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고구려 유물(高句麗 遺物)

고구려무덤유적(高句麗 古塚遺蹟)

鄕香 2006. 4. 10. 21:55

 고구려 고분은 몇 차례에 걸친 都邑의 변천에 따라 집안현 통구(輯安縣通溝)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 . 상류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유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습니다. 고분은 대부분 강변의 낮은 대지에 이루어 지거나 산을 등지고 넓은 들을 앞에 낀 언덕위에 조성되었습니다. 고분은 墳丘의 축조형식에 따라 돌무지무덤(石塚)과 봉토분(土塚)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거대한 고분일지라도 그들의 박장(薄葬)풍습 때문에 외형적인 웅장함과는 대조적으로 실물로 남아있는 유물은 빈약합니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건국초부터 조성되어 온 무덤으로 압록강의 지류인 훈강()유역의 환인(桓因)지방과 독로강(禿魯江)유역의 시중(時中) . 자성(慈城) . 위원(渭原)군 등에 군집되어 있습니다. 초기에는 냇돌을 네모지게 깔고 널(棺)을 놓은 후 다시냇돌을 덮는 전도의 간단한 구조였으나 점차 냇돌 대신에 모난 깬돌(割石)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階段式)으로 쌓아 올렸는데 이러한 돌무지의 외형은 대체로 반대형(方臺形)을 이루고 있습니다.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돌방무덤(石室墳)의 영향을 받아 통구지방에서도돌무지 무덤의 중심부에 널갈(羨道)이 달린 돌방(石室)을 만들게 됩니다. 일부 지배계층의 돌무지무덤에 들어 있는 장대한 돌방은 쌍실(雙室)로 만들어진 것이 많은데 이것은 부부(夫婦)합징인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는 장군총(將軍塚) . 태왕릉(太王陵) . 천추총(千秋塚) 등이 있습니다. 특히 태왕른은 한변의  길이가 60m이며 7단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무덤으로 그 부근에서는 「원태왕릉 안여산 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이 출토되었고 또 이 무덤에서 500m 가량 떨어진 곳에는 광개토왕비가 세워져 있어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드 돌무지무덤은 5세기 전반 평양천도(平壤遷都)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장군총 지린성 통구(通溝)

 

 

봉토무덤(封土墳 , 塚)이란 널길을 갖춘 굴식돌방(橫穴式石室)을 반지하 또는 지면 가까이에 축조하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 . 진흙 . 숯 . 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봉토를 만든 것 입니다. 봉토는 돌무지 무덤처럼 방대형을 이루고 있으나  때로는 바닥 주위에 몇단의 돌기단을 쌓기도 합니다. 돌방은 방의 수에 따라 널방(主室)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單室墓)과 앞방(前室) . 뒷방(後室) . 옆방(側室) 등 두방 이상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多室墓)으로 나뉩니다. 돌방의 벽은 이른 시기에는 냇돌이나 깬돌을 썼지만 후에는 잘 다듬은 큰 판석을 여러 장 세워 축조하였습니다. 천장에는 납작천장(平天井) . 활천장(穹隆式天井) . 모줄임(抹角藻井式)천장 등이 있는데 특히 모줄임(抹角藻井式)천장은 네귀에 삼각형으로 받침대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석 한장을 덮는 형식입니다.

 

 〈지린성 집안 장군총〉

 

봉토분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전반사이에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평양천도 이후는 이 무덤의 양식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한편 이러한 봉토분 가운데에는 돌방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린 벽화무덤도 있는데 이 무덤은 축조방법과 그림의 주제(主題) 및 변화과정으로 보아 3 時期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전기 (前期 350~450년쯤)의 무덤으로는 외방무덤 또는 여러방무덤이 있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있는 양식입니다. 그림은 벽면애 회칠을 하고 회가 마르기 전에 묵선(墨線)으로 윤곽을 그린 후 안료(顔料)로 채색하는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 주제로는 안악3호인 동수(冬壽)무덤과 덕흥리(德興里)무덤에서 볼 수 있는 부부초상(夫婦肖像) . 사냥(狩獵) . 무용(舞踊) . 행렬(行列)을 비롯한 생전의 생활모습 등을 담은 인물풍속도(人物風俗圖)가 주로 보입니다. 전기의 화풍(畵風)은 중국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일부 고구려회화양식으로 변화해 가는 것도 보입니다. 

 

 

주인초상(主人像)

( 고구려 황해 안악3호분 주인그림 ) 

 

중기(中期 450~550년쯤)의 무덤은 돌방의 축조가 고구려식으로 정착되면서 앞방이 작아져 딸린 방처럼 되고 주인공의 초상도 널방으로 옮겨집니다. 그림의 주제도 전기의 인물 중심에서 사신도(四神圖)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비롯해서 불교적인 장식무늬도 나타납니다. 그림도 필치나 구도가 자유로와지며 고구려적인 화풍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각저총(角抵塚) . 무용총(舞踊塚) . 개마총(鎧馬塚)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냥(狩獵圖)

( 고구려 지린성 지안 무용총 벽화 ) 

 

후기(後期 550~650년쯤)의 무덤은 구조적으로 단순화되어 외방무덤이 대부분이며 무덤바닥이 지면가까이 내려갑니다. 그림의 주제는 사신도 일색으로 변하는데 사신도의 배경에는 나무와 구름 등의 사실적인 것 외에도 해와 달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日月星辰) . 신선(神仙) . 動物 등의 道敎的인 요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힘에 찬 화려한 색채로 고구려의 국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전기와는 달리 물갈이(水磨)한 벽면 위에 그림을 직접 그리고 있는데 집안 사신총(四神塚) . 진파리(眞坡里) 1 . 2호 등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 시기의 외방무덤의 축조방법과 벽화의 주제 등은 백제 . 신라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들 고구려의 돌방무덤이나 벽화무덤은 다양한 구조와 소재에 비하여 출토유물이 매우 적지만 이를 통해 고구려공예미술의 일면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參考資料 : 國立博物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