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百濟時代)/백제 유물(百濟遺物)

백제 시유토기(施釉土器)

鄕香 2009. 11. 10. 16:08

 백제 사비도읍기에 접어들면 백제토기에 있어서 일대 혁신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한성도읍기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수입된 중국청자 또는 중국 鉛釉陶器의 영향으로 비로소 백제 특유의 施釉土器가 출현하게 됩니다. 한반도에서 시유토기는 적어도 4~5세기경에 고구려에서 제작되기 시작하였지만 그 제작전통은 백제 . 신라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제에서는 중국과 교류에 의해 수입된 중국도자기와 연유도기의 제작기법을 백제토기에 적용시켜 백제 특유의 시유토기를 창출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백제지역에서는 나주 복암리 1호분에서 출토된 鉛釉托盞, 綠釉紡錘車, 부여 금성산 출토 綠釉器臺, 능산리寺址 출토의 綠釉甁片, 관북리유적 출토 녹유완, 녹유병편, 부여 정림사지 출토의 녹유소조불두, 쌍북리요지 출토 綠釉土器片, 익산 미륵사지 출토 녹유수막새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나주 복암리 1호분에서 출토된 녹유가 발린 연유탁잔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과 器形이 흡사할 뿐만 아니라 반출된 토기들도 6세기 전 . 중엽의 공주 도천리고분에서 출토된 소형유개호와 유사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어 백제시유토기의 성립이 웅진도읍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편적인 자료이기는 하지만 백제 시유토기의 첫 출현 형태는 중국 황갈유 연유계통 도기를 모방하여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후 사비도읍기에 이르러 봄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웅진도읍기로 편년되는 대구 달서 고문출토의 유개동완이나 진주 옥봉 출토의 유개탁잔토기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 경주출토의 녹유토기탁잔도 웅진 또는 사비도읍기에 신라지역으로 전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와 같은 시유토기들은 그 출토유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추정 왕궁지, 陵.寺 국가적 대사찰 등 백제왕실과 관련되는 유적 또는 지방의 유력자무덤에 한정되어 출토되고 있어, 당시로서는 일부 상류귀족층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고급 용기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일반 민중들은 여전히 토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녹유연화문연목기와(綠釉蓮花文椽木瓦)

百濟 / 益山 彌勒寺址  / 俓 15.0 cm/        

 

 녹유연호문장경호(綠釉蓮弧文長頸壺)

百濟 / 傳 全南地方出土  / 高 cm/ 日本 東京博物館        

 

 녹유병(綠釉甁)

百濟 / 당진 구룡리  / 高 19.7 cm/         

 

 녹유기대(綠釉器臺)

百濟 / 扶餘 陵山里  / 高 17.5 cm/ 國立扶餘博物館        

 

 녹유탁잔(綠釉托盞)

百濟  / 羅州 복암里1號  / 俓20.7 cm/ 全南大學校

 

 녹유방추차(綠釉紡錘車)

 百濟  / 羅州 복암里1號  / 俓 6.6 cm/ 全南大學校      

 

 녹유토기편(綠釉土器片)

百濟  / 順天 검단산성 . 扶餘 陵山里寺址  / 長(左) 18.3 cm/ 順天大學校 . 國立扶餘博物館        

 

 녹유토기편(綠釉土器片)

百濟  / 扶餘 동남里  / 長(右) 10.2 cm/ 忠南大學校

 

 

 

 

 

參考資料 : 國立博物館 特別展示圖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