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外國)/스키타이황금(러시아國立에르미타주

「스키타이의 문화유산 」

鄕香 2010. 4. 9. 23:37

 

 

 

 

〈스키타이의 문화유산〉

스키타이인들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스키타이'란 이름은 여러세기동안 남러시아의 흑해 북쪽 지역을 계속 지칭하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인류에게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남겨주어 새로운 세대에 끊임없는 흥미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여러 유파에 속하는 장식과 공예미술의 뛰어난 작품들의 다양성에 의해 설명된다. 우리는 흑해 연안의 고대도시들에서 그리스 장인이 유목민의 귀족을 위해 제작한 Graeco-Barbarian 양식의 고대 浮彫 金屬品의 걸작들인 소위 스키타이 동물양식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量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오리엔트와 그리스 계통의 희귀한 미술품도 있다. 이들 모든 미술의 보물들이 스키타이 유물에 통합되어 있다.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유적 분포도>

 

☆ 금 ☆ 

스키타이인들은 그 풍부한 황금을 어디서 얻었을가?  수도 없이 많은 황금 유물이 도굴꾼에 넘어가 흩어지고 용광로 속에 들어가버렸지만 여전히 당시의 호사스러움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헤로도투스는 먼 북동지역의 민족들을  열거하면서 외눈의 아리마스펜(Arimaspen)과 "금을 지키는 콘드르"의 나라를 언급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동부 카자흐스탄과 알타이산맥(아마도 "금의 산"을 의미하는 Altyn-Tau에서 유래하였음)에 있는 오늘날까지도 풍부한 金鑛을 추측할 수 있다.  알타이산맥에서는 알타이-스키타이 미술에서 자주 사용되는 주석도 산출되고 있다. 이곳에서 산출된 금은 흑해 북안의 올비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캐라밴 길을 통하여 스키타이의 구매자들에게까지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에는 금이 산출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다른 가능성은 남부 코카서스 콜키스 지방의 砂金을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아직 스키타이의 금의 産地를 규명하기 위한 화학적분석은 시도된 적이 없다.

 

☆말과 마구

스키타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축은 말이었다. 말의 몸통 길이는 평균적으로 1.5미터가량 되었는데 특히 수컷이 선호되었다. 말은 편자를 박지 않았으며 등자없이 다채롭게 꾸며진 아플이케가 달린 가벼운 안장 또는 깔개만으로 달렸다. 태양빛깔때문에 적갈색 말이 가장 귀하게 여겨졌다. 파지리크 무덤에서 출토된 잘 보존된 미이라화된 말과 기타 다른 무덤들에서 출토되는 각종 화려한 마구 및 사실주의적으로 말이 표현된 미술품들은 질풍같이 달리는 軍馬의 像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 말들은 보기좋게 꾸민 꼬리와 끝을 자른 갈기를 하고서 금빛나는 재갈과 굴레장식들의 광채 속에서, 죽은 적의 머리가죽을 고삐에 주렁주렁 달고 달리면서 그의 사나운 주인이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몸을 바쳐 많은 非스키타이인들의 경악을 자아내었다.

 

☆ 무기 ☆ 

스키타이 무덤에서는 항상 다량의 무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은 특히 기마전과 접근전에서 신속성과 명중율이 높은 W자형의 조합된 强弓을 사용하였다. 활과 화살을 같이 담은 고리투스는 스키타이의 독창적인 것이다. 고리투스 안에 있는 화살주머니는 헤로도투스가 언급한 것처럼 죽인 적의 오른팔에서 벗겨낸 사람가죽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고리투스는 항상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많은 스키타이 미술품에서 그러한 묘사가 나타난다. 스키타이인들은 종종 두 개의 고리투스를 지녔는데 왼손과 오른손으로 똑같이 능숙하게 화살을 쏠 수 있었다. 청동화살이 없는 경우에는 날카롭게 다듬은 화살끝에 독사 삶은 용액과 부패한 사람 피를 발랐는데 그 독은 화살을 맞은 사람을 몹시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이끌었다. 전형적인 스키타이식 화살촉은 없었던 것 같다. 많은 형식이 있었으나 그중 특히 삼각형이나 날개가 셋 달린 화살촉(三翼鏃)이 널리 퍼져 있었다. 기타 육박전에서는 창, 전투용 도끼, 단건(Akinakes)과 칼, 채찍 등이 무기로 사용되었다. 스키타이의 군대는 전투시 일정한 전투대형의 규칙에 따라 편성되었으며 그 핵심은 이미 초창기부터 중무장한 기병대로 조직되어 있었다. 스키타이 무덤에서

우리들은 그러한 중무장기병의 흔적들- 미늘갑옷이나 투구, 정강이 가리개 등-을 볼 수 있다. 또한 미술품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유물사진 54) .

 

☆ 외모 ☆

스키타이인의 형질적 외모는 발굴품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복원된다. 상류층의 구성원은 강한 골격을 지닌 長身의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키가 1.76m에서 1.80m사이이며 1.90m에 달하는 자도 있다. 평민들은 보다 작았으며(평균1.64m) 물론 여자는 더 작았다.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인들은 코카서스나 쿠반지역의 사람들처럼 유럽인종적 특징을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인종적으로 이란계통의 민족에 속하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어에 가까운 그들의 언어는 코카서스 테레크지방의 오세티아어에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동쪽의 사르마티아 지역에서는 몽골적인 특징이 첨가되는데 당사자들은 기원전 6세기경에야 비로서 서쪽으로 밀고 들어온 것 같다. 그러나 투바공화국의 아르잔 쿠르간(기원전 8~6세기)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아직 모두 長頭形의 유럽인종에 속한다.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 쿠르간에 매장된 주인공들은 이미 유럽-몽골 혼혈종이다. 남자들은 강한 몽골적 특징을 보이는 한편, 여자들은 유럽인종적이다. 스키타이인의 복장에 대해서는 비록 헤로도투스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도 출토 유물에 나타나는 인물상의 묘사로 파악할 수 있다. 긴 구레나루의 기마유목민들이 헐렁하게 바느질된 긴 바지를 입고 다녔으며 바지 아래쪽은 복숭아뼈 위에서 가죽끈으로 묶었다. 위에는 펠트덧장식이나 자수 놓아진 웃옷을 걸쳤다.(사진54,96 등)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여성들은 머리를 각종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