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예맥(濊貊)퉁구스에 속하는 부여족(夫餘族)의 일파로 기원전 1 . 2세기경에 압록강의 북쪽 지류인 훈강(훈江)유역에서 일어나 서기 1세기에는 압록강 북안의통구(通溝)지방으로 남하하여 기반을 굳히고 계속해서 요동(遙東)방면으로진출하였습니다.
서기313년에는 낙랑군을 몰아내고 이어 서기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만주의 반 이상과 한강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습니다.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 . 신라와는 달리 처음부터 만주에서 터전을 잡았기 때문에 북방문화적 요소가 많고, 또한 지리적상황에 따라 화북(華北)문화와의 접속이 활발하엿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낙랑문화도 민감하게 수용하고 이들 문화를 남쪽으로 퍼뜨리는 중간역활도 하고 있으며 서기372년에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중국문화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삼국문화의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고구려문화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이들의 외래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여기에 고구려적인 요소를 덧붙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여 계속 발전시킨 점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 고분벽화로서 초기의 고졸한 모양이 곧 세련되고 원숙한 필치로 바뀌고 개화되어 활기찬 고구려인의 생할양식이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고구려문화의 선진성은 천문 . 지리 . 문학 . 음악 . 무용 . 공예등 여러 방면에서 두드러지나 특히 뛰어난 것이 건축분야로통구 . 평양 등에 세워진 국내성 . 장안성 . 안악궁터를 비롯하여 수만 기가 넘는 돌무지무덤(積石塚) . 돌방무덤(石室墳)의 고분은 강인한 고구려의 힘과 창조력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415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는(廣開土王碑)는 그 웅장한 비면에 유려한 육조(六朝)의 예서체(隸書體)가 가미된 고구려 특유의 서체로 당시 고구려의 대내외적 실상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916년 일제강점기 촬영>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고구려시대/지린성(吉林省) 높이 6.3 M
고구려의 발상지 오녀산성 전경
〈고구려의 연주성 성벽〉
도읍지에는 왕궁을 둘러싼 나성과 배후에 산성이 있습니다. 집안의 국내성과 산선자산성 . 평양의 안악궁 . 평양성과 대성산성 등이 대표적입니다. 고구려의 성곽과 그 구조는 고분벽화에도 그려져 있는데. 요동성총(遙東城塚), 약수리(藥水里)벽화무덤, 용강큰무덤(龍岡大墓)등에 성곽그림이 보입니다. 고구려는 중국 및 북방민족과의 항쟁에서 산성위주의 방어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산성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7세기에는 변방에 있는 산성을 연결하여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산성은 대체로 산세가 험하고 벌과 큰 강을 낀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을 쌓을 때에는구역별로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성돌이나 바위에 쌓은 이의 이름을 새겼는데, 그것이 평양성과 농오리 산성에서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랴오닝성 환런 홀본산성
〈고구려의 랴오닝성 고검지산성 성벽유적〉
〈고구려의 (지리성 지안) 국내성〉
고구려는 불교 수용(372년)이후 성문사, 이불란사 등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평양과 그 일원에서 몇 개의 절터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금강사(金剛寺)로 비정되는 청암리(淸岩里)절터의 가람배치는 중앙의 팔각목탑을 중심으로 동 . 서 . 북에 각각 금당이 있는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식이며, 동명왕릉의 원찰인 정릉사(定陵寺)와 상오리(上五里)절터 또한 동일한 가람배치로 확인되어 고구려 寺院建築의 고유양식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가람배치는 신라의 황룔사와 일본의 아스카사(飛鳥寺)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편 원오리(元五里)절터에서는 흙으로 만든 불상이 다수 출토되기도 하였으며, 또한 황해도 봉산토성리(土城里)에서 목탑지에 해당하는 8각걸물터와 그를 둘러싼 3채의 네모난 건물터가 발견되어 고구려 특유의 절터가 지방에도 퍼졌음을보여줍니다.
고구려인들의 주택구조와 생활모습은 고분벽화에 그려진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귀족 들의 생활모습은 안악3호분과 덕흥리벽화고분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귀족들의 저택은 중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채와 안채로 나뉘어 있었으며 바깥채에서는 공적인 업무가 안채에서는 일상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엿보입니다. 이외에 부엌, 고깃간, 외양간, 창고 등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벽화에 나오는 부억의 모습은 고분에서 출토된 화덕과 모양이 일치하고 창고는 기록에 나오느 부경(桴京)을 가르킨다고 추정됩니다. 저택의 실내에서는 平床생활을 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자리를 넓고 짧게 만들어 온돌로된 방바닥과 가깝게 하였습니다. 온돌은 방바닥의 한켠에 고래를 놓아 난방을 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난방시설로서 시중 魯南里, 중강 土城里, 북창 大坪里 등과 최근 아차산성과 4보루에서도 발굴조사 되었습니다.
參考資料 : 國立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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