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역사문화

구산선문(九山山門)

鄕香 2008. 3. 20. 09:35

* 화엄십찰[華嚴十刹]

신라 때 화엄사상을 널리 펴던 열 곳의 사찰.

신라의 의상(義湘)이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이다. 최치원(崔治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절 이름이 나온다.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팔공산 미리사(美理寺), 계룡산 갑사(甲寺), 웅주 가야협 보원사(普願寺), 삼각산 청담사(靑潭寺) 10개 사찰을 말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원주 비마라사 대신 전주 무산 국신사(國信寺:현재의 귀신사)를 십찰의 하나로 여기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중 부석사와 비마라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 6개 사찰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은 의상이 전파한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구산선문 [九山禪門]

9~10세기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변동에 따라 주관적 사유를 강조한 선종(禪宗)을 산골짜기에서 퍼뜨리면서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집단.

이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보아[直指人心], 중생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떠[見性成佛],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하여[不立文字], 번쇄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敎宗)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한다[敎外別傳]는 4구의 구절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한다. 이것이 4구표방(四句標榜)인데, 4구가 처음부터 함께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시간면에서 따져보아 교외별전을 제외한 3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종에 관한 논의에 그대로 다루어서 무방하다.

 


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 9산선문이 집중적으로 세워지자, 교종에 대비되는 선종의 정체에 질문이 시작된다. 선종의 극성과 함께 대두한 선교(禪敎)의 우열에 관한 판단이 그것이다. 당시 선사(禪師)들은 선교간 상호위치 정립에서 대립의 관계보다 양립의 관계를 선택했다. 예컨대 9산선문으로 정착해 가던 9세기 후반의 선종승려들이 교종과 일정한 동반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그렇거니와, 선종이 정착되기 이전의 9세기 전반에는 화엄종의 대표적 3대사찰이 교선일치의 성향에 입각하여 선종을 수용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논의할 성격의 것이 아니지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선종 입론의 근거가 그때까지는 아직 교종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 시기 선승(禪僧)들을 대표하는 낭혜무염(郎慧無染)이 선교의 시시비비를 내치는 구절도 그렇거니와, 다른 선사들에게서도 보이는 것처럼, 선을 교의 상징들과 동격으로 병렬하면서 그것조차 뛰어넘고자 한 불립문자적 세계관이 바로 그 점을 웅변하고 있다. 이 두 측면의 결합, 하나는 선종의 입론이 불가피하게 교종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성과, 하나는 교종과 조화를 이루되 그것을 포함하여 뛰어넘는 자기초월적 관점에 기초했다는 세계관이, 신라 말 고려 초에 선사들이 선교의 상호위치 정립이라는 이념적 과제를 선교대립보다는 선교양립적 방법으로 해결하게끔 한 것이다. 가령 교종부정 또는 교종대립의 한 표방으로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나타나는 신라 선종 조사(祖師)들과의 관련내용은 1290년대 천책(天])이 정리한 선종우위의 특색을 반영한 설화 모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960년 무렵 혜거(慧炬)에서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바로 뒷 세대인 1000년 무렵 영준이 구체화해 나간 소극적 선 우위의 사유자세는 뒤 시대에 정립된 교외별전이라는 적극적 선 우위의 사고체계를 이끌어냈다.신라 말 고려 초의 법맥승계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사문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류, 다른 가르침이나 다른 스승의 허용, 자칫 스승이나 시간 위주의 보수적으로 경색되기 쉬운 사제간의 관계설정이, 배우는 이 자신에게 달려 있을 만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말 해룡왕사(海龍王寺)의 개산조인 보요선사(普耀禪師), 《조당집(祖堂集)》에서 높이 평가한 오관산 서운사 순지화상, 최치원이 높이 평가한 쌍계사 진감혜명은, 그들의 후예가 번성하지 못함으로써 9산선문의 계보에서 제외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점에서는 활동한 시기와 제자들에 의한 활약, 이 두 가지가 9산선문의 성립요건으로 작용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즉 왕건에 의한 후삼국통일 이전 시기에 국사와 왕사의 지위에 오르거나 이에 비견될 예우를 받은 이들이 산문을 열고, 그 후예들 가운데 뛰어난 승려들이 계속하여 배출된 곳은 역시 9산선문 밖에 찾아볼 수 없다.

절과 산문을 동일한 대상물로 파악하지 않고, 한 절이 산문으로 불린 이래의 산문이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일정한 계통의 흐름이 계속하여 이어진 곳을 말한다는 원칙에 합의한다면, 신라 말 고려 초의 불교계를 주도한 선승들 대부분은 수미산문을 제외한 나머지 9산선문의 계보 안에서 활동한 존재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조심스럽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당대의 선종을 총망라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대표한 것은 9산선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좀더 비약하여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고려시대의 선종과 신라 말 고려 초의 9산선문이란 용어의 차이는 의식하건 않건 간에, 지역분포, 국가와의 관계, 선 수행의 내용, 각 산문과의 관계 등에서, 두 시대 간의 선종에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용어로 쓰여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9산선문의 성립은 신라 하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의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며, 비록 특정한 신분집단이나 개인의 지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선종의 기반이 세워지지 않았음이 주목된다. 그러나 농민전쟁기를 고비로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고, 후삼국 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농민전쟁 발발 이전에 혁명적으로까지 보이던 선종이, 사실상 양심적인 개인의 지성만으로 만족하는 진보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였음을 반증한다. 이는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전쟁 이후의 농민군에게 물리적 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게로 기울 수밖에 없던 점에서 잘 나타난다. 결국, 무논리의 주관적 사유세계를 강조한 선종은 다소 진보적인 사회성을 띠기는 했지만, 이전의 화엄종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라 말 고려 초의 주요한 이념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선을 전수하고 돌아 온 승려들은 자신들이 전수해 온 선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 신라는 선종을 받아들이기에는 교종의 자리가 너무도 컸습니다. 그래서 선승들은 자신들의 제자와 함께 지방으로 내려가 절을 짓고 선문(禪門)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산선문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 온 선종은 중국에 있던 남종선을 받아들인 것이며, 중국의 선종은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하였습니다. 선종은 경전의 해석이나 말, 문자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종(宗)의 골격으로 하고, 좌선(坐禪)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관찰하는 수행을 함으로써(내관자성(內觀自省) 자성(自性)을 깨닫고, 자증삼매(自證三昧)의 묘경(妙境)을 깨달는 것으로 합니다.

또한 선종이란 부처님의 교설(敎說)을 소의(所衣: 의지할 바 대상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내용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로 삼는 교종에 대하여 좌선을 닦는 종지라는 뜻입니다. 선종은 부처님에게서 정법(正法)을 유촉 받은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있고, 28조(祖)인 보리달마(菩提達磨)가 중국에 건너와 2조 혜가(慧可, 487-593)에게 법을 전함으로부터 제 5조인 홍인(弘忍, 602-675)에 이르러 그 문하(門下)에서 혜능(慧能, 638-713)을 제6조로 하는 남종(南宗)과 신수(神秀, ?-706)를 제6조로 하는 북종(北宗)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그러나 신수(神秀)의 북종(北宗)은 오래지 않아 맥이 끊어지고 혜능(慧能) 남종만이 5가(家) 7종(宗)으로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 선종은 신라 선덕여왕 5년(784)에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서 법(法)을 받은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돌아와 법을 전하기 시작한 것을 그 초조(初祖)로 하고 있습니다. 서당지장 스님은 마조도일 스님의 법을 이었고, 마조 도일 스님은 조계 혜능 스님의 법을 이었으므로 우리 나라의 조계종은 육조 혜능의 법맥을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하나의 종파이며, 구산문으로 불리운 이유는 선문 가운데 선법을 널리 알린 아홉개의 선문이 있고, 이 선문을 말할 때 구산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산문은 선법을 크게 떨친 아홉개의 사찰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나라를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은 기존의 기반을 잡고 있던 교종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한국불교의 사상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가 침체되어 말기에 이를 무렵 불교의 새로운 풍조라고 할 수 있는 선이 중국에서와 산문을 열고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며, 이 구산선문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의 선종계(禪宗界)를 망라하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구산문은 구산선문 이라고도 하며,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가지산문(迦智山門): 도의(道義)의 법손인 체징(804-880)이 보림사를 창건하고 도의의 종풍을 떨쳐 가지산파를 이루었습니다. 도의의 속성은 왕씨이며, 북한부 사람으로 그 법호는 처음 명적(明寂)이었으나 나중에 원적(元寂)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라 37대 선덕왕 5년(784)에 당으로 건너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 에게서 법을 얻고 도의라 호를 고쳤다고 합니다.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선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魔說)이라 비방하며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의는 설악산(雪岳山) 진전사(陳田寺)에 칩거하여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염거는 그 법을 다시 체징(體澄)에게 전하였습니다.

체징은 당으로 건너가 떠돌아다니며 고승을 찾았으나, 그의 조사(祖師)인 도의(道義)가 물려 준 것 이외에 더 구할 것이 없음을 깨닫고 문성왕 2년(840)에 돌아왔습니다. 돌아 온 체징은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하고 도의의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습니다.

(2)실상산문(實相山門): 전북 남원의 실상사가 실상산문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홍척(洪陟)이 흥덕왕 원년(826)에 귀국하여 실상사에서 선법을 일으켜 실상산파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홍척은 일찍이 입당하여 도의와 마찬가지로 서당 지장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홍척은 지리산 실상사에 있으면서 선법을 일으켜 많은 제자와 신도들이 귀의했고, 그 중에서도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이 홍척의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실상사에는 홍척의 제자였던 편운(片雲)의 부도와 수철(秀澈, 817-893)의 탑비가 남아 있으며, 편운(片雲)의 부도에는 그가 홍척의 제자라고 되어 있으며 수철의 탑비에는 실상사에서 스승 홍척에게 법을 얻었으나 심원사(深源寺)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홍척은 가지산문의 도의와 같은 스승인 서당지장에게 법을 받았으나 도의(道義)보다 늦게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산문(山門)의 터전은 가장 먼저 닦아 구산선문중 제일 먼저 개산한 선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3)동리산문(桐裡山門): 혜철(惠哲784-861)이 귀국한 후 문성왕 원년(839)에 태안사에 선지를 펴 동리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혜철도 도의, 홍척과 더불어 서당(西堂)에게서 법을 받아 돌아와 선지을 펴는데 힘섰습니다.

(4)봉림산문(鳳林山門): 현욱(玄昱, 787-868)의 제자 진경 심휘(854-895)가 경남 창원에 봉림사를 세워 봉림산파를 이루었습니다. 현욱의 속성은 김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헌덕왕 때 당나라로 가서 마조의 문인 장경(章敬) 회휘(懷暉)에게 배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현욱은 희강왕 2년(837)에 귀국하여 처음에는 지리산 실상사에 안거하다가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로 옮겨 그의 법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현욱(玄昱)을 혜목산화상(慧目山和尙)이라고 합니다. 현욱이 크게 선풍을 떨치다 경문왕 8년(808)에 82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진경 심희(眞鏡 審希, 854-923)가 봉림사를 세워 봉림산의 선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5)사자산문(獅子山門): 도윤(道允800-868)의 제자 징효절충(831-895)이 헌강왕 때 강원도 영월에 사자산사를 세워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도윤은 헌덕왕 17년(825)에 입당하여 남천 보원(南泉 普願)에게서 법을 얻고 돌아와 동악(棟岳)에 머물다가 다시 쌍봉사(雙峯寺)로 자리를 옮겨 종풍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그래서 도윤을 쌍봉화상(雙峯和尙)이라고 합니다. 문경왕 8년(868)에 71세로 입적하셨고, 시호(謚號)를 철감(哲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징효 석중(澄曉 析中, 831-895)이 흥령사(興寧寺)를 세우고 수 백명의 제자와 더불어 사자산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6)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800-888)의 속성은 김씨이며 태종 무열왕의 8대손입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처음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서 법성(法性)에게 득도하였고,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에게서 화엄경을 배웠습니다. 821년 당나라로 가서 마조도일의 제자인 마곡보철에게 법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이라 존경하였으며, 귀국 후 성주사에서 법을 펴다가 경문왕과 헌강왕의 국사가 되었으며 무설토라는 독특한 선법의 법문으로 2천명의 문하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심광, 현휘, 대통, 여엄 등이 뛰어 나다고 합니다.

(7)사굴산문: 사굴산문은 문성왕 때 범일(810-889)선사가 강릉의 하구정면에 굴산사에서 개창한 선문입니다. 범일은 태어날 때부터 육계가 정수리에 있었다고 합니다.(육계란 부처님의 정수리가 솟아 상투모양을 이룬 모습을 말합니다.) 15세에 출가하여 831년 당나라로 가서 염관제안의 법을 전수 받고 847년에 귀국하여 굴산사에서 법을 폈습니다. 이곳에 살면서 40여년 동안 한번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하며, 역대 국왕의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범일은 특히 특이한 진귀 조사설을 남겼는데 그것에 의하면 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서 나왔으나, 선법(禪法)은 진귀조사로부터 부처님이 받아서 전하였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설(說)이며, 그 사실도 인정되고 있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청허 휴정이 이를 인정한 후 조선후기 선논쟁의 근거가 되었고, 여래선보다 조사선을 우위에 두는 조사선의 사상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후기 선논쟁을 참고) 그의 제자로는 개청(835-930), 행적(832-916) 등이 유명하고 고려 때까지 번성하여 구산선문 중에서 가장 위세를 떨쳤다고 합니다.

(8)수미산문(須彌山門): 이엄(利嚴, 870-936)의 속성은 김씨이며, 12세 때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습니다. 그 뒤 진성왕 10년(896)에 입당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문하(門下)에서 6년을 수행하고 법인(法印)을 얻었습니다. 그 후 널리 선지식을 찾아 보고 효공왕(孝恭王) 15년(911)에 귀국하였습니다. 고려 태조가 그의 법이 높음을 듣고 궁중으로 맞아 들여 법을 받았으며, 태조 15년에는 수미산(須彌山, 황해도 해주군 귀산면)에 광조사(廣照寺)를 지어 그를 있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그의 휘하에 모이는 많은 학인들을 가르치며 도화(道化)를 떨치다가 태조 19년(936)에 6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는데 그의 시호를 진철대사(眞澈大師)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문하에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능(貞能), 경숭(慶崇)등 수 백명이 있어 그의 법을 전승하였는데 수미산(須彌山)에서 선의 일파(一派)를 이루었으므로 수미산이라고 합니다.

(9)희양산문(曦陽山門): 경북 문경의 봉암사 도헌(道憲)이 봉암사를 창건하고 법손인 경양(競讓, 878-956)이 봉암사를 중건하여 희양산문을 이루었습니다. 경양(878-956)은 속성이 왕씨이며, 일찍이 출가하여 공주(公州) 남용원 여해(如海)에게 득도하였습니다. 효공왕 4년(900)에 중국으로 가서 곡산의 도연(道緣)에게서 크게 깨달은 뒤 고려 태조 7년(924)에 돌아왔습니다. 강진 백엄사에사 법을 펼 때 경문왕이 글을 보내어 그 덕을 칭찬하고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주었습니다. 그 뒤 법을 닦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가 두 호랑이의 안내로 도착한 곳이 희양산 이었고, 이 곳이 그의 법사(法師)인 도헌이 창건한 봉암사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많은 제자들과 선의 일파를 이루었으며, 이 산문을 희양산문이라 합니다.

구산선문의 완성은 종래 이엄의 수미산문 개산(태조15년, 932)로 여겨져 왔으나, 도헌을 개산조로 하는 희양산문이 경양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산문의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보아(태조18, 935) 희양산문의 개산을 마지막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미산문과 희양산문의 성립에 의하여 비로소 구산선파가 형성되었고 이후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9산으로 이루어진 선문가풍을 이어 나갔습니다. 구산선문은 신라말에 다 완성 된 것이 아니라 고려 초까지 이어지지만 구산선문이라고 하면 신라의 선문을 말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구산선문의 성격은 모두 육조 혜능의 법을 잇는 남종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산문은 아홉군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두 조계, 혜능을 조(祖)로 삼고 그 선법(禪法)인 조계선(曹溪禪)을 참구(參究)하였으므로, 고려초에 확립된 조계(曹溪)를 조(祖)로 하는 해동(海東)의 선종이라는 것입니다.

선종의 등장은 단순히 중국의 선불교를 옮긴 차원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우리 민족과 한국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선종은 고려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며, 오교양종으로 자리잡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고 : 5교 9산

신라불교는 열반종(무열왕때 보덕), 율종(선덕왕때 자장), 법성종(경덕왕때 진표율사), 화엄종(원효와 의상), 법상종의 다섯 종파로 나뉘어져 각기 그 교리를 연구하게 되었는데 이를 5교라고 합니다.
구산은 신라말 중국에서 성행하던 선종이 들어왔는데 고려초기까지 대표적인 9개의 선문이 개창되었는데 이를 9산선문이라고 합니다.
9산선문은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 지리산 실상사. 곡성군 죽곡동 동리산 태안사. 보령군 미산면의 성주사. 강릉군 구정면의 사굴산 사굴사. 영월군 수주면의 사자산 흥녕사. 문경군 가은면의 희양산 봉암사. 창원군 상남면 봉림산 봉림사. 해주군 금산면 수미산 광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