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 유물(百濟遺物)

백제 화장묘 (火葬墓)

鄕香 2009. 11. 10. 17:44

 

火葬墓는 불교식 葬法에 의해 주검을 화장한 뒤 남은 유체를 그릇에 담아 묻는 것을 말합니다.

佛敎의 전례와 함께 삼국시대 墓葬文化로 수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 화장묘는 부여지방의 도성부근에서 몇 예가 알려져 있는데,

삼국시대 고분이 도성이나 산성 외부에 조성되는 것과는 달리 도성내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화장묘에 사용된 용기는 모두 뚜껑이 있으며, 납골용기는 단경호, 완, 발 등으로 나뉩니다.

短頸壺는 평저에 견부가 발달하고 구연부가 직립한 형태의 회청색경질토기로 표면에 무늬가 있는 경우 타날문이 시문되어 있고 뚜껑의 꼭지는 보주형 . 단추형이며 부여 軍守里 . 雙北里 출토품이 있습니다. 盌을 이용한 경우는 뚜껑의 꼭지는 보주형이며 완에는 매우 낮은 굽이 있는데, 뚜껑과 완을 합치는 위치를 선각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터기는 사비시대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회색토기와 동일한 器形으로 보입니다. 

鉢은 일상생활에 사용하던 토기를 轉用한 것으로 뚜껑으로 사용된 蓋杯의 杯身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묘의 매장형태는 풍화암반토를 용기가 들어갈 공간만큼 파내고 주변에 별다른 보호시설 없이 묻었으며, 부장품으로는 부여 쌍북리에서 나온 開元通寶가 있습니다. 개원통보(621년 鑄造)는 唐 武帝 때  처음 만든 동전으로 화장묘의 축조시기 및 토기의 연대를 살피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화장묘는 승려만이 사용했던 묘제는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백제는 불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삼고 있었던 만큼 불교를 신봉하던 귀족집단 내부에서도 화장의 풍습이 존재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당시 엄격한 도성제가 시행되던 사비도성 안에 무덤을 조영하였다는 것은 화장묘의 피장자가 산당 정도의 권위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백제 화장묘는 정치 . 문화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사비시기에 승려 . 귀족사회에서 사용된 묘제로 일본과 활발한 교섭을 통해 나라(奈良)시대 화장묘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도관(陶棺)

百濟 / 公州 마암리 / 長 68.0 cm/ 

 

 골호(骨壺)

百濟 / 瑞川 둔덕리 . 扶餘 軍守里 /高(右) 19.4cm/ 

 

와관(瓦棺)

百濟 / 羅州 복암리3號墳/長(左)62.9cm/ 國立文化財硏究所

 

 

 뼈단지(骨壺)

百濟 / 扶餘 雙北里  /高 20.2cm/ 

 

 뼈단지(骨壺)

百濟 / 扶餘 地域  / 高(右) 21.2cm

 

 

 

 

 

 參考資料 : 國立博物館 特別展示圖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