 이상의 주거지가 있었으며, 이들 주거지 사이에는 2기의 야외노지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전기의 토기 양상을 보면 사질이나 점토질에 운모가 섞인 태토가 주를 이루며, 구연부에는 단사선문이나 爪文, 점열문 등이 시문되고 구연부 아래에는 격자문이나 중호문 등이 시문되고 동체부와 저부에는 어골문이 시문된 토기가 주를 이룹니다.

 

<빗살무늬토기편 각종(櫛文土器片各種) / (左下) 高 13.5cm, 幅7.5cm, 厚0.9cm>

 

후기는 층위상으로 신석기시대 上層에 해당하며, 한양대 A지구와 C지구, 숭실대 A지구에서 20여기의 원형노지와 2기의 야외노지가 조사되었습니다. 후기의 토기양상은 점토질의 태토에 석면, 활석, 석립 등의 보강재가 혼입되는 양상을 보이고 전면에 횡주어골문이 시문되거나 구연부 종속문양대와 저부의 문양이 생략된 토기들이 주를 이루는데, 구연부에는 점열문이나 押引文 계통의 문양이 주로 시문되고 있습니다. 또한 후기의 토기 중에는 점토질 태토에 직경 1~2mm 크기의 굵은 석립이 혼입된 태토질의 토기가 주목됩니다. 이러한 토기들의 표현에는 짧은 사선으로 이루어진 횡주어골문이나, 사선문이 드문드문 시문되어 있고 동체 하부에는 문양이 생략되고 있으며, 태토질만으로 볼때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토기는 주로 서해 도서지방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미사리 신석기시대에서 가장 늦은 시기의 유물로 생각됩니다.  

 

<미사리 신석기시대 유구 노출 전경 (1988)>

 

石器類는 7종류 213개체분이 출토되었는데, 석촉만 전면을 磨硏하였고, 나머지는 마연을 하지 않았거나 날의 일부만 마연한 것들 입니다. 石鏃은 점판암계통의 석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슴베가 없는 무경식으로 몸체는 柳葉形을 이루고 있습니다.

石斧는 대체로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손버닥만한 크기의 낙잡한 가갈의 한쪽 면을 타격하여 날을 세운 것인데, 날 일부만 마연한 것이 많습니다. 그밖에  작은 자갈돌을 타격하여 만든 어망추와 박편석기 등 다양한 석기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또, 1980년도 조사에서 탄화된 도토리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화살촉 각종(石鏃 各種) /(右) 高5.4cm,幅1.4cm,厚0.2cm>

 

<돌도끼 각종(石斧 各種) / (右)高13.6cm,幅6.8cm,厚1.7cm >

 

 

<그물추 각종(漁網錘 各種) / (右上)高2.1cm,幅2.9cm,厚0.6cm >

 

<미사리유적 신석기시대 문화층 조사 광경(1991년)>

 

미사리유적 신석기시대 전기와 후기의 실연대에 대해서는 1980년에 신석기시대 하층에서 채집된 목탄시료에서 측정된 방사선탄소연대(5,00 ± 140B.P) 를 참고할 수 있겠는데, 이를 수륜보정을 통한 연대는 3,900~3,640B.C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전기후엽에 해당하는 연대입니다. 따라서 전기의 실연대는 대략 4,000~3,500B.C.로 비정할 수 있겠습니다.

미사리 후기의 실연대에 대해서는 직접 비정할 만한 자료가 없으나 점토질로된 서해도서지방 양식의 토기가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下限은 신석기시대 후기까지 내려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서남해안 도서지방 출토유물(島嶼地方 出土遺物 』

 

이 도서지방의 토기편유물들은 미사리유물과 같은 시기 문양대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참고로 올립니다.

 

<덧무늬토기편 각종(隆起文土器片 各種) / 慶南 新岩里(左上) 高10.3cm,幅7.5cm,厚0.6cm >

 

<빗살무늬토기편 각종(櫛文土器片 各種) / 全南 黑山島(左) 高8.0cm,幅11.5cm,厚0.6cm >

 

<빗살무늬토기편 각종(櫛文土器片 各種) / 釜山 東三洞(左上) 高13.5cm,幅11.5cm,厚0.6cm >

 

<빗살무늬토기편 각종(櫛文土器片 各種) / 釜山 東三洞(左上) 高10.0cm,幅8.7cm,厚0.9cm >

                                                                                                                                                                                                                                                                                                                                                                                                                                                                                                                                                                                                                                                                                                                                                                                                                                                                                                                                                                 

<빗살무늬토기편 (櫛文土器片) / 釜山市 多大浦 / 高26.5cm,幅22.3cm,厚1.3cm >

 

 

<갈돌(碾石) / 京畿道 白翎島 / 高31.6cm,幅23.5cm,厚6.5c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