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역대 왕릉

조선국 제 4대 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영릉)/世宗大王·昭憲王后 沈氏(英陵)

鄕香 2009. 7. 4. 09:16

  

『세종영릉산비(신도비) 世宗英陵山碑(神道碑)』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로 56 (청량리동 산1-157)

 

이 신도비는 세종대왕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문종2년(1452년에 세운 비석이다. 

예종 1년(1469) 영릉을 경기도 여주로 옮기면서 서울 영릉에 있었던 신도비와 석물을 묻었다 숙종17년(1691)과 영조14년(1738)에 영릉 신도비가 노출되었는데, 논의 끝에 다시 묻어 두었다. 1974년 옛 영릉터를 발굴하여 비신과 이수를 발견하였으나 비석 받침돌인 귀부(龜趺 :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는 찾지 못하였다. 1999년 2월에 귀부를 제작하여 그 위에 비신(碑身)과 이수(蛦首)를 다시 세웠고 2004년 6월에 비각을 건립하였다. 

 

 

 《신도비 앞면 神道碑 前面》

비석 표면이 자연 풍화로 거의 떨어져 나가고 소수의 글자에 의하면 비문을 지은 정인지와 글씨를 쓴 이용의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이수(蛦首 : 머릿돌)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마주보며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으로 정교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이수 바로 밑 가운데에 윗면을 뿔각을 세운 사각형의 공간 안에 世宗英陵山碑 전서(篆額 : 전서체로 쓴 머리글자)로 쓴 전액이 확인된다.   

 

 

《 世宗大王神道碑 譯文》 1

 

세종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의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며 태종太宗의 세째 아드님이요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이시다. 태조6년(1397년) 4월10일 출생, 태종8년(1408) 충령군(忠寧君)에 初封되시고 태종12년(1412) 충령대군(忠寧大君) 진봉進封되시고 태종18년 戊戌年(1418)6월 왕세자에 책봉冊封되셨고 그해 8월8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셨다. 왕은 총명하시어 평생 학문에 열중하여 재위 32년간에 4군 6진을 개척 여진을 평정하고 대마도 정벌과 활자를 제조하는 등 정치, 경제, 과학, 문화, 군사 분야에서 역사에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이 깊은 문신을 모아서 국조오례 삼강행실치명요람,역대병요자치통감훈의 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셨다. 특히 우리나라 고유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시고 이로써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의 가사를 직접 지었으며 중국글자의 음을 바로 잡기위하여 동국정운을 편찬하게 하셨다. 또한 도량형 농법으로 농사를 장려하셨고 천문학에 관심을 기울여 측우기 등 각종 천문실측기계들을 제작하여 흠경각에 비치하였으며 이에 관한 문헌으로 침정내의편을 편술하셨다. 악기인 종과 경을 새로 만들어 음악의 표준을 세우고 정간보를 창안하여 아악을 정리하는 등 국악의 기틀을 바로 잡으셨다. 한편 불교의 다섯 종파를 禪宗과 敎宗으로 정리한 것은 종교정책의 혁신이었다. 국경을 북으로 개척하여 두만강 방면에 6진을 설치하고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을 새로 두어 여진족 야인을 평정하여 북방국경을 확장하셨고 대마도를 정벌하여 위세를 떨치셨다. 재위 32년째인 경오년(庚午年1450년) 2월17일 54세로 승하하시어 광주 헌릉의 서쪽 언덕 소헌왕후 능에 합장하였다. 다시 예종1년(1469년) 현재의 영릉(驪州) 으로 옮겼다.          (조선왕실선원세보에 근원 함)

 

《세종대왕신도비 뒷면 世宗大王神道碑 後面》

 

《 世宗大王神道碑 譯文》2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는 태조4년(1395년)에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과 삼한국대부인 안씨(三韓國大夫人 安氏)의 장녀로 출생하셨다. 태종8년(1408년) 충령군과 혼례를 올리고 敬淑翁主에 封해지셨고 태종 17년(1417년)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지셨다, 태종18년(1418년) 6월 충령대군이 왕세자에 책봉 됨에 따라 敬嬪에 봉해졌으며 그해 8월 태종의 양위로 충령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중전(中殿)이 되어 恭妃에 책봉되셨다. 세종14년(1432) 제도 개편에 따라 왕비와 세자빈에게 미칭을 붙이던 제도가 폐지되어 공비에서 왕비로 改封되셨다. 세종28년(1446년) 3월24일 수양대군 저택에서 승하하셨다. 시호諡號는 소헌昭憲이시다. 왕후가 인자하고 어질고 성스럽고 착한 것이 천성에서 나왔는데, 중궁에 정위한 뒤로는 더욱 스스로 겸손하고 조심하여 빈잉(嬪媵)을 예(禮)로 접대하고,아래로 궁인이 미치기까지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은혜를 가하지 않음이 없으며, 후궁이 나아와서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위로하고 용납하는 것을 가하며, 만일 상감께서 총애하신 자는 특별히 융성한 대우를 주어, 지극한 정[至情]이 사이가 없으며, 낳으신 여러 아들을 모두 후궁으로 하여금 기르게 하시니, 후궁이 또한 마음을 다하여 받들어 길러서 자기 소생보다 낫게 하였으며, 또 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고 맡기시니, 후궁이 또한 지성껏 받들어 순(順)히 하여 감히 게을리 함이 없었다. 이 때문에 빈(嬪)·잉(媵)이하가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부모 대접하듯이 하였다. 서출의 자식 보기를 모두 소생 아들과 같이 하였으며, 어선(御膳)이 나오면 반드시 몸소 살펴보아 힘써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국모로 있은 지 29년 동안에 경계(儆戒)의 도움이 있고, 연안(宴安)의 사사(私事)가 없었으며, 한 번도 친척을 위하여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또 절대로 바깥 일에 참여하지 않고, 비록 궁중에서 날마다 쓰는 자디잔 일이라도 반드시 위로 들리어 감히 임의로 하는 일이 없었다. 여기서 '선인제성宣仁齊聖'의 존호尊號는 文宗 代에 올려졌다.  (조선왕실선원세보에 근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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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영릉》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세종대왕·소헌왕후 영릉 / 世宗大王·昭憲王后 英陵》

세종28년(1446)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시자 현 서초구에 위치한 헌릉과 인릉 경내 인릉 자리에 영릉을 조성하였고, 이때 세종의 능자리도 미리 마련하였다. 1450년 세종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이곳에 합장하여  영릉은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가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예종 1년(1469) 현재의 자리로 능을 옮겼다. 현재의 석물은 모두 예종 대에 능을 옮기면서 새로제작한 것으로 영릉 본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 12지 문자를 새겼다. 혼유석은 2좌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조선 전기 합장릉에 보이는 특징이다. 

 

〈금천교禁川橋〉

홍살문 앞에 있으며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어구御溝 또는 금천禁川이라 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닿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안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풍수지리에 따른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온 땅의 기운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紅箭門 ·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여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제관祭官들이 능을 찾아 왔을 때 절을 하는 판위版位가 옆에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서 능을 향해 절을 하고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參道라 한다. 

 

 

참도參道는 향도(香道)와 어도(御道)로 구분되어 있다. 가운데 높은 길은 혼령이 다니는 향도香道라 하며 돌아가신 선왕先王의 혼령 즉 위패를 받들고 가는 제관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고 낮은 돌길은 제향祭享을 올릴 임금이 걷는 길이다. 

 

 

〈정자각丁字閣〉

祭禮 때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그 까닭이 있다. 

 

 

《세종대왕(世宗大王》

세종대왕(世宗 1397-1450, 재위1418-1450)께서는 태종대왕과 원경왕후 셋째 아드님으로 태종8년(1408) 충령군(忠寧君)에 봉해지시고 태종12년(1412) 대군에 봉해지셨다. 태종18년(1418) 큰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시자 왕세자로 책봉되셨고 두 달 후 태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셨다. 재위기간 동안 고유한 문자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셨고, 대마도를 정벌하셨으며 4군 6진을 개척하여 북방 국경을 확장하셨다. 또 천문과 역법, 금속활자와 인쇄술, 도량형 농법 등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고, 음악과 의례를 정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1395-1446)께서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따님으로 1408년 세종대왕과 혼인하셨고 세종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왕비로 책봉되셨다. 태종대왕의 외척세력 견제로 인해 세종 재위 초반에 친정이 화를 입었고 본인도 왕비 자리에서 물러날 뻔 했으나 세종대왕의 보호로 무사하셨다. 세종과 사이에서 8남(문종, 세조, 안평, 임영, 광평, 금성, 평원, 영응대군) 2녀(정소, 정의공주)를 두셨다. 

 

(정자각 뒤에서 바라본 세종대왕 능침)

 

 

병풍석이 생략된 봉분 하나에 바로 난간을 둘렀는데 조선조 최초로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으로 혼유석은 둘이지만 장명등과 그 밖에 석물들은 하나의 봉분의 법식을 갖추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1397-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의 능침 전경이다. 상계上階에는 봉분封墳과 12支 문자가 각 방위마다 새겨진 난간석欄干石과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각 2쌍二雙과 望柱石1쌍, 나란히 놓인 혼유석魂遊石 二個가 자리하고, 그 아래 中階에는 가운데 장명등長明燈과 그 좌우에 문인석文人石이 석마와 함께 배치되었고 하계下階 좌우에 무인석이 석마와 함께 배치되었다. 

 

 

중계中階 좌측에 배치돤 문인석文人石과 그 왼쪽左側 일보一步 뒤에 석마石馬가 배치되어 있다. , 

 

 

중계中階 우측에 배치돤 문인석과 말, 

 

 

하계下階 우측에 배치配置된 무인석武人石과 그 오른쪽右側 일보一步 뒤에 석마石馬가 배치되어 있다. , 

 

 

하계下階 좌측에 배치配置된 무인석武人石과 그 왼쪽左側 일보一步 뒤에 석마石馬가 배치되어 있다. , 

 

 

망주석望柱石

혼령이 외유하고 돌아올 때 찾아들기 쉽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오곡장五曲墻 뒤에서 바라본 세종대왕능침陵寢 정경情景,

 

 

〈세종대왕 표비世宗大王 標碑〉(前文) 

 

朝鮮國

世宗大王英陵

昭憲王后祔左

 

 

 

〈세종대왕 표비 음기 世宗大王 表碑 陰記〉

世宗壯憲英文睿武仁聖孝大王 洪武三十年丁丑四月十日誕生 永樂十六年戊戌受禪 景泰元年庚午二月十七日昇遐 六月葬于廣州 獻陵西岡 成化五年 己丑三月六日 移葬于驪州西北城山子坐之元 在位三十二年壽五十四 皇朝賜諡莊憲

妃宣仁齊聖昭憲王后沈氏 洪武二十八年乙亥九月誕生 永樂十六年戊戌冊封敬嬪 尊進封恭妃 宣德七年壬子改封王妃 正統十一年丙寅三月二十四日昇遐 七月葬于 獻陵西岡 己丑三月六日移葬 與 大王陵同原 壽五十二 

崇禎紀元後一百十八年乙丑 立

 

〈음기 陰記〉 (풀이 글 譯文)

조선국 세종대왕영릉 소헌왕후부좌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은 홍무 30년인 정축년(태조 6년 1397) 4월10일에 탄생하셨다. 

영락 16년 무술년(태종 18년 1418)에 선위 받으시고, 경태 원년인 경오년(세종32년 1450) 2월17일에 승하하시어 6월에 광주 헌릉 서쪽 능선에 모셨다가 성화 5년인 기축년(예종1,1469) 3월6일에 여주 서쪽 북성산 자좌(북쪽을 등진 방향) 언덕으로 옮겨 모셨다. 재위는 32년이셨고 향년은 54세이셨다. 명나라에서 '장헌'이라는 시호를 보냈다.  

비 선인 제성 소헌왕후 심씨는 홍무 28년인 을해년(태조4년,1395) 9월에 탄생하셨다. 영락 16년인 무술년(태종18년, 1418)에 경빈으로 책봉되셨다가 이윽고 공비로 봉작이 오르셨고 선덕 7년인 임자년(세종14년,1432)에 왕비로 고쳐서 봉해지셨다. 정통 11년인 병인년(세종28년, 1446) 3월24일 승하하시어 7월에 헌릉 서쪽 언덕에 모셨다가 기축년(예종1년, 1469) 3월6일에 세종대왕의 능에 함께 모셨다. 향년 52세이셨다.

숭정 기원후 118년인 을축년(영조21년, 1745)에 세우다.  

 

 

 

세종대왕 비각(世宗大王 碑閣)

 

 

〈수라간水剌間〉

산릉제례山陵祭禮 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

 

 

〈수복방守僕房〉 

수릉관(守陵官 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守僕 : 능의 잡다한 일을 하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 

 

 

〈영릉 재실 / 英陵 齋室〉

홍살문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건물로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종9품)과 령(종5품) 등이 지내던 집으로 제향을 올릴 때는 제관들이 머물며 제향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던 집이다. 재실은 집무실인 재실(재방),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향대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재실이 소실되어 1970년대 성역화 사업 때 현 위치에 三門과 행랑, 재방 안채만 복원되었다. 현재 원래의 재실이 본래의 위치에 복원되어 있다. 

 

 

행랑채行廊- 솟을대문 좌우로 늘어선 것은 노비방奴婢房, 각종 광(곳간庫間), 마구간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촬영 2009년 7월,  2023년 2월 사진보충,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