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역사문화

무학(無學) 당호 계월헌(溪月軒).

鄕香 2008. 3. 3. 22:30

 

자초 영정 /자초 영정
 

속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경상도 삼기현(三岐縣) 출신이다.

아버지는 증(贈) 숭정대부문하시랑(崇政大夫門下侍郞) 인일(仁一)이며, 어머니는 고성채씨(固城蔡氏)이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이래 재야에서 불교와 선도(仙道) 및 도참(圖讖)을 연구했다.

어려서는 유교 관계 서적을 공부했으며 시와 글에 뛰어났다. 1344년(충혜왕 5)에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의 소지(小止)에게 출가했으며,

 소지의 소개로 용문산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를 찾아가 부도암(浮屠庵)에 머무르며 선정(禪定)을 닦았다.

일설에는 18세 때부터 지리산에서 천문·지리·음양·도참술 등을 공부한 다음 21세에 비로소 출가했다고도 한다.

1346년(충목왕 2)에 〈능엄경 楞嚴經〉을 읽다가, "묘하고 밝은 참마음이 만법(萬法)의 근본이 된다"라는 구절에서 문득 깨달아

이후부터 수행에 힘썼다. 1349년(충정왕 1) 가을에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로 들어갔으며,

1352년(공민왕 1)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수행했는데, 이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1353년에 원나라 서울로 가서 인도승 지공(指空)을 만나 인정을 받았다. 이듬해 법천사(法泉寺)에서 나옹(懶翁)을 만났는데,

나옹은 몇 차례 문답 끝에 그를 인정했다. 그뒤 무령(霧靈)·오대산 등을 거쳐 서산(西山)의 영암사(靈巖寺)로 다시 나옹을 찾아갔으며,

그곳에서 몇 해를 머무르며 마침내 나옹과 사제의 관계를 맺었다. 1356년 나옹에게 하직하고 먼저 귀국하여 고향으로 갔다.

1358년 봄에 나옹이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元曉庵)에 머물자, 이듬해 나옹을 찾아가 그로부터 불자(拂子)를 받았다.

그뒤 나옹이 해주 신광사(神光寺)로 옮길 때 따라갔으나, 나옹의 다른 제자와 알력이 생겨 나옹을 떠나 여주 고달산(高達山)에 들어갔다.

 1371년 나옹이 왕사(王師)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무를 때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1376년(우왕 2)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를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수좌(首座)로 삼고자 했으나 사양했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은둔했고,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1392년(태조 1) 겨울에 왕이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

'(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당시 정도전(鄭道傳) 등의 유학자 출신 관료들이 억불숭유책을 건의하여 불교를 탄압하고자 했는데, 이에 대해 태조에게

유불일치설(儒佛一致說)을 주장했으며 정치적인 자문도 했다. 1393년 수도를 옮길 때 한양천도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0월에는 국가가 주관하여 연복사(演福寺)에서 전장불사(轉藏佛事)를 열었을 때 그 주석(主席)이 되었으며,

1397년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다.

이듬해에 용문사(龍門寺)로 가서 머물다가 1402년(태종 2) 왕명을 받고 회암사로 옮겼으나, 이듬해 사퇴하고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갔다. 1405년 금강암으로 옮겨 그곳에서 입적했다.

그는 항상 영아행(嬰兒行)을 강조하고 몸소 실천하여 일생을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한 생활로 일관했다고 한다.

자초는 나옹의 영향을 받아 인도승 지공 계통의 무심선(無心禪)과 당시 중국에서 성행하던 임제선(臨濟禪)을 모두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지공 또는 중국 임제종 승려 평산처림(平山處林)에서 나옹으로,
나옹에서 자신에게로 전승되는 계보를 확정하여 족자로 만들었다.
왕사가 된 직후에 태조에게 요청하여 1393년 9월에 지공과 나옹의 사리탑을 회암사에 건립했으며,
나옹의 진영을 모시는 불사를 광명사(廣明寺)에서 베풀었다. 그러나 나옹의 수제자는 원래 자초가 아니라 환암혼수(幻菴混修)이며,
자초가 왕사가 되고 난 다음 자신을 나옹의 대표적 계승자로 자처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편 그는 불교승려이면서도 뛰어난 풍수도참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李成桂)가 '왕'(王)자 꿈을 꾸었을 때 이를 풀이해주어 친밀해졌으며, 1360년에는 나옹과 함께 함주(咸州)로 가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李子春)의 묘자리를 정해주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한양천도 결정에 영향을 주었으며,
태조와 태종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데도 공이 컸다.
이와 같이 그는 불교승려이자 풍수도참사상가로서 태조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조선왕조 개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자로는 기화(己和)를 비롯해 진산(珍山)·장휴(莊休)·보경(寶鏡) 등이 있다. 문필을 좋아하지 않아 저술이 별로 없으며,
〈인공음 印空吟〉 1권, 〈무학대사어록 無學大師語錄〉 1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그밖에 〈무학비결 無學祕訣〉이 있는데
 이는 후대에 자초를 가탁하여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불조종파지도 佛祖宗派之圖〉가 유일하게 전한다.
그의 사리는 생전에 만들어진 회암사 부도에 안치했으며, 문신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비문이 있다. 시호는 묘엄존자(妙嚴尊者)이다.
 
 
 

'그냥 > 역사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진왜란 후 일본자기  (0) 2008.03.24
구산선문(九山山門)  (0) 2008.03.20
아차산 유적  (0) 2008.03.02
<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은 청년 박정희 >  (0) 2008.02.28
[스크랩] 국민교육헌장  (0) 2008.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