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심산 노수현 필 신록도(心汕盧壽鉉筆新綠圖)

鄕香 2010. 2. 17. 16:39

 

 이 그림은 크기 . 주제 . 구도 . 화법을 바탕으로 볼 때 1925년 무렵의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비단 네 폭을 붙여 제작한 것으로 현존하는 심산의 작품 가운데 제일 큰 대작이라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청록산수화로서 초록색조가 거대한화면을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신록이라는 화제 . 서구적인 투시법을 적용시킨 구도 . 입체감을 살린 화법 등이 실경산수의 근대적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특정지역을 사생한 것은 아니지만 철저한 투시원근법을 적용하여 현실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화미술회에서 배워오던 화보풍을 떠나 치밀한 세밀 묘사에 의존하는 작품으로 그의 초기 모든 특성이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구성면에서 스케일이 大觀的 구도와 치밀한 묘사법, 청록의 색감은 북종화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산악을 용필 중심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은 노수현 특유의 화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관적 구도에 부분 부분은 섬세하고 치밀하게 표현되었으며, 새싹이 피어나는 나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하얀 꽃들, 푸르스름한 안개사이로 첩첩이 보이는 산봉우리는 새로운 감각과 개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록도(新綠圖)

 朝鮮19~20世紀 / 盧壽鉉 1899 - 1978 / 絹本彩色 /1925년경作縱 203 × 橫 311cm / 高麗大學校博物館

 

 호는 심산(心汕).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서 컸다. 보성소학교를 거쳐 1914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그해 최초의 민영 화가양성소인 서화미술회 강습소 화과(畵科)로 옮겼다. 동급생인 이상범·최우석과 함께 안중식·조석진으로부터 관념산수 중심의 그림수업을 받았고 1918년 졸업 후에도 안중식의 경묵당에서 계속 공부했다. 1920년 이상범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 벽화를 제작했고 1921년 동아일보사에 들어가 삽화와 만화 등을 그렸다. 그해부터 열린 서화협회전람회에 해마다 참여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도 1922년 1회부터 1932년 11회까지 출품했다.

1922년 이상범·변관식·이용우 등과 함께 전통회화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동연사(同硏社)를 만들었고, 1924년 이상범과 함께 100여 점의 작품으로 2인전을 열었다. 조선일보사로 직장을 옮겨 삽화와 만화를 계속 그렸으며, 1940년 10대가전에 참여했고, 심산화숙을 세워 1948년까지 제자를 길러냈다. 일제가 전시체제를 강화해가던 1942년 화필보국(畵筆保國)이라는 취지로 결성된 조선남화연맹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조선미술건설본부 동양화 부위원장을 지냈고 1948~61년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학과 교수로 일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이래 1960년 9회까지 계속 관여했으며, 1961년 국전 기구가 개편되자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71년 김은호·박승무·이상범·변관식·허백련과 함께 서울신문사 주최 6대가전에 참여했다. 서화미술회에서 수업을 받을 때와 1920년대초까지는 정형화된 관념산수를 그렸으나 동연사 활동에 참여한 1923년 이후 근대적인 창작방법을 보였다. 실재하는 산수를 합리적인 원근법에 바탕하여 묘사하는 근대적 조형관을 보임으로써 근대 동양화단에 실경산수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이는 그뒤 심산화숙과 서울대 미술대학에서 양성된 후진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