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회화(繪畵)

현재 심사정 필 초충도첩(玄齋沈師正筆草蟲圖) 皴

鄕香 2010. 2. 5. 09:41

 

심사정은 다양한 양식이 구가되던 18세기 화단에서 明의 吳派와 元末四大家 등의 여러 화법을 연구하고, 나중에는 강한 墨法의 절파화풍을 융합시킵으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창출하여 결국 조선남종화를 이룩하는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화가입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화가이자 비평가였던 姜世晃이 심사정의 그림에 대해 " 明代 沈周의 화법을 받아들여 처음에는 披麻皴을 썼고, 때로는 米法의 大混點을 활용하다가 중년 이후에야 斧劈皴 을 시작하였다."고 비평한 글과 같이, 심사정은 대체로 산수화에 치중하였지만, 못 그리는 그림이 없었고, 그 중에서도 花卉草蟲을 제일 잘 그렸다고 평가되기도 합니다. 수묵담채로 그린 심사정의 화훼초충도는 여러 점이 남아 있어 담백하고 깔끔한 그의 花格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 「초충도첩」은 대상의 윤곽이 없는 몰골 형식으로 채색만을 이용하 여 꽃과 나비, 들쥐 따위를 그려내고 있어 소박한 정서를 잘 드러낸 佳作이라 하겠습니다. 이중에 바위와 花蝶을 한 폭에 그린 4번 째 그림은 서울대박물관 소장 심사정의 <초충도>와 筆儀가 같아 연구 대상이 될 만합니다. 관지가 없는 채로 각 폭에는 '玄齋'를 朱文方印으로, 그의 字인 ' 叔'을 白文方印으로 하여 상하로 圖書하였습니다.

 

  

 

  

 

 

 현재심사정필초충도첩(玄齋沈師正筆草蟲圖)

 朝鮮18世紀 / 沈師正(1707~1769) / 紙本淡彩 / 各 縱 16.3 × 橫 10.7 cm /高麗大學校博物館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본관은 청송. 자는 이숙(頣叔), 호는 현재(玄齋)·묵선(墨禪). 아버지는 문인화가 정주(廷胄)이다. 증조부 지원(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인 익창(益昌)이 과거부정사건을 저지른 데 이어 왕세자(나중에 영조) 시해 음모에 연루되어 극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1748년(영조 24)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의 감동(監董)으로 추천되었으나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파출(罷出)되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 자질을 지녀 스스로 물상을 그리고 현상을 만들 줄 알았으며, 20세 전후하여 정선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소론계(少論系)의 김광수(金光遂)·이광사(李匡師)·김광국(金光國)과 남인계(南人系)의 강세황(姜世晃) 등과 교유하며 남종화풍의 조선화(朝鮮化)에 크게 기여했다. 영모·화훼·초충(草蟲)·운룡(雲龍) 등 각 분야에 능숙했으며, 특히 산수를 잘 그려 정선과 함께 겸현양재(謙玄兩齋)로 손꼽혔다. 초기에는 정선의 화풍에 토대를 두고 황공망(黃公望)과 심주(沈周)를 비롯한 원말사대가와 오파(吳派)의 남종화풍을 두루 섭렵하면서 이 화풍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 진수를 터득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마를 통하여 요체를 체득한 다음 50대에 이르러 강하고 거친 묵법(墨法)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 중기의 절파(浙派) 화풍을 융합시켜 중국과는 구별되는 특유의 한국적 화풍을 이룩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진경산수를 다루면서 눈에 보이는 실제의 경관을 초월하여 내재된 자연의 본질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융합시켜 새롭게 이상화된 산수화를 묘출함으로써 우리 산천의 이념화를 구현했다. 이밖에 영모·초충 등에서도 명대(明代)의 화법을 토대로 자신의 화풍을 이룩했다. 정선과 함께 영조연간 최고의 대가로 손꼽혔던 그의 이러한 화풍은 최북(崔北)·김유성(金有聲)·이인문(李寅文)·이방운(李昉運) 등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1747)·〈파교심매도 奢芋荒巳踪μ(1766), 개인 소장의 〈경구팔경도 京口八景圖〉(176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