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고구려 유물(高句麗 遺物)

고구려유물이해(高句麗遺物理解)

鄕香 2006. 4. 17. 10:27

 

고구려의 冠帽에는 옛기록이니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모자로서 절풍(折風) · 책() · 관(冠)등이 있습니다.

절풍은 고깔처럼 생겼는데 꼭대기에 새깃을 꽂거나 새깃모양의 금속제 장식을 단 것입니다. 책은 절풍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자가 쓴 것으로 뒷부분이 뾰족하게 솟은 것과 앞으로 휘어진 것이 있습니다. 관은 왕족이나 신분이 높은 자만이 쓴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왕은 백라관(白羅冠), 신하는 청라관(靑羅冠)을 썼다고 되어 있어 색으로 신분의 고하를 구분한 듯합니다. 冠으로는 평양 청암리(淸岩里) 토성과 평양출토의 금동관이 있습니다.

 

청암리에서 출토된 것은 관테 위에 8개의 솟은 장식 세워져 있고 관테 앞의 정면에는 좌우에 드리개가 한개씩 늘어뜨려져 있는

양식입니다. 솟은 장식과 관테는 불꽃무늬(火炎文)와 인동무늬 등이 좌우대칭되게 맞새김수법으로 새겨진것들입니다.

관식은 즙안과 대동군 和盛里고분에서 출토되는데 전자는 절풍모양이고 후자는 반월형의 금동관식입니다.

불꽃무늬맞새김 금동관

평양 청암리 토성/33.5cm/ 

 

과거에 관식으로 소개되었으나 베개모라고 생각되는 진파리 1호분 출토의 '맞새김금동장식판'은 원래 나무바닥판에 비단벌레의  날개를 깔고 가운데에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三足烏)와 봉황. 용을 새겼습니다.

 

이밖에도 출토지가 확실치 않은 금동관장식 중에 관테는 없지만 의성 탑리 무덤 출토 금동관과 경주 황남대총 남분의 은관과 같이 솟을 장식이 깃털처럼 된 것이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절풍모자와 같은 관장식으로 신라지역의 출토품과 상호연관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깃털모양관꾸미개(冠飾)

고구려 지린 성 출토(傳) 길이34.8cm

 

또 다른 하나는 전체모양이 산(山)처럼 된 금동판인데 그 안에 많은 인동문 등을 맞새김하고 앞면에는 원형의 달개를 달아 놓아 관장식으로 생각됩니다.

 

 

금동관장식(金銅冠裝飾) 

고구려/높이10.5cm/

 

 귀걸이에는 가는 고리귀걸이(細環耳飾)와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가 있습니다. 가는고리귀걸이로는 약수리벽화고분에서 나온 것과 평양 부근에서 나온 것이 있고 굵은고리귀걸이는 대동군에서 출토된 것과 평양 만달산록(晩達山麓)7號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귀걸이들은 모두 고리 밑에 샛장식(中間飾)과 드리개장식(垂下飾)이 갖춰져 있는 삼국시대의 전형적인 형식입니다. 특히 약수리 무덤에서 나온 것은 가야계통의 귀걸이와 유사하고 대동군에서 출토된 것은 신라계통의 귀걸이와 비슷하여 장신구를 통한 삼국공예의 비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즙안(集安) 전산자(轉山子)152호무덤에서는 허리띠의 띠꾸미개(銙板) 가 출토되었는데, 이것은 세잎무늬(三葉文)가 맞새김된 방형판에 하트형 드리개가 돌쩌귀로 연결되어 있어 신라쪽 보디는 서진(西晋)의 것과 유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로 볼 때 중국의 것이 고구려로 전파되어 다시 신라지방으로 내려가 신라의 전형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귀걸이 . 꾸미개 . 허리띠장식 . 띠꾸미개)

 

 

 고구려의 신발에는 목이 달린 것과 없는 것의 두 가지가 있는데 모두 앞창이 약간 들리고 코가 도드라진 것들입니다. 출토지 미상의 금동제 신발은 백제 . 신라에서와 같이 바닥에 굵고 긴 못을 박은 것으로삼실총(三室塚)의 벽화에 나타난 무사도(武士圖)를 통해 그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금동제신발)

고구려 /출토지모름/길이34.8cm/

 

철생산기술을 바탕으로 따비, 괭이, 쇠스랑, 낫 등의 논공구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농업생산에 이용되었습니다. 보습은 초기에는 중국 後漢대의 대형보습을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나 차츰 고구려 특유의 모습을 개발하여 농업생산에 이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보습의 예로는 서울 구의동에서 나온 V자 모양의 보습을 들 수 있습니다.

 

 

 무기로는 쇠살촉, 칼, 창, 갈고리 등의 공격용 무기와 투구, 갑옷 등의 방어용 무기가 있습니다. 활로 남아 있는 것은 평양의 영화9년銘 벽돌무덤에서 나온 뼈활이 있는데 이것을 무용총에 나오는 고구려 특유의 '맥궁(貊弓)'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살촉으로는 송곳 . 끌 . 마름모꼴 . 버들잎모양 . 도끼날모양 등이 있으며 고구려의 특징적인 도끼날모양 살촉은 적에게 상처를 크게 주기위해 끝부분을 넓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칼은 민고리자루칼(環頭大刀)도 있지만 세잎고리자루칼(三葉文環頭大刀)도 사용되었으며 그 영향이 남쪽에도 미친 듯합니다. 방어용 무기인 갑옷은 완전하게 남은 것이 없고 다만 비늘조각만이 전하고 있으며, 완전한 모양은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습니다. 투구로는 태천 농오리(籠吾里)산성에서 나온 작은 비늘모양 철판을 이어 만든 투구가 남아 있는데, 가야지역인 합천 옥천M3호무덤에서 나온 금동장(金銅裝)투구와 형태상으로 서로 연결됩니다.

 

 

 말갖춤으로는 집안의 칠성산 96호. 만보정(萬寶汀)78호 . 우산하41호 . 지경동(地境洞) . 법동리(法洞里)무덤 등에서 앞 . 뒤가리개(前.後輪) . 발걸이(鐙子) . 말띠꾸미개(雲珠) . 말띠드리개(杏葉) . 재갈멈치(鏡板) 등이 출토되었고 벽화무덤의 기마수렵도(騎馬狩獵圖) . 전투도(戰鬪圖) 등에서 그 종류와 쓰임새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갈은 재갈멈치의 형태가 원형이나 타원형이며 재갈쇠멈춤이 가로로 영결되어 있고 노는 고리가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한강이남으로 전해져 노는고리가 추가되어 전형적인 재갈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봅니다. 말띠드리개는 주로 금동제로 하트모양의 민무늬나 십자문을 새겨 넣은 형태로 북방계의 장방형 말띠드리개와는 차이가 있으나 신라 . 가야의것과는 비슷합니다. 용무늬가 새겨진 말안장은 집안 만보정 78호무덤에서 출토되었고 마선구1호에서 나온 화려한 말띠꾸미개는 신라의 황남대총 북분에서 비슷한 것이 나와 양국간의 교류를 알 수 있습니다.

 

 

 부뚜막은 솥을 걸고 음식을 끓일 수 있도록 쇠나 흙으로 만들었는데, 아궁이와 굴뚝의 방향이 ㄱ자로 꺽이는 고구려 독자의 모양으로 만들어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방향으로 나 있는 중국의 漢 . 魏시의 明器형 화덕과는 구분이 됩니다. 고구려 고분에서는 주로 흙으로 만든 것이 나오며 철제품으로는 운산 용호동1호무덤의 것이 유일합니다. 안악3호분과 약수리벽화분의 부엌그림에는 고구려식의 부뚜막이 상세히 그려져 있어 구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부뚜막

고구려 / 운산 용호동1호무덤 / 높이29.0cm/ 

 

 기와는 국내성 도읍기에 중국계통의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수키와와 암키와, 글씨가 새겨진 수막새가 제작되었습니다.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는 삼국시대 기와의 대표적 무늬인 연꽃무늬수막새가 출연합니다. 뒤이어 무늬도 다양해지는데, 연꽃무늬 외에도 구름 . 인동 . 풀꽃 . 도깨비얼굴(鬼面) . 기하학무늬 등이 나타납니다. 연꽃무늬수막새는 낙랑기와의 전통을 반영하여 막새의 면을 두 줄 또는 세 줄의 선으로 등구분하고 그 안에 연꽃잎을 새긴 홑판양식이 빠른시기의 것입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다음에는 막새의 면을 구획하는 선이 점차 사라지고 사잇잎이나 여러 가지의 무늬가 새롭게 나타나면서 고구려의 독자적인 양식이 성립됩니다. 고구려의 정형적인 연꽃무늬수막새는 대부분 적갈색으로 연꽃잎의 수가 6개나 8개가 대부분이며 연꽃잎의 끝이 날카롭게 도드라지고 무늬나 선이 굵고 강렬하여 강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 고구려에서만 보이는 반원막새에는 도깨비얼굴 . 두꺼비 . 연꽃 등의 다양한 무늬가 새겨지고 도깨비기와는 눈과 이빨을 과장되고 날카롭게 표현하였습니다. 

 

수막새 . 암키와 (瓦)

고구려 / 지름 (오른쪽)16.8cm/ 

수막새(圓瓦當)

고구려 지름(가운데)21.5cm/

 

벽돌로는 무덤을 축조하기 위한 무덤벽돌(墓塼), 건물의 바닥이나 기단에 사용된 깐벽돌(塼)등이 있으며 대부분 무늬가 없는 네모난 형태입니다. 무늬가 있는 벽돌로는 엽전무늬가 새겨진 것이 있고 천추총 . 태왕릉 . 등에서는 글씨가 새겨진 벽돌(銘文塼)이 출토되었습니다.

 

명문벽돌(銘文塼)

고구려 / 태왕릉 외/ 길이(오른쪽)36.2cm/

 

 고구려 토기는 아가리가 크게 벌어지고 손잡이가 네개 달린 항아리 . 배부른단지 . 깊은바리 . 시루가 대표적인데, 거의 납작한 平底입니다. 기원전후의 초기단계에는 모래섞인 바탕흙으로 빚은 엷은 갈색계통 토기와 고운 바탕 흙으로 빚어 표면을 마연한 어두운 갈색 또는 검은색의 토기 등이 있고 그릇의 종류에는 단지, 항아리, 잔, 접시 등이 있습니다. 중기인 4~5세기경의 돌무지무덤과 돌방무덤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고운 점토질의 바탕흙으로 물레를 써서 만들고 비교적 높은 온도에서 구운 것으로 회색, 황갈색, 검은색을 띱니다. 토기의 어깨나 몸통부분에 간단한 줄무늬가 배풀어지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토기의 종류가 다양해져 병, 독, 뚜껑대접, 손잡이잔, 솥, 화덕 등이 보입니다. 한편 중국의 後漢 . 六朝의 영향을 받아 황갈색의 유약발린토기가 제작되고 東晋으로부터 청자가 수입되었습니다. 6세기 이후 돌방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 토기는 역시 고운 점토질 바탕흙으로 구워 만든 것으로 회색, 검은색, 황색을 띱니다. 무늬에는 마연한 暗文이 나타나기도 하며, 그릇의 종류에는 더욱 다양해져 벼루, 베개, 호자 등과 같은 장식적인 성격의 토기가 나타납니다. 고구려의 실생활적인 토기는 三韓의 제례문화에 뿌리를 둔 백제. 신라 .가야 등의 儀禮 성격이 강한 굽다리가 붙은 고배, 기대 등의 토기와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參考資料 : 國立中央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