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원 》
" 스키타이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세워진 국가로서 그들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당시 사람도 살지 않고 황야였던 그들의 땅에 최초로 태어난 자는 타르기타오스(Targitaos)였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나로서는 믿기 어렵지만 제우스와 보스테네스강(현재의 드네프로江)의 딸이었다고 스키타이인들은 믿고 있다."
이전설은 유명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기원전 450년경 흑해 북안의 그리스 식민지인 올비아를 방문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올비아 근처에 살고 있던 악명높던 기마족을 그리스인들은 스키타이인이라고 불렀으나,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스코로텐(Skoloten), 즉 王者로 칭했다.
헤로도투스에 의해 언급된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당시 그리스인들은 헤라클레스가 드네프르강 연안 스텝지대에 있는 울창한 삼림지대인 히레아(Hylaea)에 거주하던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뱀인 蛇女와 동거하여 낳은 셋째 아들(Scythes)이 스키타이의 始祖라고 믿고 있었다.
두 전설 모두 스키타이인들이 드네푸르강 하류 유역에 대한 그들의 영토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창조한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투스 자신은 스키타이인들이 유라시아의 동쪽 어디엔가 있는 그들의 먼 고향(아마도 투르키스탄이나 우즈베크스탄)에서 중앙아시아 종족인 마사케트(Massaget)인들에 쫓겨 흑해 북안으로 이동하여 왔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헤로도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도 스키타이인들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수수께끼는 밝혀지지 않았다.
두 가지 널리 희자된 설이 있다. 하나는 스키타이 부족이 기원전 7세기 전반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문화와 함께 흑해 북안으로 이동해 온 이란어족이라는 견해다. 반면 일부 학자는 스키타이의 토착 기원을 주장하여 스키타이 문화가 볼가강 유역으로부터 흑해 북안으로 이동해 온 후기 청동기문화(통나무 문화 또는 木室墳文化)의 토대위에서 기원전 7세기대에 형성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 두번째의 가설은 킴메르인(Cimmerian)의 금속문화 또는 흑해의 후기청동기 문화와 결합되었다는 사실로 보강되고 있다.
<스키타이와 고대 오리엔트>
〈스키타이에 의해 야기된 혼란〉
☆ 킴메르인의 추적☆
스키타이인들이 세계사의 무대 위에 나타난 바로 그 순간부터 "스키타이"란 이름은 가공스런 파괴력과 同義語가 되었다. 그들의 첫 번째 희생물은 같은 기마유목민인 킴메르인이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흑해지역에서의 스키타이 팽창때문에 원래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킴메르인들은 거의 전멸되어 버리고 남은 킴메르인들은 소아시아로 도망갔다. 밀려난 킴메르인들은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기원전721~705)때 우라루투(Urarutu)왕국(오늘의 터키령 쿠르디스탄)을 위협하고 이어 소아시아로 들어오면서 리디아 왕국까지 약탈하기에 이르렀다.
스키타이인들도 계속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해 킴메르인의 뒤를 쫓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코카서스를 넘어 근동지방을 침략하였다. 앗시리아 년대기는 이 변란을 기원전 670년대로부터로 기록하고 있다.
☆앗시리아와의 동맹☆
스키타이인들은 이미 기원전 680년대에 앗시리아와 婚姻同盟을 맺고 있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623년~622년에 바빌로니아인과 메디아인들이 앗시리아의 마지막 수도인 니네베(Nineve)를 포위 공격할 때 앗시리아를 도와 메디아인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결국 앗시리아 왕국과 수도 니네베는 기원전614~612년에 메디아와 바빌로니아의 재침공을 당하여 붕괴되고 만다.
☆ 고대 오리엔트의 지배와 약탈 ☆
스키타이인들은 이미 킴메르인의 추적을 구실로 삼아 우루미아湖(현재 이란의 리자이예 호수) 가까이에 있는 만나지방에 거점을 확보하였으며 그곳에서 일종의 부족동맹을 형성하였다. 그 지역을 통치하면서 그들은 우라루투국을 멸망시켰고 심지어 이집트의 파라오까지도 그들을 두려워하여 스키타이 지배층에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다. 고대 오리엔트의 고기록들은 잘 무장된 기마병단을 보유한 북방 유목민이 거의 1세기 동안이나 아시아 소국들에 큰 걱정거리였다고 전해주고 있다. 특히 니네베에서 메디아에 대한 승리 이후 28년간 계속되었던 스키타이의 공포정치가 거의 모든 오리엔트 지역에서 자행되었다.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인들이 피지배자들로부터 무거운 조세를 받아내었을 뿐 아니라 종종 약탈까지 자행하여 " 그들의 放縱과 無知"에 의해 문자 그대로 주위의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다고 전해주고 있다. 예언서 예레미아는 이들의 공포를 더욱 생생하게 전해준다, " 보라 나는 멀리서 한 민족을 너희들 이스라엘의 집에 데려올 것이다. 그들은 강력한 국가, 태고의 국가이며 그들의 언어를 너희가 알지 못하며 그들의 말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화살통은 열려진 무덤 같으며 그들 모두가 강인한 무사이다 그들은 너희들의 아들과 딸들이 먹어야 할 수확물과 빵을 몽땅 먹어치울 것이다. 그들은 너희들의 포도와 무화과 열매도 먹어치울 것이다. 그들은 너희들이 거주하고 있는 울타리친 도시들을 칼로써 파괴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기마족이 반드시 스키타이족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 패배 ☆
기원전 7세기 말과 6세기 초에 이들 새로운 도래자(스키타이인)는 아시아 소국의 땅에서 메디아왕 키악사레스(Kyaxares)에 의해 쫓겨났다. 그는 간단한 책략으로 스키타이 우두머리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취하게 한다음 모두 죽였다. 드네프르강 하류에 있던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도중에 일부 스키타이 부족들은 북부 코카서스에 정착하였다.
☆흑해 북안의 정착과 그리스문명과의 접촉☆
이리하여 초기 스키타이 문화 중심지 중의 하나가 쿠반강 유역에 발생하였다. 그곳은 오래전부터 토착부족들(메오티아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제 외래 유목민들이 밀고 들어왔다. 스키타이의 지역 왕족이 묻힌 케레르메스 고분의 출토품이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리토이(Melgunov)형식의 무덤들에서 나온 고고학적 유물로 판단하건대 나머지 스키타이인들은 벨리코스 유목민들이 동유럽에서 첫 번째 국가를 형성하였던 드네프르 스텝지대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스키타이 왕족은 다시 정치적.군사적 우세를 확립하였다. 기원전 7~6세기에 그리스 식민지들이 흑해 북안에 출현하였다. 오비아, 체르소네소스, 판티카페움과 기타 여러 도시들이 그리스로부터 온 이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리하여 스키타이 세계가 고대문명의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스 이주민과 스키타이족외에도 많은 부족들이 남러시아와 흑해 북안의 넓은 초원지대에 이미 정주하고 있었다. 이들 민족에 대한 기록이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남아있다. 헤로도투스는 또한 스키타이 부족연맹을 농경스키타이와 유목스키타이로 구분하였으며 왕족 스키타이에 대해서도 별도로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확한 경계와 위치는 아직 불분명한 점이 많다.
☆ 경제 ☆
유목민의 이국적 생활 방식과 특이한 관습은 그리스 역사가, 지리학자와 작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 말, 바퀴달린 家族 住居(四輪馬車)가 끊임없이 광대한 스텝지대를 돌아다녔다. 가축(소 . 양 . 말)떼는 늘 새로운 목초지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목초지는 무력으로 탈취되었다. 그 가축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암말의 젖을 마시고 고기와 치즈를 먹었다. 빵과 교역을 위한 곡물은 농경 부족들로부터 징수하였다. 그들인 그리스인으로부터 포도주, 올리브기름, 장신구, 갑옷과 투구를 받았다. 대신 그리스인들은 농업 1차산업물인 꿀, 가죽, 물고기, 그리고 특히 밀을 얻었다. 많은 그리스의 고대도시, 특히 아테네는 스키다이의 삼림과 스텝지대, 그리고 쿠반의 메오티스로부터 온 곡물을 먹고 살았다. 흑해연안은 또한 노예로 팔기 위한 사람들을 공급하였다.노예들은 유목민이 이웃 부족을 침입하면서 잡았다, 이들 노예는 그리스에서 하인, 도공, 匠人, 弓士로 이용되었으며 한때는 도시경찰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중개무역으로 스키타이와 그리스 식민도시 모두 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 전투력 ☆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인들의 가장 중요한 특이성은 그들을 공격한 어떤 적도 그들로부터 도망갈 수 없고 그들이 피하고자 하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잡을 수 없었었다는 점이다. 馬上의 弓術家인 스키타이인들은 도시도 성채도 없으며 그들의 집을 직접 끌고 다닌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정복할 수 있으며 교전할 수 있을 것인가?기원전 515~512년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히스타스푸스가 스키타이와의 전투에서 무참히 패한 것이스키타이의 무적성을 알려주는좋은 例이다. 스키타이인들은 적들을 스텝지대로 깊이 유인하여 사방에서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녹초를 만들었다. 스키타이 왕국의 초기에 군대는 강건한 남자들의 징병에 의해 충원되었다. 왕 자신이 군대의 선두에 섰다. 나중에는 기갑분대가 자원병으로조직되었다. 각 분대의 핵은 왕의 친위대를 형성한 잘 무장된 귀족병단이다. 스텝유목민은 타고난 전사들이며 항상 그들의 무기를 휴대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용사다운 기백과 적에 대한불굴의 용기는 스키타이인들에게 특별한 덕목으로 간주되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무사가 그의 첫 번째 적을 죽이면 적의 피를 마시는 특별한 의식이 행해진다. 살해된 적들은 머리 가죽이 벗겨진다. 머리가죽은 무두질하여 손수건이나 옷으로 사용한다. 말고삐에 매달려 뽐내어지기도 한다. 두개골은 가죽 또는 금으로 덧씌워 사발로 사용한다. 벗겨낸 오른팔 가죽은 화살통의 덮개가 된다. 스키타이인의 머리 가죽 벗기는 풍습은 두개골의 절개 흔적이 몇몇 스키타이무덤에서 발견되어 사실로 증명되었다. 알타이파지리크 무덤에서도 문신으로 가득찬 한 남자의 미이라가 잘 보존된 채로 발견되었는데 그 두개골은 분명히 머리 가죽이 벗겨져 있었다. 형제관계는 스키타이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모두를 위한 신성한 의무로 여겨졌다. 인척관계가 없는 사람도 피로 맺은 義兄弟의 엄숙한 계약을 통해서 그들의 우정가 상호 충절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스 작가들에 의하면, 그러한 조직에 들어간 사람들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몇방울 포도주가 가득찬 술잔에 떨어뜨린다. 이어 검과 창, 전투용 도끼, 화살촉들을 술잔 속에 담근다. 그리고나서 엄숙한 기원문을 낭독하고 술잔을 들이킨다. 이러한 의식의 절정의 순간이 스키타이 미술작품에 빈번히 묘사된다.(예 : 유물50)
☆ 종교.제사.의례☆
대부분의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스키타이인들은 주술의 존재를 믿고 자연형상을 擬人化 한 신들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토테미즘적이고 샤머니즘적인 표상에 지배되었다. 그들은 또한 동물숭배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인과 달리 스키타이인들은 신을 위한 사원이나 조상(彫像)을 세우지는 않았다. 단지 전쟁신에 공물과 희생을바칠 특별한 제단만 세웠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그들은 매년 마른 장작을 산처럼 쌓아올리고 그 꼭대기에 스키타이 아레스(Ares : 전쟁의 신) 의상징인 오래된 쇠검을 꽂았다. 스키타이의 종교적 의례는 주로 獻酒, 祭物, 말 또는 다른 동물의 희생(犧牲)같은 의식으로 구성되었다. 그외에 포로 백 명 중 한 명도 전쟁의 신을 위해 희생되었다. 신의 자손으로 믿고 있는 스키타이 왕들의 제사는 사람의 殉葬을 포함한다. 그들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스키타이인들은 왕을 위한 무덤을 짓기 시작한다. 시신의 모든 내장은 제거되고 그 속은 생강, 유향, 파슬리와 아니스 열매로 채워진다. 그 후 절개된 부분은 봉합되고 몸통은 밀랍이 발라진다. 왕의 시신은 사륜마차에 태워져 모든 부족들의 마을을 지나간 다음 마지막으로 게리(gerrhi)의 땅에 옮겨져 준비된 무덤에 있는 침상 위에 눕혀진다. 창은 시신의 양쪽에서 땅 위에 고정되고 들보가 그 위를 가로지른 후 전체를 나뭇가지로 만든 덮개로 씌운다. 죽은 왕과 그의 귀중품과 함께 스키타이인들은 왕의 호위병, 하인 술을 따르는 자, 후궁 중 한명 그리고 말들 중 일부를 왕의 명예를 위해 絞殺한다. 이후 무덤위에 흙을 쌓아 올려 가능한한 높은 봉분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1년 후, 보다 더 끔직한 장례 절차가 재현된다. 왕의 생존시 데리고 있던 하인 중 50명의 남자가 50마리의 말과 함께 죽임을 당하여 미이라로 처리된다. 한편 반으로 자른 수레 바퀴를 두 개의 말뚝으로 받쳐 지면에 고정시킨 다음 말의 꼬리에서 목까지 두꺼운 나무 막대기로 관통시켜 이것을 수레바퀴에 매달아 놓는다. 다시 말 위에 교살된 시종들을 올려 놓고 막대기를 찔러 말과 고정시킨다. 이렇게 하여 말과 말탄 순장자들을 봉분 둘레에 둘러 놓아 묘지기 역활을 하게 하였다. 일부 스키타이 무덤의 봉분은 매우 커 18~20m에 달하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도투스가 언급한 왕족의 공동묘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기원전 4세기의 발굴된 무덤 중 소로하나 체르톰닠 또는 톨스타야 무덤 같은 것은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부장품에서 왕의 무덤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들 무덤은 헤로도투스에 의해 언급된 게리의 신비스런 땅(왕실공동묘지터)이 있었던 드네프르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 무덤들은 헤로도투스가 언급한 시기보다 반세기 이상이나 늦은 기원전 5세기 말과 4세기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몇몇 세부에서 헤로도투스에 의해 언급된 묘사와는 차이가 있다. 주된 차이점은 무덤의 구조가 장방형 구덩이가 아니라 10내지 15m 깊이의 출입갱과 30여m 까지 이르는 긴 널길(羨道)이 있는 카타콤 형태의 복잡한 지하무덤이라는데 있다. 主室은 대부분 도굴당했으나 다행히 많은 측실과 감실, 또는 은닉장소가 설계되어 있어 도굴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일부 도굴꾼들은 복잡한 미로 때문에 출구를 잃어 생매장당하기도 하였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따른 스키타이와 인접 나라들>
《後期 스키타이 諸國의 盛衰》
스키타이의 왕권은 세습적이다. 왕은 최고의 군사 지휘자이다. 부족의 족장과 함쩨 왕은 주된 종교적 의례를 수행한다. 특권층은 주술가와 점장이에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은 신성한 버드나무가지의 도움으로 예언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선조들의 관습을 지키는 것을 스키타이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습을 저버리고 외래의 믿음과 문물에 빠지는 사람에게 엄격한 처벌이 따르곤 하였다. 이 점에서는 왕족과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식민지들과의 관계가 넓어지면서 스키타이 물질과 정신 문화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이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기원전 6세기 말경 많은 그리스의 문화 요소들이 스키타이 귀족의 일상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스키타이 귀족들은 자체 스키타이 장인의 생산품과 함께 그리스 기원의 물품을 더욱 더 애용하게 되었다. 반면 스키타이 생활은 흑해연안 그리스 식민지에 거주하던 예술가들에게 靈感의 근원이 되었다. 이리하여 스키타이 세계는 유목생활의 사실적 장면들이 담긴 그리스의 도특하고 뛰어난 금속품을 위한 영감이었으며, 그것은 고대 미술과 세계 미술 전반에걸쳐 크나 큰 공헌을 하였다.
기원전5세기 후반에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첫 번째 요새(Kamenskoye Gorodische)를 드네프르강 유역에 건설하여 차차 스키타이 왕국의 행정, 공업, 무역의 중심지로 키워나갔다. 장인, 예술가와 유목민에게 무기 . 장신구 뼈로 만든 조각품 따위를 공급한 상인들이 여기에 살았다. 기원전 4세기경, 스키타이 왕국은 최고의 권력과 부에 도달하였다. 물질적으로 풍요해지면서 그리스미술도 허물없이 받아들인다. 드네프르 지방에 화려한 부장품들로 가득 채워진 거대한무덤들이 많이 들어섰다. 지배자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은 아테스(Athaes)왕이다. 그의 재임기간중 스키타이국은 서쪽 경계를 다뉴브강안까지 확장하였다. 기원전 339년, 아테스왕은 여전히 90세의 나이로 새로운 땅을 정복하려고 하던 중 다뉴브 右岸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트라키아족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끌고 나갔다. 이 전쟁에서 아테스왕은 트라키아족을 지원하러 온 마케도니아 왕 필립 2세에 의해 패퇴되고 살해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히고 스키타이인들은 패배에서 곧 회복하여 8년후, 기원전 331년에 올비아를 포위 공격한 알렉산더 대제가 이그는 3만명의 강력한 마케도니아 군대를 격퇴시키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끝없는 전쟁과 내부의 암투가 점차로 스키타이 왕국의 안정과 힘을 감소시켰다. 스키타이의 이웃인 사르마티아 유목족은 기원전 3세기 초에 이 기뢰를노려 돈강을 건너 스키타이 영토를 침략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스키타이인들을 드네프르 근처의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몰아내고 이 근처의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케사르시대의 영향력있는 시실리 출신 그리스 역사가 디오도르는 이렇게 쓰고 있다.
" 사르마티아인들이 강력해진 후, 그들은 스키타이의 주요 영토를 유린하여 피정복자들을 몰살시킴으로써 그곳을 황무지로 변하게 하였다."
흐해 북안의 이전의 주인이었던 스키타이인들은 해안지역과 크리미아반도로 만족하여야만 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지금의 심페로폴(Simforopol)에 마지막 스키타이 왕국의 새로운 수도인 네아폴리스(Neapolis)를 세웠다. 드네프로에 살고 있는 경작인들로부터의 조세가 끊어졌기 때문에 스키타이인들은 다른 조세원을 찾아서 크리미아반도에 있는 일부 그리스 식민지를 공략하여 그 지역에서의 무역을 제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스인들은 폰틱왕 미트리디아테스(Mithridiates)6세에 도움을 청하여, 그에 의해 파병된 지원 군사력과의 일련의 전쟁에서 스키타이는 지고 말았다. 비록 이 결정적인 패전이 크리미아지방의 스키타이 왕국까지 무너뜨리지는 않았지만, 이로 말미암아 스키타이인들은 기원전 3세기경 역사무대에서 드디어 소멸되기 시작한다. 스키타이인들은 점차 크리미아의 스텝지대에 정착하여 농경생활로 전환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 융합되었다. 기원후 3세기 스키타이 왕국은 종말 고하고 그들의 수도인 네아폴리스의 생활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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