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 유물(百濟遺物)

백제 불교 . 불상 (佛敎 . 佛像造刻)

鄕香 2009. 11. 10. 22:56

불교(佛敎)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인도에서 출생하여 성불한 석가모니상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佛, 菩薩, 天 등 불교의 예배 대상 전체를 이릅니다.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500여 년 간은 석가모니의 표현 대신 불탑, 수레바퀴(法輪), 연꽃, 보리수, 佛足 등과 같은 불교의 상징물로써 부처의 像을 대신하였습니다. 기원 후 1세기 무렵 대승 불교의 성립과 함께 석가모니는 초월적인 존재로 신격화되어 성불하기전 왕자의 모습을 모델로 한 보살상과 성불한 여래상의 두 예배상이 비로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현재의 불상은 인도 서북부의 간다라(Gandhara : 지금의 파키스탄 지방)와 석가모니가 설법했던 갠지스강 유역의 마투라(Mathura)지방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부처(Buddha)를 如來라고도 합니다. 여래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칙이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머리 위에 육계(肉)가 솟아 있고 몸에는 가사를 착용합니다. 반면 보살상은 윗몸에는 天衣와 아래의 군의(裙衣)를 입고 있으며, 머리 위로는 보관을 쓴 채 몸에는 화려한 영락(瓔珞)과 각종 장신구를 착용한 貴人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성불하기 전의 왕자의 신분이었음에서 착안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밖에도 불교 세계를 수호하는 天의 무리와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 및 여러 나라에서 숭앙받든 고승들의 모습을 조각으로 표현한 십대제자상, 나한상(羅漢像)등이 이에 속합니다.  

 

백제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한성을 도읍으로 하던 침류왕 원년(384년)으로 東晋에서 온 마라난타(摩羅難陀)로부터 불교를 전해 받고 이듬해 漢山에 절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구가 전혀 남아있지 않아 그 성격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475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뒤부터 백제는 본격적인 대가람을 건립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공주지역에는 대통사를 비롯하여 서혈사, 남혈사, 동혈사, 수원사 등의 사찰이 활발하게 건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웅진지역에서는 본격적인 불교미술이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불교 금속공예품인 경우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에 보이는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과 참신한 조형감각 등을 통해 당시의 높은 수준을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백제는 사비로 천도한 해에 새로운 국제 질서의 동반자였던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며 이어 노반박사 . 와박사 . 화공 등을 직접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일본 최초의 사원인 아스카데라(飛鳥寺)가 건립되는 기초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로써 동아시아 역사상 梁과 백제 및 일본이라는 수평적 질서와 문화적 친연성이 뚜렷이 나타나게 됩니다. 한편 무왕대에는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여 호국사찰인 彌勒寺를 건립하게 됩니다. 미륵사와 같은 대규모 가람의 건립은 강력한 왕권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제는 막강한 고구려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그 꿈을 펴지도 못한 채 곧 파국을 맞이하고 맙니다. 

백제불상에는 삼국시대 불상조각의 모든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삼국시대 불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는 6세기 말부터 도교의 영향으로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7세기 전반의 불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또한 신라는 불교의 공인이 늦었기 때문인지 6세기대의 불상이 매우 희소합니다. 반면 백제에는 본격적으로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하는 6세기부터 멸망 직전까지의 모든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1928년 남혈사지(南穴寺址)에서 소형의 금동보살입상이 수습되었다고 전하지만, 아직까지 웅진에서는 초기의 불상이 발견되지 않아 그 전모를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조각사의 공백기라 할 수 있는 5세기대에 유행했던 백제의 불상 역시 중국 北朝의 초기 불상 형식인 선정인여래좌상(禪定印如來坐像)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예가 서울 뚝섬에서 발견된 소형의 금동여래좌상이지만 아직까지 수입된 중국 불상인지, 국내 作인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초기의 선정인여래좌상 형식은 6세기에 이르러 군수리 출토 납석제여래좌상으로 대표되는 상현좌(裳懸座)형식의 선정인여래좌상으로 계승됩니다.   

백제조각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조형성은 세련되고 온화한 분위기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그것은 얼굴 표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서산의 마애삼존불이나 부여 군수리의 절터에서 나온 납석제 여래좌상에서 보듯이 백제불상의 사람의 얼굴입니다. 백제불상의 얼굴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어떤 정형이 없고 제각기 달라 훨씬 인간적인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백제인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예배상의 이미지는 백제지역의 풍토성, 곧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능선과 온화한 기후와도 연관이 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독립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 집보주 관음보살상(執寶珠 觀音菩薩像), 독특한 구도의 서산 마애삼존불, 태안 마애삼존불 등은 백제의 불교 신앙이 민중 속에 널리 퍼져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대개 주불(主佛)에 종속되거나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백제에서는 독립적인 조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隨代에 이미 반가사유상이 소멸되지만 백제에서는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에 걸쳐 크게 유행하여 반가사유상에 대한 신앙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적인 예배 대상으로 가장 많이 조성된 것 중의 하나가 관음보살상으로 흔히 보관의 화불을 그 표지로 합니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관음의 도상적 특징이 확립되기 전에 양 손으로 보주를 받든 이상적인 모습의 관음보살상을 창안하였습니다. 이러한 보살상은 중국에서는 찾기 어려운 한국적인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백제에서만 나타납니다. 백제에 이르러 신체 조형성을 획득한 반가사유상과 백제에서 창안된 집보주 관음보살상은 일본의 아스카시대 불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 일본 고대 조각의 기초를 이루게 됩니다. 

 

백제에서는 서산 마애삼존불과 태안 마애삼존불과 같은 특이한 형식의 삼존불이 조성되었습니다.

전자는 본존 여래입상의 우협시로 집보주 보살입상을 좌협시로 반가사유상이 배치되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후자는 집보주 보살상을 본존으로 삼고 좌우에 여래상을 배치한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살은 여래보다 크게 나타낼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삼존형식의 중앙에 관음보살을 둠으로써 관음신앙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삼존불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없는 것으로, 이것은 불교신앙의 체계고 백제 나름으로 전개되어 갔음을 의미합니다.

 

서산 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百濟 7世紀 / 瑞山 龍賢里  /高 280cm/

 

백제 불상의 특징은 재료에서도 뚜렷이 드러나는데 화강암 석불을 제작한 것이 그것입니다. 화강암은 그 내구성 때문에 불상의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경도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표면처리 방법이나 조각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러한 화강암 석불은 인도나 중국과 달리 백제인 스스로 착안하고 개발한 것으로 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백제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7세기 전후에 조성된 태안 마애삼존불과 서산 마애삼존불로, 이들은 초기적인 경직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생동감과 양감을 지니고 있어 화강암의 조각기법을 완숙된 경지를 보여줍니다.

 

태안 마애삼존불(泰安 磨崖三尊佛)

 

 

한편 금동불은 대부분이 사비도성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화강암 석불은 모두 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신라의 화강암 석불은 백제보다 늦게 시작되었지만 수도 경주에 밀집되어 있어 대비가 됩니다. 백제 최대의 석불인 익산 연동리의 석불좌상은 부여가 아닌 익산에 위치하며,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2구는 백제말기인  7세기중엽 경에는 전라북도 정읍지역에까지 조성범위가 확대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백제의 불상은 삼국 말기인 7세기에 접어들면서 조형적으로 뚜렷한 변화를 보입니다. 公州 儀堂과 부여 규암에서 출토된 금동제 관음보살상이 대표적으로 지금까지의 정신성을 강조하던 엄격한 정면 관조상에서 벗어나 늘씬한 신체와 율동적인 자세를통한 외형적인 형태미로 변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충남 청양에서는 너비가 2.5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陶製 불상대좌가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무왕 후반기와 의자왕대의 지나치게 호사스럽고 난숫했던 백제문화의 단면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반적인 예술 사조의 흐름으로 보면 분명히 이례적이라 하겠습니다. 백제 말기인 7세기 전반에서 중엽 사이에 조성된 일련의 불상들은 일반적인 예술 사조에서 흔히 나타나는 말기적인 현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오히려 더 난숙해지고 규모도 커집니다.        

 

 

납석제불좌상(蠟石製佛坐像)

百濟 / 扶餘 軍守里 寺址 /寶物 제 329號 /高 13.5cm/ 國立扶餘博物館 

 

 금동불좌상(金銅佛坐像)

百濟 / 扶餘 규암면 新里 /高 5.5cm/ 國立扶餘博物館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百濟 / 公州 儀堂 /國寶 第247號 /高 25.0cm/ 國立公州博物館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

百濟 / 扶餘 軍守里 寺址 /寶物 제 330號 /高 11.2cm/ 國立扶餘博物館 

 

 금동광배(金銅光背)

百濟 / 扶餘 扶蘇山城  /寶物 제 329號 / 俓12.6cm/ 國立中央博物館 

 

 정지원명 금동삼존불입상(鄭智遠銘 金銅三尊佛立像)

百濟 / 扶餘 扶蘇山 /寶物 第196 號 /高 8.5cm/ 國立扶餘博物館 

 

 금동일광삼존상(金銅一光三尊像)

百濟 / 扶餘 扶蘇山 /高 6.4cm/ 日本 東京博物館 

 

 

납석제불좌상(蠟石製半跏思惟像片)

百濟 / 扶餘  扶蘇山 /高 13.9cm/ 國立扶餘博物館 

 

 금동제판불(金銅佛)

百濟 / 全北 金堤 /高(右上) 6.4cm/ 國立全州博物館 

 

 금동보살반가상(金銅菩薩半跏像)

百濟 / 傳 公州寺址石塔內 /高 16.3cm/ 日本 東京博物館 

 금동방형대좌 반가사유상(金銅方形臺座 半跏思惟像)

傳 百濟 / 寶物 제 331號 / 高 28.5cm/ 國立中央博物館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觀音菩薩立像)

百濟 / 扶餘 규암면 /國寶 第293 號 /高 21.1cm/ 國立扶餘博物館 

 

 

 

백제불상(百濟佛像)

백제불상은 그 표정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세련된 조형성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활발하고 역동적인 감각이나, 신라의 경직되고 둔중한 조형 감각과는 다른 뚜렷한 특징입니다. 그 중에도 가장 두드러진 면은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흔히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고졸의 미소라 하겠습니다. 또한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서산 마애삼존불의 협시보살상 등에서 보이듯이 보주를 양 손으로 감싸 받들고 있는 봉지보주형(捧持寶珠形)의 관음보살상이나 서산 태안 마애삼존불과 같이 中尊과 좌우협시불을 각각 독립적으로 배치하여 삼존불로 조성한 형식은 백제만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화불과 화염문을 조화있게 시문한 高式의 배머리평 광배를 가진 익산 연동리 석조불, 방형의 대좌에 좌우 대칭으로 부드럽고도 정제된 옷주름이 표현된 부여 군수리출토 납석제불좌상, 청양 도제불상대좌의 표현 등은 백제불상의 뛰어난 조형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편, 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보살입상, 서울 삼양동 출토 금동보살입상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와한 신체와 화려한 영락, 미숙한 三曲의 자세 등 사실성과 화려함이 강조된 중국 隨 . 唐의 영향이 느껴지며 이러한 형식은 통일 신라로 이어집니다.  

 

 

 

 

 

參考資料 : 國立博物館 特別展示圖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