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시 검단산의
구당 유길준 선생 (矩堂 兪吉濬 1856/10/24 ~ 1914/9/3) 墓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으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했고,
정치의 전면에 나서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개혁을 단행했다.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천민(天民).
할아버지는 청송부사를 지낸 치홍(致弘)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진수(鎭壽)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 서양인들이 즉각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아 많은 서울 사람들이 피난을 하자, 그의 집안도 선영(先瑩)이 있는 경기도 광주군 덕풍리로 낙향했다.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한 지 3년째 되는 1869년 봄에 서울로 돌아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耕稙)에게 배웠다. 이경직은 도정(都正)의 벼슬밖에 하지 못했으나, 서울 북촌(北村)의 유명한 학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살림도 넉넉하여 많은 서적을 간직하고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지도를 받으면서 각종 고전에 접할 수 있었다.
1881년 5월 신사유람단을 파견했을 때, 유정수(柳正秀)·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어윤중의 수원(隨員)으로 따라갔다. 유정수와 함께 후쿠자와 유끼치[福澤諭吉]가 경영하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에 입학했는데, 이때 그는 26세였으므로 정식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고 후쿠자와의 서생(書生), 즉 개인지도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후쿠자와는 일본 사회에서 문명개화론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특히 그가 저술한 〈서양사정 西洋事情〉·〈문명논지개략 文明論之槪略〉·〈학문의 권유 學問の勸め〉 같은 책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도 언젠가 이러한 책을 써서 한국 국민들을 계몽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는 많은 저작물을 발표함과 동시에 1882년 3월 1일부터 〈지지신보 時事新報〉라는 일간지를 창간했다. 후쿠자와의 원고 요청이 있자 그는 일본 사회에서 신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그해 4월 21일 〈신문의 기력을 논 함〉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다.
1882년 7월 23일 서울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약 3개월 뒤인 10월 13일 박영호를 수신사(修信使)로 하는 사절단(使節團)은 3개월간 일본의 각 기관을 시찰하고 여야의 지도자들과 만났을 뿐만 아니라 각국 사절과도 폭넓게 접촉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 그는 사절의 통역을 맡아 활약했으며, 1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박영효 일행과 함께 귀국했다. 한동안 외아문주사를 지내고, 박영효의 부탁으로 한성부에 신문국(新聞局)을 설치하고 신문 발간을 도왔으나 여의치 않았다. 곧 한국 최초의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인 보빙사(報聘使)의 수원이 되어 미국을 시찰하게 되었다. 일행과 함께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그 부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4개월 뒤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885년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배를 타고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 집에, 뒤에는 서울의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그동안 <서유견문 西遊見聞> 의 원고를 썼고, 1895년에 활자화되었다.
1892년 11월에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 었다.
190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과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를 작성하고 환국 공작을 펴다가 발각되어, 일본정부에 의해 일본의 남해 고도(孤島)에서 4년간 강제로 유배생활을 했다. 석방되어 도쿄[東京]로 돌아온 그는 개인적으로는 4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고독 속에 빠져 생각하는 바가 많았고, 국가적으로는 1905년 11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됨에 따라 오래 전부터 동지들과 손을 잡고 국권을 확립하고 근대국가의 체제를 갖추어보려던 것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마음을 가다듬기 힘들어 기독교에 귀의했다. 또 이 시기에 본국으로부터 김정식(金貞植)이라는 사람이 도쿄 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로 부임하여 유길준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설득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식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兪星濬)과 같이 서울의 종로감옥에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그 역시 유길준처럼 기호(畿湖)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을 나누고 설득했던 것 같다. 그뒤 도쿄에 있는 한국인들이 후지 산[富士山] 밑에 있는 여관에 가서 사경회(査經會)를 개최하게 되자, 유길준도 같이 가서 〈사경회서 査經會序〉를 작성하여 기독교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피력했다. 일본 망명중에 있던 그는 헤이그 특사파견 사건으로 고종이 양위를 강요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지신문 新知新聞〉에 완강하게 반대한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일본이 모든 권한을 갖게 되니 비통하다고 하고, 자기는 귀국하면 교육사업에나 종사하겠다고 했다. 한편 그는 일본의 총리대신에게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일본이 정미7조약을 무효로 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영원히 일본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길준이 정미7조약을 완강히 반대했다는 소식은 한국 국내에도 알려졌다.
그동안 그를 친일파로 생각했으나 그가 정미7조약을 반대했음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고종이었다. 1907년 8월 16일 일본에 망명했다 돌아온 사람들 중 유길준을 제외하고 모두들 일본측에서 주는 벼슬을 받았다. 고종은 우선 용용봉정(龍龍鳳亭:흔히 龍鳳亭이라 했으나 유길준은 조호정이라고 불렀음)을 유길준에게 하사했으며, 흥사단(興士團)을 만들어 교육사업을 벌이자 1만 원의 찬조금과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했다. 이 기관을 통해 유길준은 〈대한문전 大韓文典〉·〈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등의 책을 저술·간행했다. 그리고 교사양성기관인 사범학교를 설립·운영했으며, 소학교 교육을 정상화하려고 했다. 또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를 설치·운영했다. 유길준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지하고 있었고 영국을 가장 이상적인 나라로 보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
그동안 야(野)에서 쌓아 올린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감에 따라 그는 허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유길준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침묵을 지키고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한때 극비리에 노백린(盧伯麟) 등 몇몇 유지와 합동, 서울 시내의 중학생을 동원하여 합병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일본 관헌에 발각되어 집에 연금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합병이 된 지 40일 가까이 되어 일본당국은 합병에 공로가 있는 한국인 78명에게 작(爵)을 내려 귀족으로 앉히면서 유길준을 회유해보려고 남작(男爵)을 주었으나 그는 완강하게 사절했다. 오랫동안 신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 9월 30일 집에서 죽었다. 임종시 아들과 조카 등에게 〈신약성서〉를 읽게 했으며, 나라 잃은 설움에 죄책감을 느껴 유족들에게 자기는 아무런 공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죽게 되면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설치했던 흥사단이 한일합병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으나, 1913년 5월 안창호가 무실역행(務實力行)을 내세우면서 부흥시켰다. 李光麟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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