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조선 역대 왕릉

조선국 태조대왕 계비 신덕왕후 강씨(정릉)/太祖大王 繼妃 神德王后 康氏(貞陵)

鄕香 2007. 7. 23. 10:29

《 신덕왕후 / 정릉 》  서울시 성북구 정릉2동 산87-16번지 

서울 신당동 태생 원조 서울 촌로가 신설동에서 우이신설 경전철을 타고 정릉역에서 내려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마루턱에서 북악스카이웨이로 들어서기 전에 위치한 정릉을 수십 년 만에 찾아 걸어 올라가는 길은 내 젊은 시절 다니던 수림 우거진 오솔길이던 아리랑고개는 그 흔적이라고는 고갯길이라는 것뿐이지 아파트와 크고 작은 건물들이 한 치의 틈새도 없는 도심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를 길을 장님 더듬어 가듯 갈팡질팡 간신히 찾은 곳 정릉이다.

 

 

 출입구에서 들여다본 경내는 오호라! 이제까지의 속세의 풍경과는 다른 선계를 떠올리게 푸르른 신록이 피로를 단숨에 걷어 간다. 

 

 

서울 정릉은 태조대왕 이성계(李成桂)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繼妃 神德王后 康氏 1356-1396)의 능이다.

신덕왕후 강씨는 성산부원군 강윤성의 따님으로 고려의 이름 있는 가문의 출신이셨다. 고려 말 함경도 출신의 무관이었던 태조의 경처(京妻, 고향에 본처를 두고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로서 태조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세력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덕왕후는 1392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자 조선 최초의 왕비(賢妃) 로 책봉되셨고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가며 자신의 둘째아들 방석(의안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왕자의 난과 뒤이은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1396년 (태조5년)에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시호를 신덕왕후라 하고, 능은 한성부 황하방(皇華坊) 현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정릉을 조성하고 자신의 능자리도 그 곳에 같이 만들었다. 

그러나 1408년 (태종 8년)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태조의 뜻과 달리 태조의 능을 현재의 건원릉(구리 동구릉)을 조성하였고, 이듬해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 하여 현재의 자리인 사을한(沙乙閑) 산기슭으로 옮겼다. 옛 정릉에 남아 있던 목재와 병풍석 등 석물은 각각 태평관과 광통교를 짓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태종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아 신주를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정릉은 민묘(民墓) 나 다름없는 모양이었다가 1669년(현종10년)에야 송시열 등의 건의로 신덕왕후는 왕비로 인정받아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되었다. 이후 1899년(광무3년) 황후로 추존되셨다. 

 

(금천교 앞에 서니 이 다리가 선계와 속세의 경계인 것만 같다.)

 

좌측 齋室로 들어서는 길에서 바라본 재실 모습,

 

 

〈정릉 재실 / 貞陵 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陵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그 외 부속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실되었던 정릉 재실은 2012년에 발굴 조사하여 2014년에 복원하였다.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붉은 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홍전문紅箭門 · 홍문이라고도 한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法度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여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는 홍살문이 서 있고 제관祭官들이 능을 찾아 왔을 때 절을 하는 판위版位가 옆에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서 능을 향해 절을 하고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을 참도參道라 한다. 

 

정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따라 한번 꺽인 모습이다. 

 

태조는 조선을 개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1년) 8월에 강씨를 현비(顯妃)에 책봉했고, 1393년 현비의 본향인 곡주를 곡산부로 승격시켰다. 1396년 8월에 현비의 병이 악화되자 거처를 판내시부사 이득분(李得芬)의 집으로 옮기게 했는데, 8월13일에 이득분의 집에서 사망했다. 현비가 사망하자 태조는 통곡을 하고 조회를 10일간이나 정지시켰다. 1396년(태조5년) 9월에 현비의 존호를 '신덕왕후'로 하고  능호를 정릉(貞陵)이라 정했으며, 1397년 1월에 한성부 취현방의 북쪽 언덕에 국장을 지냈다. 1410년(태종10년)에 태조를 종묘에 부묘하면서 신의왕후 한씨는 함께 모셨지만, 신덕왕후 강씨는 부묘하지 않았다. 신덕왕후는 현종 대에 가서야 복권되었는데, 1669년(현종10년) 10월에 현종은 송시열의 건의에 따라 신덕왕후에게 '순원 현경 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라는 시호를 올리고 종묘에 신위를 모셨다. 태조와 신덕왕후 사이에는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두셨다.

 

(정면에서 바라본 정경,)

 

〈 정자각 丁字閣〉

祭禮 때 제물을 진설陳設(차림)하고제례를 드리는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한자의  '丁' 字 모양과 같다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에 따른 것이다.

정릉 정자각 우측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정면으로 보기에 절구 형태의 소전대라는 것이 보이는 데 이는 제사를 지낸 후 축문을 소각하는 시설이다. 이 시설은 태조 건원릉과 태종 헌인릉 그리고 신덕왕후 정릉에서만 볼 수 있다. 

 

 

1397년에 처음으로 조성된 정릉의 위치는 정동(貞洞) 현재 영국대사관이 있는 자리였다. 태조는 정릉을 조성한 다음 그 동쪽에 170여 칸에 이르는 흥천사를 원찰로 세웠는 데, 내관인 김사행(金師行)은 태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건물을 화려하게 지었다. 태조는 정릉을 수호하기 위해 공신이 왕릉을 수호하는 제도를 만들고 개국공신 이서(李舒) 에게 정릉을 수호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릉은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 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 매우 천대를 받았다.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고,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물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또 정릉의 봉분을 완전히 없애고 석인은 땅을 파서 묻도록 하였다. 결국 정릉은 본래의 자리에서 지금의 성북구 정릉으로 옮겨졌다. 오랫동안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여 정릉은 조선 초대 초대 국모의 능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설의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 현재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두 개의 고석만 옛 능에서 옮겨 온 것이고 나머지는 현종 10년(1669)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정릉이 회복되면서 갖춘 것이다. 이에 정릉의 석물은 15세기와 17세기의 석물 양식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지닌 능이라 하겠다. 정자각과 비각 사이로 바라본 정릉 능침,

 

 

신덕황후 강씨는 고려 판삼사사 강윤성의 따님으로 강윤성, 강윤충, 강윤희 형제는 고려 말의 권력자로 세도를 떨쳤고, 강윤희의 아들 康禑는 태조의 伯父인 李子興의 사위가 되어 두 집안이 혼인으로 연결되었다. 신덕왕후의 친정은 태조가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을 개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와 결혼한 상태에서 신덕왕후 강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았는데, 한씨가 고향이 있는 鄕妻라면, 강씨는 서울에 있는 京妻에 해당했다. 신덕왕후는 태조와 결혼한 이후 포천의 철현에서 따로 살림을 차렸는데,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기를 느껴 동북면으로 피신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선 왕릉에서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4개인데, 신덕왕후 정릉의 고석은 좀 크기는 하지만 2개이다. 그 외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그리고 인조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휘릉 등에는 고석이 각각  5개씩이다. 

 

 

정릉에는 병풍석, 난간석, 무인석 등의 석물은 없으며,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친 고석(鼓石)만 옛 정릉의 석물이고 나머지 석호, 석양, 망주석 문인석, 석마 등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만든 것이다.

 

 

장명등은 원래의 자리인 중구 정동의 정릉에서 옮겨 온 것으로 지붕꼭대기(蓋石)에 연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떨어져 나갔다. 화창은 시원스런 맞창이고 옆은 문양없는 민낯이고 화창 받침돌은 앙련(仰蓮)을 음각했다 잘록한 허리 사면에는 세 개의 혜성이 화염을 발산하는 형태가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었으며, 그 아래 받침돌은 복련(覆蓮)이 새겨졌고 그 밑에는 유려한 선으로 꾸민 대각(臺脚)이 표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장중한 모습이다 

 

 

망주석에는 細虎라는 이름의 귀가 표현되었다.

 

 

두 손으로 홀을 받들고 있는 문인석과 그에 딸린 석마가 일보 뒤 우측에 세워져 있다.

 

 

신덕왕후 능침의 전경이다.

 

 

곡장(曲墻) 뒤에서 바라본 신덕왕후 능침(陵寢).

 

 

《 정릉 비문 / 貞陵 表碑文》 (앞면)

 

대한                                  大韓  

신덕고황후 정릉           神德高皇后貞陵

 

 

《 정릉 비문 / 貞陵 表碑文》 (뒷면 글)

順元顯敬神德高皇后 康氏  太祖高皇帝繼后 六月十四  誕生壬申開國冊封  顯妃丙子八月十三日  昇遐丁丑正月葬于漢城皇華坊  太宗己丑二月二十三日  移葬于楊州南沙阿里庚坐之原  顯宗己酉追袝  太廟追上  徽號順元顯敬光武三年己亥十一月追尊恭上  諡號曰  高皇后敬書前面與陰記庸伸小子之微忱焉   光武四年 月 日  

 

《 정릉 표비 음기 / 貞陵 表碑 陰記》 (뒷면 풀이 글)

순원현경 신덕고황후 강씨는 태조고황제의 두 번째 황후로 6월14일에 탄생하셨다. 임신년(태조 1년,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면서 현비로 책봉되셨다. 병자년(태조 5년,1396년) 8월13일에 승하하시어 정축년(태조 6년,1397년) 정월에 한성 황화방에 장사지냈다가 태종년간 기축년(태종9년,1409년) 2월23일 양주 남쪽 사아리 경좌(서남서쪽을 등진 방향)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현종년간 기유년(현종10년,1669년)에 종묘(太廟)에 모시고 '순원헌경'의 휘호를 추상하였고 광무3년(고종36년,1899)기해년 11월에 황후로 추존하여 공손히 시호를 '고황후'로 올렸다. 표석 전면과 음기를 삼가 써서 소자(고종)의 작은 정성을 펼치노라. 

광무 4년(고종37년,1900년) 월 일

 

 

〈정릉 비각/貞陵碑閣〉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정릉 표석은 1899년 (광무3년)에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하고 1900년(광무4년)에 옛 표석을 갈아서 만든 것이다.

 

 

〈수라간水剌間〉

산릉제례山陵祭禮 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

 

 

〈수복방守僕房〉

수릉관(守陵官 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守僕)  능을 돌보는 일을 맡아 보던 일종의 관노비가 거처하던 곳. 

 

 

정릉 情景

 

2023년 5월 20일 - 鄕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