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지대와 스키타이 세계》
考古學에서 스키타이인(Scythians)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黑海의 북쪽 연안에 인접한 스텝지대에 거주하고 있던 부족들을 언급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서쪽으로 다뉴브강에서 동쪽으로 알타이에 이르는 스텝지대의 광대한 초원지대에 거주하면서 공통된 경제적, 문화적 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던 여러 부족들의 복합체로서 스키타이세계(Scythian World)라는 廣義의 개념이 쓰이기도 한다.
흑해연안의 북부 지역에 있는 스키타이 분묘유적의 연구와 발굴은 200여년전부터 시작되었다. 1763년에 스키타이 前期(기원전 7세기 후반~ 6세기)에 속하는 수많은 찬란한 金銀製 유물이 부장된 대형 古塚이 우크라이나의 옐리자베트그라드(Yelizavetgrad : 현 kirovograd)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이 러시아의 첫 박물관으로서 표트르대제에 의해 건립된 聖페테르스부르그(Petersdurg)에 있는 쿤스트카메르(Kunstkammer)로 옮겨졌다.
쿤스트카메르 박물관에는 이미 시베리아 지역에서 발견된 스키타이 양식의 금제유물들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박물관의 모든 고고학적 수장품들은 1859년에 에르미타주(Hermitage) 박물관으로 다시 옮겨졌다.
스키타이유물들의 체계적 연구는 1830년 케르치(Kerch)근방 쿨-오바(kel-oba) 고분 발굴로 시작되었다. 돌무덤에서 발견된 기원전 4세기의 풍부한 埋葬은 수많은 귀중한 그리스제의 장신구류를 다량 부장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兩端에 騎馬人物像이 조각된 금목걸이, 네 명의 스키타이인이 묘사된 瑚珀金製 의례용 용기도 포함된다. 이들 장면은 헤라클레스(스키타이의 첫왕인 타르기타우스와 동일인물)의 세 아들이 활을 잡아 당김으로써 왕위계승의 문제를 결정하는, 헤로도투스의 의해 기록된, 전설을 묘사하는 것 같다.
우크라이나와 북부코카서스의 고분발굴은 1859년 帝國考古學委員會의 성립과 더불어 강화되었다. 위원회의 본부는 에르미타주 건물내에 있었으며 가장 가치있는 발견품들은 에르미타주박물관으로 양도되었다.
1863년 우크라이나의 체르톰맄(Chertomlyk)고분이 조사되었는데 높이가 20m가 넘는 거대한 봉분이 그전부터도 오랫동안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발굴중 고고학자들은 야생마를 길들이고 있는 스키타이인들이 묘사된 은제 암포라(Amphora)병을 발견하였다. 볼샤야 블리즈니차(Bolshaya Bliznitsi)고분의 발굴은 1864년과 1868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무덤은 여러개의 納骨所를 가지고 있어 가족묘로 판단된다. 납골소의 하나는 풍요豊饒의 여신女神인 데메테르 여사제에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물품들과 신분이 높은 여성이 입었던 제복祭服의 금제 장식품들을 갖고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대부분의 고고학 발견은 북부코카서스와 특히 쿠반강유역에서 이루어졌다. 울스키(Ulsky)의 코사크마을 근방에서는 지표하 15m의 깊이에서 나무 구조로 이루어진 유적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곳에는 360마리의 말이 순장殉葬되어 있는데, 비록 스키타이인들이 말을 순장하였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지만, 이처럼 큰 규모의 말 순장은 발견된 적이 없었다.
1903년과 1904년에 이루어진 켈레르메스(Kelermes)고분군의 발굴은 초기 스키타이 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들 고분에서는 스키타이와 고대 오리엔트와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흥미있는 자료들이 출토되었다. 부장품중에서고대 오리엔트 양식의 상상적想像的 짐승들로 장식된 금제 칼집이 있는 철제 단검(Akinakes)이 가장 주목을 끈다.(유물 64-65) 이밖에도 전형적인 스키타이 양식의 유물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그중 하나가 방패장식으로, 발과 꼬리가 둥글게 말린 자세의 양식화된 맹수상으로 장식되어 있는 황금 퓨마이다.(유물13). 또 다른 방패장식인 네 발을 구부리고 앉은 자세의 황금 사슴이 1897년 쿠반의 코스트롬롬스카야 고분에서 발견되었다(유물12). 동물모양의 여러가지 양식화樣式化된 像은 스키타이 미술의 상징이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새로운 고고학 조사들이 거의 매년마다 북부코카서스와 쿠반강유역에서 이루어져 왔으나 우크라이나에서의 발굴은 매우 드문바 그것은 이 지역의 대부분의 고분들이 벌써 도굴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1912년과 1913년에 드네프르강 좌안左岸의 니코폴 근방에서 솔로하(Solokha) 고분의 발굴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고분의 묘실중 하나는 도굴이 안되었으며, 기원전 4세기대에 그리스 장인匠人이 제작한, 전투중인 스키타이인들이 조각된 그 유명한 황금빗이 바로 이곳에서 발견되었다.(유물54)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과 더불어 이 지역에서의 고고학 발굴은 우크라이나공화국의 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 의해 이루어진다. 1954년, 기원전 4세기대의 고분이 멜리토폴(Melitopol)시 근방에서 발굴되었는데 활과화살을 함께 담는 통인 고리투스(Gorytus)가 출토되었다. 고리투스의 디자인은 체르톰닠, 일리네츠카야와 옐자베토프스카야 무덤들에섶발견된 고리투스와 동일한 거푸집으로 만들어졌다.
스키타이 무덤의 발굴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한층 강화되었는데 300여기의 고분들이 이 기간에 우크라이나 공화국 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여러 곡학팀들에 의해 조사되었다.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모두 키예프의 古代裝飾博物館에 수장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북부코카서스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발견된 스키타이 유물과 유적들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로 기원전 6세기로 추정되는 모든 유물들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고학자들은 차츰 서쪽으로는 다뉴브강에서부터 동쪽으로는 몽골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지역에서 많은 문화요소들이 서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스키타이 양식의 많은 동일한 물품들이 엄청난 거리로 떨어진 유적들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들의 대부분은 마구류馬具類와 그 장식들인바, 그것은 그 당시 말이 장거리 여행의 주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유사성類似性은 또한 개인 장신구 뿐만 아니라 청동살촉, 쇠단검과 다른 무기류武器類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문화접촉은, 소위 스키타이동물양식으로 알려진, 싸움중인 동물의 빈번한 묘사(動物鬪爭文)에 의해서도 증명되어진다.
유목족遊牧族들 사이의 연계는 기원전 8세기대에 시작되는, 原스키타이(Pre-Scythian) 期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투바 공화국 아르잔(Arzhan)고분의 발굴에서 우크라이나와 불가리아에서 발견된 바 있는 가장 이른 페르시아 카펫트보다도 2세기나 빠른 페르시아 직물편織物片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그 당시의 상황이 먼 지역간의 접촉이 유지되도록 허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대체로 모든 부족들에 공통적인 가축기르기, 특히 장거리간 이동을 가능케 한 말기르기의, 유목遊牧 형태에 기인한다. 유목민 간의 빈번한 상호교환으로 그들은 광물鑛物과 주석朱錫 같은, 부족한 금속 원료를 상호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亞州 동쪽과 서쪽간의 부족들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명백하게 없었다. 문화적 요소들은 확실히 한 부족 집단에서 이웃한 집단으로채용되고 지나갔지만 그 과정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고 집단들 자신들도 이 문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잘 무장된 그리고 극히 이동적인 스키타이 騎馬人- 유능한 弓士들과 용감한 戰士들-은 이웃들에 끊임없는 위협을 주었다.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인들이 킴메르인과 나란히 아시아 소국들을 침략하고 그중 일부를 정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들 유목족들이 곧 그들의 본거지와 모든 접촉이 끊어졌다는 헤로도투스의 견해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헤로도투스가 기록한 스키타이의 아시아소국 침략은 최근 고대문서들과 고고학 증거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오리엔트 지방에서 킴메르인의 출현은 기원전 8세기 중엽 앗시리아 척후병에 의해 처음으로 기록되었으며, 스키타이인들은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네베의 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토제금판土製金板에 기록되어 있듯이, 기원전7세기경에 처음 이 지역에 나타난다. 스키타이인들은 앗시아아에 대한 공격에 참가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기원전 616~609년동안 재위在位한 바빌로니아왕 네보폴랏사르(Nebopolassar)의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다. 트랜스코카서스와 반(Van)湖의 옛 우라르티아(Urartia)왕국의 중심지역에 있던 기원전7세기대의 우라르티아 성채의 발굴로 많은 종류의 마구, 청제무기와 구슬 따위를 찾아내었다. 모양과 양식에서 유물들은 드네프르江과 북부코카서스 근방의 고분들에서 발견된 것들을 연상시킨다. 반湖 북쪽의 무덤에서는 다량의, 명백한 스키타이 양식의 동촉銅鏃이 발견되었다.
스키타이와 고대 오리엔트 문화간의 교류의 증거는 1947년에 이루어진 서북이란의 지비예(Ziwiyeh)에서 발견된 고고학유물의 분석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유물들 중에는 장식면에서, 고대 오리엔트(우라르티아)양식의 요소들과 스키타이 미술의 특징이 결합된 것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분명한 스키타이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에서 오리엔트 영향이 보여 지는 것들도 있는데 켈레르메스와 멜그노프 古墳에서 나온 금제 칼집과 자루가 있는 쇠단검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고고학자들은 종종 스키타이 미술의 기원을 스키타이인들의 소아시아 침입과 결부시킨다. 물론 그들의 체류가 스키타이문화에 대한 근동미술의 강한 영향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나 동물양식의 요소들은 시베리아와 볼가강 유역에서 발견된 이른 시기의
유물들에서도 관찰되어지고 있다. 이제는 알려진 바와 같이, 우랄산맥 주위와 돈강과 볼가강가의 초원지대에는 스키타이와 유사한 문화를 지닌 유목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도 그들을 사로마티아인(Sauromatian)으로 불렀으며 아마 십중팔구는 그들이 스키타이 세계와 東카자흐스탄 종족들 사이의 중개자로서의 역활을 하였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기원전 6세기 초의 칠리크타 무덤에서 발견된 네 발을 꿇고 앉은 수사슴 형상의 목제 화살통을 덧씌운 금제 장식판이 그 유력한 증거이다(유물 93-94). 파지리크와 바샤다르 무덤군에서 출토된 발견품에 의해서 증명되듯이 이러한 접촉은 카자흐 스텝지대를 거쳐 알타이산맥까지 퍼졌다. 이들 무덤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자료들은, 永久結氷帶의 형성 덕분에 나무, 뼈, 펠트, 가죽, 금속 유물들이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과학적 미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러한 모든 유물들은 알타이 문화가 중국, 페르시아 및 스키타이문화와 연계되었음을 증명한다. 파지리크 무덤에서 나온 기원전 6세기경의 유물들은 현재까지 발견된 最古의 중국 비단 직물과 대형 페르시아 카펫트 그리고 수사(Susa)朝 아케메니드(Achaemenid)궁전의 유약바른 타일로부터 모사한 디자인이 있는 페르시아 직물편들을 포함한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키타이 문화재 컬렉션은 주로 드네프르강 상류와 북부코카서스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관람자로 하여금 스키타이와 그들의 동, 서, 남족 이웃들 사이에 존재한 복잡한 관계의 전체적인 범위를 볼 기회를 제공한다.
1970년에 동물머리 모양의 은제 장식판이 있는 트라키아(Thracia : 발칸반도에 있던 고대 유목)의 굴레 세트가 코미나 모길라(Khomina Mogila)고분에서 발견되었다. 반면, (아케메니드期의) 페르시아 기원의 유명한 유물인 호화스럽게 장식된 금제 검자루가 체르톰닠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약시 특기할만한 것은 칠형제塚의 4호분에서 출토된 날개달린 야생염소 형태의 은제 각배(角杯)이다. 많은 아케메니드 도장들이 흑해 북안과 북부코카서스에서 발견되었다. 타만 반도의 볼샤야 블리츠니차 무덤은 近東産의 두 미술품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자를 죽이는 왕이 묘사된 아케메니드期의 玉髓製 도장과 이집트 베스신(추한 얼굴과 깃털과 야자잎으로 머리장식을 한 난장이)의 머리형상을 한 토제 護符이다. 수호신으로 여겨져 온 베스像은 많은 이집트 匠人들이 아케메니드 시기에 페르시아로 강제 이동되어 그들의 호신을 그곳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지역에 도달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집트 물품들은 우라르티아 센터를 통해, 그리고 기원전6세기경부터는 그리스 식민지, 특히 밀레투스 시의 식민도시를 통해 스키타이 영토로 도달하였다. 갑충석으로 만든 많은 양의 이집트 호부護符들은 나일 델타의 나우크라티스의 밀레투스에서 제작되고 다시 스키타이로 수출되었다. 그리하여 스키타이 땅에서 발견되는 숱한 유물들은 스키타이인들의 동유럽과 근동, 극동지방의 다양한 문화들과의 광대한 접촉을 상기시켜 준다. 이와같이 동서를 연결하는 문화적 왕래의 광범위한 채널은 기원전 1천년기 중반까지 성공적으로 작용하여 이후 유명한 실크로드(天山北路)로 전환되었다.
실크로드는 16세기까지 존재하면서 지중해 東岸부터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황하유역 그리고 한반도까지 이어진다. 후에 주된 무역로는 남쪽의 海路로 바뀌게 된다. 소아시아 제국들과의 강한 연계는 고도로 발달된 문화와 예술을 접할 수 있어 스키타이인들에게는 필수적이었다. 에르미타주박물관의 스키타이 컬렉션(기원전7~3세기)은 수많은 귀금속의 걸작품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당시 장인들의 높은 수준의 솜씨를 보여줄 뿐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 극동과 서유럽 사이의 광대한 지역에 살고 있었던 많은 부족들 민족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 본문은 "Scythian Art" (1988, Aurora Art Publishers, Leningrad)의 서론을 번역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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