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호생관 최북 필 영모도 3점.(毫生館崔北筆翎毛圖)

鄕香 2010. 2. 5. 15:03

 

최북(崔北, 1712 ~ 1760)은 조선 숙종 . 영조 때의 화가로, 본관은 무주,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삼기재(三奇齋) 또는 호생관(毫生館)인데, 이름인 북(北)자를 반으로 쪼개서 자를 칠칠(七七)로 짓고, 호는 붓[毫] 하나로 먹고 산다[生]고 하여 호생관(毫生館)이라고 했답니다.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훼(花卉), 괴석(怪石), 고목(枯木)을 두루 잘 그렸는데 특히 산수와 메추리를 잘 그려 최산수(崔山水), 혹은 최순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필법이 대담하고 솔직하여 구애(拘碍)받은 곳이 없었으며 남화(南畵)의 거장인 심사정(沈師正)과 비길 만한 인물입니다. 한 눈이 멀어서 항상 반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으며 성질이 괴팍하여 기행(奇行)이 많았고 폭주가이며 여행을 즐겼습니다. 그림을 팔아 가며 전국을 주유(周遊),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외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친 일도 있습니다. 칠칠거사(七七居士)로 알려진 많은 일화(逸話)를 남긴 위인으로 시에도 뛰어났으며 49세로 서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이 梅鳥圖는 매화나무의 굵고 짤막한 나무줄기가 화면의 위쪽으로 부터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급하게 구부러져 끊어지고 이 나무줄기로부터 몇 개의 작은 가지들이 꽃을 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수직으로 뻗어 내려간 가지에 고개를 틀어 균형을 잡으려는 듯 억지로 매달려 있는 새의 모습은 화면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 넣어 줍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거운 구성 요소가 화면 상반부에 몰려 있어 하반부의 대범한 여백이 긴장감을 어느 정도 이완시키고 여유를 찾아주는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메추라기 그림은 대개 一角構圖로 약간 경사진 지면에 한쪽으로 새를한두 마리 배치하고 갈대잎, 난초잎 또는 수선화 잎을 몇 개, 혹은 이 그림의 국화처럼 조그만 식물을 곁들여 둔채 새의 형태와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도록 합니다.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수록된 北宋의 화가 趙昌의 '순도 鶉圖 '나 徽宗皇帝에게 傳稱되어 오는 메추라기 그림들이 모두 이와 같은 구도를 보입니다.

최북이 그린 이 작품도 이와 같은 전형적인 구도와 화면구성 요소를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세밀한 공필의 메추라기와 몰골법으로 묘사된 갈대잎과 국화가 대조를 이루며 최북의 기량을 한 것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오른쪽의 여백을 향하여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메추라기의 시선을 따라 공간이 화면 밖까지 확대되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이 그림은 두 마리의 게와 수초가 서로 얽혀 화면의 중심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흐트러져 있는 담묵의 수초와, 한 마리는 담묵, 다른 한 마리는 농묵이 주조를 이루도록 묘사된 게들의 모습이 적절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수초의 꾸브러진 잎과 게의 꾸브러진 다리가 거의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몰골법의 호방한 필치를 보여 작은 그림이지만 힘이 가득 찬 인상을 줍니다. 화면의 왼쪽 아래 부분에 '崔北'이라는 주문방인과 '七七'이라는 白文方印이 연이어 찍혀 있습니다.  

 

 영모도(翎毛圖)

 朝鮮18世紀 / 崔北(1712~1786) / 絹本淡彩 / 各 縱 24 × 橫 18.3 cm /高麗大學校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