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대왕·헌릉/太宗大王·獻陵》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 (헌인릉 내)
獻陵은 조선 제3대 태종(太宗1367년 6월 21일, 음력 5월 16일 - 1422년 6월8일, 음력5월10일)과 왕비 元敬王后 閔氏를 모신 陵이다.
태종은 高麗 恭愍王 16년(1367)에 이성계(李成桂1335-1408)와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年 陰9月~1391年 陰 9月23日)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함흥 귀주동에서 탄생하셨다.
고려 우왕9년(1383년)문과에 급제하고 창왕 원년(1383년)에 이색(李穡)의 서장관으로 명나라 수도 남경을 방문하셨다. 태조 1년(1392년) 정몽주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 조선이 건국된 직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지셨고 태조3년(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보낼 것을 요청하자 다시 남경을 방문하여 외교현안을 해결하셨다.
그러나 태조의 繼妃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1356年7月12日~1396年9月15日)가 개국공신 정도전 등과 합세하여 계비 태생의 어린 이복동생이 세자에 책봉되고 권력을 잡는 등에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며 이후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둘째 형 이방과 (李芳果1357~1519)를 왕위에 올리셨다. 2년 후 定宗 2년(1400)에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오르셨다. 중앙국정체제와 지방제도, 군사제도, 토지 조세제도, 신문고 설치 호패법의 실시 등 제도를 정비하셨고, 주자소를 설치하여 서적을 간행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한편 무예를 숭상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셨다. 재위 18년(1418) 世宗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太上王으로 지내다가 세종 4년(1422)에 56세로 돌아가셨다. 묘호는 太宗, 시호諡號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諱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이시다.
元敬王后 閔氏(1365-1420)는 驢興府院君 민제閔齊의 따님으로 고려 공민왕 14년(1365)에 태어나셨다
1382년 이방원과 결혼하셨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靖寧翁主에 봉해지셨고
定宗 2년(1400)에 태종이 왕세자로 冊封되시면서 貞嬪에 책봉되셨고 11월에 태종이 즉위하시자 靜妃가 되셨으며, 世宗이 왕위에 오르자 厚德王大妃가 되셨고 세종 2년(1420) 7월10일 56세로 수강궁 별전에서 승하하셨다.
태종과 사이에 4남 4녀를 두셨는데, 4남은 讓寧大君, 孝寧大君, 忠寧大君(世宗), 誠寧大君, 4녀는 貞順公主, 慶貞公主, 慶安公主, 貞善公主이시다.

〈신도비각神道碑閣〉
신도비각에는 1424년(세종6년) 에 세운 신도비(神道碑: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21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세종65년에 세운 신도비면은 풍화작용으로 剝離되어 글자를 거의 확인할 수가 없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太宗 獻陵 神道碑〉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는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조선 왕조의 왕권을 다졌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李芳遠1367~1422) 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종6년(1424년)에 비문을 새겨 세운 것이다.
비문은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지었고, 글씨는 성개(成槪 ?~1440)가 썼으며, 전액(篆額 : 전서체로 쓴 머리글자)은 권홍(權弘1360~1446)이 썼다. 신도비에 세겨진 글씨는 조선 초기의 서예 문화와 그 경향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의 귀부(龜趺 :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훼손되었고 비면은 오랜 풍화로 박리되어 비문을 알아보기 어렵다. 이수(蛦首 : 머릿돌)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에 명나라 석비 조각 양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석비 전통을 마련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은 귀부를 파손하고 비각을 불질러 碑가 불에 훼손되어 표면이 剝離되고 알아볼 수가 없다. 이에 비문은 왕실선원세보에 근원한다.

『조선 태종헌릉신도비문 太宗獻陵神道碑文』 (조선왕실선원세보에 근원 함)
太宗獻陵山碑(篆書刻書 머릿글자)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艸書刻書)
正憲大夫藝文館大提學集賢殿大提學知經筵同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臣 卞季良 奉 敎撰
天之將降大任於 有德也必生 聖子 神孫以開景運運以永 洪祚我 朝鮮」 太祖康獻大王之興也以我」 太宗爲子以我」 殿下爲孫噫戱盛矣豈人爲之所能及哉 天也基與商家賢聖君之繼作周家大王王季文武之相承何以異哉臣謹按 璿源 李氏 全之望姓司空 諱 翰仕新羅娶宗姓之女六世而至諱兢休始仕高麗十三而至 皇玄祖穆王入仕元祖而長千夫四 世襲爵咸能濟美元政」 旣衰皇祖桓王還事高麗恭愍王積功仁其來久矣我 神懿王太后以至正丁未五月辛卯誕 太宗于咸興府厚州私第我 太祖之第五子生而神異梢長英譽絶倫好讀書學日進年 未冠中 高麗科第時政散民離國勢抗隍慨然有濟世之志 太祖愛之異諸子嘗」
태종헌릉산비(전서체 머릿글)
유명증시공정조선국태종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헌릉신도비명(초서새김)
정헌대부예문관대제학집현전대제학지경연동지춘추관사겸성균관대사성신 변계량 봉 교찬
천지장강대임어 유덕야필생 성자 신손이개경운운이영 홍조아 조선」 태조강헌대왕지흥야이아」 태종위자이아」전하위손희희성의기인위지소능급재 천야기여상사현성 군지계작주가대왕왕계문무지상승하이이재신근안 선원 이씨 지망성사공휘한사신라취종성지여육세이지위긍휴시사고려십삼이지 황현조목왕입사원조이장천부사 세습작성능제미원정」 기쇠황조 환왕환사고려공민왕적공누인기기래구의아 신의왕후이지정정미오월심묘탄 태종우함흥부후주사제아태조지제오자생이신이초장영여절륜호독서학일진년 미관중고려과제시정산민난국세항황개연유제세지지 태조애지이제자상」
以書狀官偕侍中李穡朝 京師累官至密直司代言洪武辛未九月 神懿王太后薨盧于齊陵之側欲終三壬申春 太祖西行구疾而還來侍湯藥恭讓之臣乘隙謨傾勢甚急 太宗應機制變討除架魁群謨瓦解秋七月與諸將相 倡以大義推戴 太祖化家爲國封」 靖安君甲戌夏」高皇帝命遣親男入祖 太祖以我 太宗通經達禮最賢諸子 卽遣應 命旣至敷秦稱 旨憂禮 賜還戊寅秋八月太祖不豫權臣明家聚黨有欲挾幼壇政以肆己志者發斯追 太宗牢辭推尊」
이서상관해시중이색조 경사누관지밀직사대언홍무신미구월 신의왕태후훙노우제릉지측욕종삼임신춘 태조서행구질이환래시탕약공양지신승극모경세심극 태종응기제변토제가귀군모와해추칠월여제장상창이대의추대 태조화가위국봉」 정안군갑술하」고황제명견친남입조 태조이아 태종통경달예최현제자 즉견응 명기지부진칭 지우례 사환무인추팔월태조불예권신명가취당유욕협유단정이사기지자발사추 태종뢰사추존」
恭靖上請 太祖冊封世子以定 宗社九月丁丑 太祖以疾未瘳禪于恭靖建文 庚辰正月逆臣朴苞謨戕同氣陰誘芳幹父子稱兵爲亂 太宗勒軍平之誅苞餘悉釋安直芳幹不廢懿親 恭靖以無嗣且謂開 國定 社皆我 太宗之積冊爲世子冬十有一」
공정상청 태조책봉세자이정 종사구월정축 태조이질미추선우공정건문 경진정월역신박포모장동기음유방간부자칭병위난 태종늑군평지주포여실석안직방간불폐의친 공정이무사차위개 국정 사개아 태종지적책위세자동십유일」
月亦以疾傳位于我 太宗遣使請 命明年辛巳六月建文帝遣通政寺丞章謹等奉誥命印章來封我 太宗爲王冬遣 鴻臚寺行人潘文奎來 錫冕服秩視 親王歲壬午令」
월역이질전위우아 태종견사청 명명년신사육월건문제견통정사승장근등봉고명인장래봉아 태종위왕동견 홍려사향인반문규래 석면복질시 친왕세임오령」
皇帝卽位遣左政丞臣河崙賀 登極 帝嘉忠誠明年癸未四月 賜以 誥印遣都指揮使高得等來 仍封爲王秋遣翰林待詔王延齡來 錫衮冕九章錦段紗羅書籍 太祖錦段紗羅 元敬王太后冠袍錦段紗羅各有差自時厥後 帝賚荐至無虗歲矣歲乙酉」
황제즉위견좌정승신하륜하 등극 재가충성면년계미사월 사이 고인견도지휘사고득등래 잉봉위왕추견한림대조왕연령래 석곤면구장금단사라서적 태조금단사라 원경왕태후관포금단사라각유차자시궐후 제뢰천지무허세의세을유」
以漢陽 太祖所道排群議而還歲丁亥 帝語朝正使臣曰朝鮮國王至誠事大自後每當使臣之至輒稱至誠戊子五月太祖晏駕 哀慕罔極于諒闇喪葬以禮遣使告訃 帝震悼罷朝遣禮部郎中林觀等賜祭大牢贈諡康獻又勅 太宗賜厚賻壬辰冬有以王氏之裔隱於民間者上言攸司請誅之 太宗曰帝王之興自有 天命誅王氏 之後拜我 太祖本意乃 下敎曰王氏之後存者俾之名安生業甲午六月甘露降于咸興府月光仇未理及定平白雲山明年乙未四月甘露又降咸興府德山洞梧東方前古所未有」
이한양 태조소도배군의이환세정해 제어조정사신왈조선국왕지성사대자후매당사신지지첩칭지성무자오월태조안가 애모망극우량암상장이례견사고부 재진도파조견례부낭중림관등사제대뢰증시강헌우칙 태종사후부임진동유이왕씨지예은어민간자상언유사청주지 태종왈제왕지흥자유 천명주왕씨 지후배아 태조본의내 하교왈왕씨지후존자비지명안생업갑오육월감로강우함흥부월광구미리급정평백은산명년을미사월감로우강함흥부덕산동오동방전고소미유」
也政府俱進箋 賀 不受戊戌六月以世子禔敗德 廢之封讓寧大君以我 殿下聦明孝悌好學不惓國人屬望冊封
世子以聞 帝兪允是年八月日禪于我 殿下遣使請 命十有一月我 殿下封冊寶獻號曰 聖德神功上王明年己丑
正月 帝遣鴻臚」
寺丞劉泉等奉 誥命封我 殿下爲王五月對馬島倭犯邊殺掠軍士 命領議政臣柳廷顯及長川軍臣李從茂等以舟師往
討之島倭納款如舊八月 帝遣使賜宴勅書略曰王至誠篤厚祇事朝廷一德一心終始不怠能賢命德俾宗祀有託以副國人之望又賜宴我」
殿下勅書略曰爾父篤厚老成祇敬 天道忠順之誠愈久不替九月 恭靖王卽世 服斬裒終易月之制遣使告訃明年四月帝遣使致祭賜諡恭靖是年春我 殿下率群臣請上 太上王之號 不允秋七月 元敬王太后薨以我 殿下哀毁 過禮 命從易月」
야정부구진전 하 불수무술육월이세자제폐덕 폐지봉양녕대군이아 전하총명효제호학불권국인속만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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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제견홍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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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칙서략왈이부독후노성기경 천도충순지성유구불체구월 공정왕즉세 복참부종역월지제견사고부명년사월
제견사치제사시공정시년춘아 전하솔군신청상 태상왕지호 불윤추칠월 원경왕태후훙이아 전하애회 과례 명종역월」
之制 殿下涕泣固辭乃 命葬後釋服白衣終制九月壬午葬太后于廣州治之大母山陵 曰獻辛丑秋九月我 殿下 奉冊寶獻 太上王之號十月凜 太宗命冊封元子珦爲 世子 太宗以不世之資緝熙聖學孝悌通於 神明誠敬格于宗社事 大則」
지제전하체읍고사내 명장후석복백의종제구월임오장태후우광주치지대모산릉 왈헌신축추구월아 전하 봉책보헌 태상왕지호십월름 태종명책봉원자향위 세자 태종이불세지자집희성학효제통어 신명성경격우종사사대칙」
天子稱其至誠交隣則倭邦服其有道欽 天恤民崇儉節用先 德禮而愼刑罰進忠直而黜奸邪闢異端而禁淫祀酌古今
以定制度昭文敎而嚴武 備積弊悉革而庶績咸凞四境按堵而民安物阜 帝王之道嗚呼盛哉宣其紆帝眷之隆而再獲甘露之 上瑞矣壬寅四月始」
천자칭기지성교린칙왜방복기유도흠 천휼민숭검절용선 덕예이신형벌진충직이출간사벽이단이금음사작고금이정제도소문교이엄무 비적폐실혁이서적함희사경안도이민안물부 제왕지도오호성재선기우재권지융이재획감로지 상서의임인사월시」
不豫越五月丙寅」薨于離宮我 殿下不勝哀痛三日徹膳群臣涕泣請進膳竟 不許定爲三年之喪不用易月之制 太宗春秋五十六歲在王位十有九年居閒頥養五年而弓劍忽遺大小臣僚下至僕隸莫不失聲號哭愈久愈哀如喪考妣嗚呼慟哉 以是年九月初二日丙辰上」
불예월오월병인」훙우이궁아 전하불승애통삼일철선군신체읍청진선경 불허정위삼년지상불용역월지제
춘추오십육세재왕위십유구년거한이양오년이궁검홀유대소신료하지복예막불실성호곡유구유애여상고비오호통재 이시년구월초이일병진상」
尊號曰 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廟號 太宗初六日庚申 合葬于 元敬王后之陵 遺命也及訃聞帝哀慟綴朝特遣禮部郎中楊善等 賜祭其文曰惟王篤厚至誠聦明賢達敬事朝延忠順之心終始下替訃音遠聞良深感悼又賜誥命
諡曰恭定又賜」
존호왈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묘호 태종초육일경신 합장우 원경왕후지릉 유명야급부문제애통철조특견예부낭중양선등 사제기문왈유왕독후지성총명현달경사조연충순지심종시하체부음원문양심감도우사고명
시왈공정우사」
殿下賻厚盖我 太宗功德之盛及我 殿下孝誠之至前後 相承克享 天心故於始終之際寵異之典如此其備至矣 中宮元敬王太后性閔氏驪興世家自高麗門下侍郞平章事文景公 諱令謨六世而至 皇高祖諱宗儒相毅陵位都僉議侍郞贊成事諱忠順忠順生」
전하부후개아 태종공덕지성급아 전하효성지지전후 상승극향 천심고어시종지제총이지전여차기비지의
중궁원경왕태후성민씨여흥세가자고려문하사랑평장사문경공 휘영모육세이지 황고조휘종유상의능위도첨의시랑찬성사휘충순충순생」
皇曾祖判密直司事 諱文順諱頔文順生 皇祖大匡驪興君諱抃大匡生 皇考純忠同德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諡文度諱霽 母宋氏封 三韓國大夫人高麗重大匡礪良君諱璿之女積善流慶是生淑德聦慧異常將筓擇配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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嬪于我 太宗 小有濟世之志留心經史不事家産 太后能儉於治家謹於主饋以勉其功敎誨多男俾循義方禮遇妾侍
克盡婦道洪武壬申封 靖寧翁主戊寅 太宗定社之際勢甚孤危 太后盡心輔賛以濟大事庚辰春封 貞嬪其年冬太宗卽位」
빈우아 태종 소유제세지지유심경사불사가산 태후능검어치가근어주궤이면그공교회다남비순의방례우첩시극진부도홍무임신봉 정녕옹주무인 태종정사지제세심고위 태후진심보贊이제대사경진춘봉 정빈기년동태종즉위」
封 靜妃永樂癸未 帝賜冠袍自是年至丁酉累受 帝賜凡六戊戌冬我 殿下獻號曰 后德王大妃庚子九月上諡 元敬王太后春秋五十六歲 太后禀幽閑貞靜之德克配 太宗 以專內治二十年間壺儀肅穆又誕 聖子主宗社以享」
봉 정비영락계미 제사관포자시년지정유누수 제사범육무술동아 전하헌호왈 비덕왕대비경자구월상시 원경왕태후춘추오십육세 태후품유한정정지덕극배 태종 이전내치이십년간호의숙목우탄 성자주종사이향」
榮養及 薨嬪媵妾侍莫不盡心悲痛 婦則母儀其至矣乎誕四男四女我 殿下居三長卽禔 次曰補封孝寧大君次曰種封誠寧大君先卒女長貞順公主下嫁淸平府院君李伯剛非一李也次慶貞公主下嫁平壤府院君趙大臨次慶安公主下嫁吉昌君權跬亦先卒次貞善公主下嫁宣山君南暉」
영양급 훙빈잉첩시막불진심비통 부칙모의기지의호탄사남사녀아 전하거삼장즉제 차왈보봉효령대군차왈종
봉성령대군선졸여장정순공주하가청평부원군이백강비일이야차경정공주하가평양부원군조대임차경안공주하가길창군권규역선졸차정선공주하가선산군남휘」
懿嬪權氏生一女貞惠翁主適雲城君朴從愚昭惠宮主盧氏生一女幼信寧宮主辛氏生三男七女男長䄄封恭寧君餘幼女長貞信翁主適鈴平君尹季童次貞靜翁主適漢原君趙璿次淑貞翁主適日城君鄭孝全餘皆幼宮人安氏生一男三女皆幼金氏生一男裶封敬寧君高氏生一男崔氏生一男一女李氏生一男金氏生一女皆幼我
의빈권씨생일녀정혜옹주적운성군박종우소혜궁주노씨생일녀유신녕궁주신씨생삼남칠녀남장인봉공녕군여유녀장정신옹주적령평군윤계동차정정옹주적한원군조선차숙정옹주적일성군정효전여개유궁인안씨생일남삼녀개유김씨생일남비봉경녕군고씨생일남최씨생일남일녀이씨생일남김씨생일녀개유아
中宮恭妃沈氏門下侍中諱德符第四子溫之女誕四男二女男長卽 世子餘皆幼讓寧娶金漢老之女生三男一女皆幼孝寧娶前判中軍都摠制府事鄭易之女生四男皆幼誠寧娶前全羅道都觀察使成抑之女無子貞順公主生一女適龍驤侍衛司護軍李季暽亦非一李慶貞公主生四女長適敦寧府丞安進次適幼學金仲淹餘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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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安公主生二男長聃娶漢城小尹鄭淵之女次幼貞善公主生二男一女皆幼敬寧娶戶曹恭議金灌之女生二男皆幼恭寧娶兵曹參判崔士康之女生二女皆幼臣竊觀我 太宗之盛德降功固己高出於百王之上矣而 配匹之賢內助之功又有可與蜀塗辛摯同符而儷美者矣群臣咸願刻銘于 陵之 神道碑昭示永世 殿下以命臣季良承 命祗慄不敢辭謹拜手稽首而獻獻銘曰天眷海東降我 太宗亹亹太宗盛德在躬推戴 聖父克集大功乃觀 帝庭敷秦從容優荷 睿恩保我黎元炳幾靖亂 嫡長是尊雖値(門+臾)墻 友愛猶惇孝悌之至從古罕聞維 德之厚惟 功之懋 天鑑孔昭式申保佑煌煌金寶輝暎前後 帝誥荐臻恭惟我」
경안공주생이남장담취한성소윤정연지녀차유정선공주생이남일녀개유경녕취호조공의김관지여생이남개유공녕취병조참판최사강지녀생이녀개유신절관아 태종지성덕강공고기고출어백왕지상의이 배필지현내조지공우유가여촉도신지동부이려미자의군신함원각명우 능지 신도비소시영세 전하이명신계량승 명지율불감사근배수계수이헌헌명왈천권해동강아 태종미미태종성덕재궁추대 성부극집대공내관 제정부진종용우하 예은보아여원병기정난 적장시존수치(문+유)장 우애유돈효제지지종고한문유 덕지후유 공지무 천감공소식신보우황황전보휘영전후 제고천진공유아」
太宗大王聖德神功卓冠前古春秋未高傳畀 聖子方溕優閑備享榮養而弓劍忽遺 我 殿下哀毁盡禮越五月合葬于 元敬王太后之 獻陵遵治命也 陵在廣州治之西大母峰下乾亥之山乾坐巽向北距京城三十許里謹按山來自長白山而南踰數千里至尙州之俗離山折而西北又數百里至果川之淸溪山又折而東北負漢江而止是爲大母山坤靈停峙淑氣蜿蜓噫
天作地藏以待 園陵之吉兆歟 殿下命卽 陵之巽方六十三步樹之豊碑以記 德美垂耀來今又名序次開國定社佐命功臣姓名刻諸碑陰臣 竊 惟自古王者之作必有名世之臣應 時而出弼成大業於是有紀功宗銘(?)鼎之典所以示不朽傳悠 久也我朝壬申之開
태종대왕성덕신공탁관전고춘추미고전비 성자방몽우한비향영양이궁검홀유 아 전하애훼진예월오월합장우 원경왕태후지 헌릉준치명야 릉재광주치지서대모봉하건해지산건좌손향북거경성삼십허리근안산래자장백산이남유수철리지상주지속리산절이서북또수백리지과천지청계산우절이동북부한강이지시위대모산곤령정치숙기원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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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與夫戊寅庚辰之戡定寶 天所以啓我 太宗以基朝鮮萬億年無疆之祚也然亦將相大臣忘身委質贊襄輔佐之力與有多焉是宜鑴名貞石以示永世後之觀者尙克知我 殿下顯揚 先烈褒奬元勳之至意云嘉善大夫藝文館提學集賢殿提學同知經筵春秋館事臣尹淮拜手稽首謹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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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國功臣」
益安大君 芳毅, 義安大君 李和, 門下侍中 裵克廉, 領議政府事 趙浚, 上洛府院君 金士衡, 安平府院君 李舒, 漢山府院君 趙英武, 宜寧府院君 南在, 西原府院君 韓尙敬, 星山府院君 李稷, 議政府右議政 鄭擢, 漢川府院君 趙溫, 玉川府院君 劉敞, 花山府院君 張思吉, 興寧府院君 安景恭, 驪川府院君 閔汝翼, 平城府院君 趙狷, 興安君 李濟, 寧城 吳思忠, 判三司 尹虎, 鷄林君 金稇, 靑海君 李之蘭, 判漢城府事 鄭熙啓, 延城君 金輅, 宜城君 南誾, 政堂文學 鄭摠, 復興君 趙胖, 興原君 李敷, 東原君 咸傅霖, 漢山君 趙仁沃, 南陽君 洪吉旼, 瑞城君 柳爰廷, 完城君 李伯由, 常山君 李敏道, 知中樞院事 黃希碩, 知中樞院事 金仁賛, 知中樞院事 趙琦, 高城君 高呂, 戶曹典書 趙英珪, 上將軍韓忠,
「개국공신」
익안대군 방의, 의안대군 이화, 문화시중 배극렴, 영의정부사 조준, 상락부원군 김사형, 안평부원군 이서, 한산부원군 조영무, 의령부원군 남재, 서원부원군 한상경, 성산부원군 이직, 의정부우의정 정탁, 한천부원군 조온, 옥천부원군 유창, 화산부원군 장사길, 흥령부원군 안경공, 여천부원군 민여익, 평성부원군 조견, 흥안군 이제, 영성 오사충, 판삼사 윤호, 계림군 김곤·청해군 이지란, 판한성부사 정희계, 연성군 김로, 의성군 남은, 정당문학 정총, 부흥군 조반, 흥원군 이부, 동원군 함부림, 한산군 조인옥, 남양군 홍길민, 서성군 유원정, 완성군 이백유, 상산군 이민도, 지중추원사 황희석,지중추원사 김인찬, 지중추원사 조기, 고성군 고려, 호조전서 조영규, 상장군 한충,
「定社功臣」
益安君 芳毅, 奉寧府院君 李良祐, 義安大君 李和, 領議政府事 趙浚, 上洛府院君 金士衡, 晋山府院君 河崙, 漢山府院君 趙英武, 議政府右議政 鄭擢, 完原府院君 李良祐, 完山府院君 李天祐, 漢川府院君 趙溫, 花山府院君 張思吉, 上黨君 李佇, 靑海君 李之蘭, 鷲山君 辛克禮, 延城君 金輅, 中樞院副事 張哲,
「정사공신」
익안군 방의, 봉령부원군 이양우, 의안대군 이화, 영의정부사 조준, 상락부원군 김사형, 진산부원군 하륜, 한산부원군 조영무, 의정부우의정 정탁, 완원부원군 이양우, 완산부원군 이천우, 한천부원군 조온, 화산부원군 장사길, 상당군 이저, 청해군 이지란, 취산군 신극례, 연성군 김로, 중추원부사 장철.
「佐命功臣」
義安大君 李和, 昌寧府院君 成石璘, 晋山府院君 河崙, 漢山府院君 趙英茂, 星山府院君 李稷, 文城府院君 柳亮, 錦川府院君 朴訔, 議政府左議政 李原, 完山府院君 李天祐, 漢川府院君 趙溫, 沔城府院君 韓珪, 平壤府院君 金承霔, 長川府院君 李從茂, 漢平府院君 趙涓, 㓒原府院君 尹子當, 谷山府院君 延嗣宗, 上黨君 李薆, 完川君 李淑, 靑海君 李之蘭, 吉昌君 權近, 㓒城君 尹抵, 坡平君 尹坤, 鷲山君 辛克禮, 礪山君 宋居信, 長興君 馬天牧, 南陽君 洪恕, 蓮城君 金定卿, 雞城君李來, 豊山君 沈龜齡, 知缺府事 朴錫命, 兵曹判書 李膺, 刑曹判書 李升商, 參判三軍府事 金英烈, 利城君 徐愈, 熙川君 金宇, 麻城君 徐翼, 越川君 文彬,
「좌명공신」
의안대군 이화, 창령부원군 성석린, 진산부원군 하륜, 한산부원군 조영무, 성산부원군 이직, 문성부원군 유량, 금천부원군 박은, 의정부좌의정 이원, 완산부원군 이천우, 한천부원군 조온, 면성부원군 한규, 평양부원군 김승주, 장천부원군 이종무, 한평부원군 조연, 칠원부원군 윤자당, 곡산부원군 연사종, 상당군 이애, 완천군 이숙, 청해군 이지란, 길창군 권근, 칠성군 윤저, 파평군 윤곤, 취산군 신극례, 여산군 송거신, 장흥군 마천목, 남양군 홍서, 연성군 김정경, 계성군 이래, 풍산군 심구령, 지결부사 박석명, 병조판서 이응, 형조판서 이승상, 참판삼군부사 김영렬, 이성군 서유, 희천군 김우, 마성군 서익, 월천군 문빈,
嗚呼茲惟我 太宗恭定大王獻陵也 陵下舊有神道碑中經兵(豩+人)石刻剝落多不可辨認我 殿下卽位之二十年甲戌春二月 祗謁 園寢顧瞻興歎思所以再闡紀德之事乃 命有司伐新石改刊舊文於是設重建廳禮曹工曹官掌其事而董治之越明年乙亥五月工告訖捐吉折舊閣增其簷楹與舊碑並堅焉盖舊卽碑 卞季良所撰 權洪篆其額 尹淮記其陰獨書碑者成姓而其下字缺不知名之爲誰碑文及陰記具載於 列聖誌狀通紀中故今依通紀所載改刊而其或不能無異同者則一從碑刻以存愼重之意嗚呼我 先王化家爲國之烈我殿下奉先思孝之德其自是光于萬代與天無極矣
오호자유아 태종공정대왕헌릉야 능하구유신도비중경병( ? )석각박락다불가변인아 전하즉위지이십년갑술춘이월 지알 원침고첨흥탄사소이재천기덕지사내 명유사벌신석개형구문어시설중건청예조공조관장기사이동치지월명년을해오월공고흘연길절구각증기첨영여구비병견언개구즉비 변계량소찬 권홍전기액 윤회기기음독서비자성성이기하자결불지명지위수비문급음기구재어 열성지상통기중고금의통기소재개간이기혹불능무이동자칙일종비각이존신중지의오호아 선왕화가위국지열아전하봉선사효지덕기자 시광우만대여천무극의
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左副賓客臣朴奉尙 敎記
通政大夫兵曹叅議臣李德成奉 敎書
通政大夫兵曹叅知知製敎臣洪受疇奉 敎篆
자헌대부예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세자좌부빈객신박봉상 교기
통정대부병조참의신이덕성봉 교서
통정대부병조참지지제교신홍수주봉 교전
〈태종헌릉산비太宗獻陵山碑〉 (앞면) 비 前面은 비문이 全面에 가득 채워졌던 것으로 추정 됨〉

〈태종헌릉산비太宗獻陵山碑〉 (뒷면) 비문이 전혀 보이지 않음.

숙종21년(1695년)에 세운 태종헌릉산비 이수(蛦首 : 머릿돌)

《태종 헌릉신도비 역문》
유명 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광 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과 서문
정헌대부 예문관대제학 집현전대제학 지경연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신 변계량이 교서를 받들어 찬하다. 하늘이 장차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신성한 자손을 낳게 하여 큰 운을 열게 함으로써 길이 큰 복을 이어받게 한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 대왕이 일어남에 우리 태종으로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 손자가 되게 했으니, 아, 성대하도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한 일이다.
그것은 상나라 왕실에 현명한 성군이 이어서 일어난 것과 주나라 왕가에 태왕 · 왕계 · 문왕 · 무왕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씨는 전주의 이름난 가문(망족)으로 사공 휘 한은 신라에서 벼슬하셨으며, 신라 종성의 딸에게 장가드셨다. 6世 휘 긍휴에 이르러 비로서 고려에 벼슬했고, 13세 황현조 목왕에 이러러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이 되셨다. 4세에 걸쳐 내리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선대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하였다. 원나라 정치가 이미 쇠하게 되자 황조 환왕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겼으니 공덕과 인덕을 쌓음이 그 유래가 오래이다. 우리의 신의왕태후께서 지정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태종을 함흥부 후주의 사저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시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이었는데, 차츰 자라면서 영명하고 지혜로움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나셨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더니 나이 20세가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셨다.
그때 고려의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흩어져서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웠다. 개탄스런 심정으로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하셨다. 일찍이 서장관으로서 시중 이색과 같이 명나라 서울에 같다 왔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에 이르셨다. 홍무 신미년 9월에 신의왕태후께서 돌아가시니, 제릉 곁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고자 했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가 서쪽 지방으로 행차했다가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을 살피며 시중드셨다. 이때에 공양왕의 신하가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들과 함께 대의를 부르짖으며 태조를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니, 정안군에 봉해 지셨다. 갑술년 여름에 명나라 고황제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하도록 명하니, 태조께서는 우리 태종이 경서에 통하고 예법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했다. 태종이 명나라에 이르러서 황제의 뜻에 맞도록 잘 아뢰었으므로 예우를 받고 돌아오셨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찮으시자 권신들이 붕당을 만들어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하였다. 때문에 화가 곧 닥칠 다급한 상황이었으므로 태종이 기미를 밝게 살펴서 이들을 제거했다. 당시 종친과 당상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했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정종)을 추대하여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왕위를 물려 주셨다.
건문 경진년 1월에는 역신 박포가 태종의 형제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하셨다. 박포만을 주벌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시키는 벌에 처했을 뿐 형제사이의 사랑하는 정을 버리지 않으셨다.
공정이 후사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시킨 일이 다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인하여 우리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고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다음해 신사년 6월에 명 나라 건문제가 통정시승 잔명 등을 보내어 고명과 인장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으로 봉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 반문규를 보내와서 면복을 내리니, 품질이 친왕과 비등했다. 임오년에 지금의 황제 성조가 즉위하였는데 좌정승 신 하륜을 보내어 황제의 등극을 하례하자 황제가 충성을 가상히 여겼다.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 고득등을 보내어 그대로 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 왕연령을 보내와서 곤면 구장과 금단사라, 서적을 내렸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에게는 관포와 금단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내렸다. 이로부터 황제가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 이르러 거르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은 태조께서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에 하례하러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긴다."했는데,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그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 오월에 태조가 승하하니 태종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그지없이 하고, 상차에 거처하면서 상례와 장례를 예에 따라 거행하셨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리자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예부 낭중 임관 등을 보내어 태뢰로써 제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강헌이라고 내렸다. 또 태종에게 칙서를 내리고 후하게 부의를 주었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의 후예가 숨어 있다고 상언이 있자, 담당 관사에서 죽이기를 청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이 일어남은 본디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하고 곧 하교하기를, "살아남은 왕씨의 후예들을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했다.
갑오년 6월에 감로가 함흥부의 월광구미리와 정평의 백운산에 내리고, 다음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에 내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없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이상서로운 일에 대하여 모두 전문을 올려 하례했으나 태종은 받지 않았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제가 패덕하다는 이유로 폐하고 양녕대군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며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명나라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했다.
이 해 8월에 태종이 우리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부왕에게 성덕신공 상왕이라는 호를 올리셨다. 이듬해 기해년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 유천 등을 파견하여 고명을 보내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 유정현과 장천군 신 이종무 등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시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우리나라를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태종에게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왕의 지극한 정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고, 능히 어진이를 고르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묘와 사직을 맡김으로써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했도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도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은, " 경의 부왕이 독후하고 노성하여 천도를 삼가 공경했으니 충순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다."하였다.
9월에 공정왕(정종)이 승하하니 태종이 참최복을 입어 거상기간을 달 대신 날로 계산하는 역월의 상제를 마쳤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렸더니 이듬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치제하고 공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이란 호를 올릴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전하께서 너무도 애통해 하시어 몸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역월의 제도를 따를 것을 명했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시니 장사 지낸 뒤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를 마치도록 하시라고 명했다. 9월 임오일에 태후를 광주의 대모산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헌릉이라고 했다.
신축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고 태상왕이란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께 여쭈어서 원자 향을 세자로 책봉하셨다. 태종은 세상에 드물게 나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학에 밝았고, 효도와 우애는 신명을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사직의 신을 감격시켰다. 사대에 있어서는 천자가 그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고, 교린에 있어서는 왜국이 그 도가 있음에 복종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재용을 절약하셨다. 덕과 예를 앞세우고, 형벌을 신중히 하셨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으셨다. 이단을 물리치고 음사를 금지했으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했으며, 문교를 밝히고 무비를 엄중하게 하셨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혁파하니 모든 일이 다 일신되었고,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물산은 풍성했다. 제왕의 도가 실로 성대하니, 하늘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가 내리는 상서를 얻음이 당연하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5월 병인일에 이궁에서 승하하시니,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않으셨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를 들기를 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삼년상을 행할 것을 정하고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않으셨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시며 19년 동안 왕위에 계셨다. 왕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며 휴양한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대소 신료로부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목놓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과 같이 했다. 아, 슬프다. 이해 9월2일 병진일에 존호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이라 하고, 묘효는 '태종'이라고 했다. 6일 경신에 원경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에 따른 것이다.
명나라에 부고가 알려지자,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를 멈추고, 특별히 예부 낭중 양선 등을 보내와 사제하였다. 그 제문의 대략에, "왕은 독후하고 지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하여, 공경으로 조정을 섬김에 있어 충순한 정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도다. 부음이 멀리서 들리니 실로 슬픈 감회가 깊도다."하고 고명을 내려 시호를 '공정'이라고 했다.
또 전하에게 부의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렸다. 대체로 우리 태종의 성대한 공덕과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서 천심을 잘 받들었기 때문에 시종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했던 것이다.
중궁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이니 여흥의 세가이다. 고려의 문하시랑평장사 문경공 휘 영모로부터 6세를 거쳐 황고조 휘 종유에 이르러 의릉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 시랑 찬성사로서 시호는 충순이다. 충순공이 황증조 판밀직사사 시호 문순 휘 적을 낳았다. 문순공은 황조 대광 여흥군 휘 변을 낳았다. 대광공은 황고 순충동덕찬화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여흥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 시호 문도 휘 제를 낳았다. 모친 송씨는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는데, 고려 중대광여랑군 휘 선의 따님이니, 선을 쌓음으로써 경사가 전해져서 맑은 덕이 있는 태후를 낳게 되었다.
태후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시집갈 나이가 되자 우리 태종의 배필이 되셨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으나, 태후는 검소하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에 부지런하여 태종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서 의를 따르게 하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여 능히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하셨다.
홍무 임신년에 정녕옹주로 봉해지셨다. 무인년에 태종이 사직을 안정하게 할 즈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했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대사를 이루게 했다. 경진년 봄에 정빈에 봉해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에 봉해졌다. 영락 계미년에는 명나라 황제가 관포를 내려 주었는데, 이해부터 정유년까지 모두 여섯 번이나 황제의 하사를 받았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세종)가 존호를 올려 '후덕왕대비'라 하였다. 경자년 9월에 '원경왕태후'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그윽하고 정숙한 덕을 타고나 능히 태종의 배필이 되어 집안 살림에 전심할 수 있었다. 20년 동안 왕비로서의 위의는 엄숙하고, 또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서 종묘의 사직을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승하하기에 이르러 빈과 시첩들이 마음을 다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부인의 도리와 모후로서의 위의가 지극했도다. 4남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셋째이시다. 장자는 바로 제 양녕대군이고, 둘째는 보, 효령대군에 봉해졌다. 넷째는 종이며 성령대군에 봉해 졌는데 먼저 죽었다. 맏따님은 정순공주이며, 청평부원군 이백강에게 시집 갔는데, 동본의 이씨는 아니다. 둘째는 경정공주이며, 평양부원군 조대림에게 시집갔다. 셋째는 경안공주이며 길창군 권규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먼저 죽었다. 넷째는 정선공주이며, 의산군 남휘에게 시집갔다.
의빈권씨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옹주이며, 운성군 박종우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 노씨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령궁주 신씨가 3남7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이며, 공녕군에 봉해졌고, 나머지 두 아들은 어리다.
맏따님은 정신옹주이며, 영평군 윤계동에게 시집갔다. 둘째는 정정옹주이며, 한원군 조선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정숙옹주이며, 월성군 정효전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네 따님은 다 어리다. 궁인 안씨가 1남3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김씨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비이며 경녕군에 봉해졌다. 고씨가 1남, 최씨가 1남1녀, 이씨가 1남, 김씨가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빈 심씨는 문하시중 덕부의 넷째 아들 온의 따님이다. 4남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은 김한로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효령은 전 판중군도총제부사 정역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성령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 성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는 1녀를 낳았는데, 용양시위사 호군 이계린에게 시집갔고 물론 같은 이씨는 아니다. 경정공주는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령부승 안진에게 시집 갔고 둘째는 유학 김중엄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담이며, 한성 소윤 정연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정선공주는 2남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경령은 호조참의 김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공녕은 병조 참판 최사강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신이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종의 성대한 덕과 높은 공이 실로 이미 역대의 제왕을 크게 능가하였으나 배필의 현숙함과 내조의 공이 또한 촉도, 신지와 신표처럼 일치하는 점이 있으니 나란히 기리는 것이다.
많은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에 명을 새겨서 길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니, 전하께서 이 일을 신 계량에게 명하셨다. 신 계량은 명을 받고 나서 조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바칩니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해동을 사랑하여 우리 태종을 내려주시니 부지런히 힘써서 쉬지 않는 태종이여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성부를 추대하여 능히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황제의 조정에 사신가서 조용히 진주하니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우리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형을 높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비록 형제간에 싸움을 만났으나 우에 오히려 도타웠으니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은 전고에 드물었네 오직 덕을 후하게 하고 오직 공에 힘썼으니 하늘의 살핌이 매우 밝아 이에 거듭 보우해 주셨네 빛나는 금보가 찬란하게 비춤에 황제의 고명 거듭 내리니 내 곧 은총을 받았네 선왕의 훈계를 따라 한성에 환도하고 예악을 제작하니 문채가 빛나네 상을 당해 여막에 거처하며 애모가 망극하고 장사와 제사에 옛 법식을 따르셨네.
공손히 명나라를 섬기시니 황제는 그 지성을 칭찬했고 엄숙하게 제사를 받듦에 신명이 감응하였네 교린에 도가 있으니 왜국이 와서 복종하였고 왕씨의 후손을 보살펴 편안히 살도록 했으니 중외가 다스려져 태평하여 억만 년 길이 드리우리 윤택한 감로가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고 어두운 아들 폐하고 덕 있는 아들 명하여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영년토록 향수하여 상왕으로 계시길 기약했더니 어찌 하늘에 오르기를 재촉하여 한 질병이 낫지 않았던가 애달프도다 성자여 슬픔을 비길 데 없어 사흘 동안 수라를 그치고 상심으로 몸이 손상함을 견디지 못했네 거상 중의 모든 절차 오직 예대로 이행하니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사신을 보내 사제했네 시호를 주어 포숭하고 부의를 후헤게 내리니 황제의 조문하는 예가 구비되매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쳤네 엄정하신 태후여 진실로 엄숙하고 화순하니 사직의 안정을 가만히 도와 능히 총명한 성군의 짝이 되셨네 돈독히 성철한 아들 낳아 종묘의 주인되게 하셨네 하늘처럼 굳세고 명철함은 공정왕의 덕이요 땅처럼 후덕하고 유정함은 원경왕후의 법칙이니 살아서는 금실이 좋으시고 죽어서는 같이 장사 지냈네
이 산은 장백산으로부터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수 천리를 넘어 상주의 속리산에 이르고, 여기서 꺾여서 북으로 또 수백리를 달려 과천의 청계산에 이르고, 또 꺾여 동북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 땅의 영기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능의 길조를 기다림인가. 전하께서 능의 손방 63보에 나아가 큰 비를 세워서 덕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빛을지금 세대와 오는 세대에 드리우라 명하하시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하건대, 옛부터 제왕이 일어남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신하가 있어 때에 응하여 나서 대업을 도와서 이루었습니다. 이에 종명이정에 공을 기록하는 법이 있는 것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공을 보여서 영구히 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조정이 임신년에 개창되고 무인년과 경진년의 녀란을 평정한 것은 실로 하늘이 태종에게 열어준 바입니다. 이로써 조선왕조가 억만년 무궁한 복을 누릴 기초를 잡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장상들과 대신들이 몸을 잊고 몸을 바쳐 보좌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영원히 세상에 보여 줌으로써 뒤에 보는 사람이 오히려 능히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빛나는 공을 현양하고 원훈을 포장하신 지극한 뜻을 알았다고 할 것입니다. 가선대부 예문관제학 집현전제학 동지경연춘추관사 신 윤회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기록하다.
「개국공신」
익안대군 방의, 의안대군 이화, 문화시중 배극렴, 영의정부사 조준, 상락부원군 김사형· 안평부원군 이서, 한산부원군 조영무, 의령부원군 남재, 서원부원군 한상경, 성산부원군 이직, 의정부우의정 정탁, 한천부원군 조온, 옥천부원군 유창, 화산부원군 장사길, 흥령부원군 안경공, 여천부원군 민여익, 평성부원군 조견, 흥안군 이제, 영성 오사충, 판삼사 윤호, 계림군 김곤, 청해군 이지란, 판한성부사 정희계, 연성군 김로, 의성군 남은, 정당문학 정총, 부흥군 조반, 흥원군 이부, 동원군 함부림, 한산군 조인옥, 남양군 홍길민, 서성군 유원정, 완성군 이백유, 상산군 이민도, 지중추원사 황희석,지중추원사 김인찬, 지중추원사 조기, 고성군 고려, 호조전서 조영규, 상장군 한충, (40 位)
「정사공신」
익안군 방의, 봉녕부원군 이량우, 의안대군 이화, 영의정부 조준, 상락부원군 김사형, 진산부원군 하륜, 한산부원군 조영무, 의정부우의정 정탁, 완원부원군 이량우, 완산부원군 이천우, 한산부원군 조온, 화산부원군 장사길, 상당군 이저, 청해군 이지란, 취산군 신극례, 연성군 김로, 중추원부사 장철, (17位)
「좌명공신」
의안대군 이화, 창령부원군 성석린, 진산부원군 하륜, 한산부원군 조영무, 성산부원군 이직, 문성부원군 유량, 금천부원군 박은, 의정부좌의정 이원, 완산부원군 이천우, 한천부원군 조온, 면성부원군 한규, 평양부원군 김승주, 장천부원군 이종무, 한평부원군 조연, 칠원부원군 윤자당, 곡산부원군 연사종, 상당군 이애, 완천군 이숙, 청해군 이지란, 길창군 권근, 칠성군 윤저, 파평군 윤곤, 취산군 신극례, 여산군 송거신, 장흥군 마천목, 남양군 홍서, 연성군 김정경, 계성군 이래, 풍산군 심구령, 지결부사 박석명, 병조판서 이응, 형조판서 이승상, 참판삼군부사 김영렬, 이성군 서유, 희천군 김우, 마성군 서익, 월천군 문빈 (37位)
(숙종21년(1695년)에 세운 태종헌릉산비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어 前面의 비문을 알아볼 수 있음.)

뒷모습으로 비문은 없음

碑閣 안 나란히 세워져있는 舊碑와 新碑의 모습.
좌측은 처음 건립된 舊碑는 세종 6년(1424) 에 세웠고, 우측은 肅宗21년(1695) 중건된 新碑이다. 병화로 세종6년(1424년) 건립된 비에 새긴 글씨가 風化作用으로 碑面이 剝離되어 떨어져 나가 글자가 없어지고 알아보기 어려워 숙종21년(1695) 원래의 비 옆에 新碑를 세웠다.

헌릉(獻陵)
헌릉은 조선 3대 태종(太宗1367~1422 · 재위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능이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아버지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400년 왕위에 오른 후 중앙과 지방의 제도를 정비하고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태종 사이에 4남(양녕,효령,충령(세종),성녕) 등 4명의 대군과, 4녀(정순,경정,경안,정선) 등 4공주를 두었다. 1420년 (세종2년)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헌릉에 모셔졌다. 헌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 있고 문 · 무인석이 두쌍이며, 혼유석魂遊石을 바치고 있는 고석鼓石이 태조와 같이 5개인 것이 특징인데 본 사진으로도 확인이 된다.
左로부터 右로 곡장(曲牆)·석수(石獸)·난간석(欄干石)·병풍석(屛風石)·봉분(封墳)
병풍석에 조각된 문양이나 구도 태조 건원릉 능침의 것과 거의 같다.
병풍석에 양각된 무늬 중 하나로 금강령과 금강저 손잡이 부분에 태극문양이 있다.
원경왕후 병풍석입니다. 태종의 병풍석 문양과 同一합니다. 정면 가운데에는 비천하는 보살상이 있고 좌우에는 구름문양이 가득 채워졌으며, 그 위 좁은 공간에는 유실되어 확인 할 수 없지만 12支神像이 아주 작게 새겨져 있고 맨 아래 띠 아래는 덩굴당초문이 있습니다.
금강령 . 금강저 중간 손잡이 부분에 태극문양(陰陽紋)이 있습니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북 모양을 한 둥근 돌 (鼓石)이 5개임이 확인됨.

장명등(長明燈)
왕과 왕비 두 분의 능침 주변 문인석과 무인석 그리고 모든 석물들이 2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능 뒤의 석물들, 다른 릉과 달리 유독 이 陵은 같은 것이 둘씩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측면으로 바라본 태종대왕 능침, 혼유석 밑에 고석 5개가 확인되며 모든 석물이 2쌍을 이루고 있다.

曲墻 뒤에서 바라본 太宗大王 · 元敬王后의 陵寢
〈사적 제194호〉 조선 제3대 임금 태종대왕 · 원경왕후 陵
헌인릉 정문 바깥 우측 길가에 위치한 재실(齋室)
2009년 7월4일 -鄕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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