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천년기 후엽-3천년기 중엽)
코카서스 지방은 鑛床을 보유하고 있고 흑해연안에서 가장 중요한 採鑛과 治金지역이었기 때문에 동유럽의 청동기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4천년기 후엽부터 기원전 3천년기에 걸친 초기 청동기시대에 북부 코카서스 지역의 遊牧族들은 교역을 통해 서남아시아의 선진문화와 접촉을 하였다. 코카서스의 풍부한 청동을 교환하면서 그들은 남쪽에서 일련의 기술적 . 미술적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경로를 통해 銅鑄造法이라든가 청동기 제작기술을 받아들였다. 초기 청동기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는 마이코프(Maikop)문화로 다양한 고대 무덤과 생활 유적을 포괄하고 있으며 타만(Taman)반도에서부터 시작하여 동북 코카서스의 산기슭까지 미치고 있다. 마이코프란 명칭은 북부코카서스 크라스노다르(Krasnodar)지방의 마야코프 무덤에서 따온 것이다. 같은 시기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인접한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끼쳐 마치 後光처럼 몇몇 衛星文明들을 탄생시켰다. 북부코카서스는 後우바이드(Post-Ubeyd)期의 비슷한 문화과정에 포함된 광대한 지역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인상적인 큰 사건들이 초기 청동기시대에 흑해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지역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는 비교적 안정되고 단일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이 지역에 대규모의 인구가 이동해 오면서 야기된 현상이다. 마이코프 古墳群(Oshade)은 그러한 과정의 결과를 보여주는 훌륭한 例이다. 무덤의 발굴은 유명한 러시아 고고학자인 베셀로프스키(N,I, Vessellovskiy)에 의해 마이코프시의 두 거리가 만나는 十字路에서 이루어졌다. 그 이전에는 풍부한 부장유물을 지닌 스키타이 무덤들이 남러시아에서만 발견되었기 때문에 베셀로프스키는 당시의발굴이 스키타이 보다도 오래된 무덤과 간계된다는 것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나무를 쌓아 올려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대형의 무덤방(墓室)에 3인의 屍身이 묻혀 있었다. 방의 바닥은 작은 돌들이 깔려 있었다. 남쪽에 있는 主室에서는 붉은 흙이 덮인 人骨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머리에 冠을 쓰고 있었고 목에는 금, 유리, 터키석, 홍옥을 꿰서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다. 시신의 오른쪽에는 아래 부분은 금, 우ㅏ는 은으로 된 약 1m 길이의 속이 빈 막대가 놓여 있었다. 발굴자는인 베셀로프스키는 그 장대를 깃대나 권위의 상징물로 생각했다. 장대끝의 홈에는 나뭇잎 다발이나 머리술이 꽂혀 있었던 것같다. 그에 반해 파르마코프스키(Parmakovski)는 그 장대를 棺臺에 얹힌 주검을 덮었던 시설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현재는 발굴자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연구자가 많다. 시신의 무릎 높이에는 石鏃이 놓여 있었다. 기타 청동제 무기나 도구, 용기 및 금은제품이 묘실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었다. 함께 출토된 은제 항아리에는 동물상과 "世界像"이 있으나 사람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두 그루 나무와 아마도 꿀을 찾고 있는 곰이 있다. 이어서 험준한 봉우리의 산맥이 있고 거기서 두 줄기의 강이 흘러내려 바다로 합류한다. 육지에는 사자, 야생당나귀와 수소가 있다. 물가에는 양과 영양, 물을 먹는 산돼지, 사냥하는 사자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금속품(연장.무기 및 용기)과 장신구는 현재까지로는 近東지방에서 수입된 것이거나 모방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구체적으로는 어느 지역으로부터의 영향이나 수입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북부코카서스에서 행해지고 있는 큰 규모의 고고학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마이코프 고분군의 고고학적 문화는 그 지역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여전히 독특하고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마이코프 무덤 출토 은제항아리의 문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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