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안장왕(安臧王?-531/안장왕13년)재위519~531.〉
이름은 흥안(興安)이다. 문자왕의 장자로 태어나 498년(문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국 양(梁)나라로부터 영동장군 도독 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 (寧東將軍 都督 營平二州諸軍事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북위(北魏)로부터도 안동장군 영호 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安東將軍 領護 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와같이, 중국의 남북조국과 양면에서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양측과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여 전대에 이미 확립된 대중국 양면외교정책을 따라 행하였다. 이러한 양면외교정책은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하여 대중국방면의 안정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이었던 것이다.
523년(안장왕 5)과 529년에는 백제를 침략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계속 추진해나갔음을 보여준다. 내치에 있어서는 자료의 인멸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왕의 재위기간에 고구려의 장기간의 안정이 점차 동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지배체제의 동요 가운데 왕도 피살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중국 미녀와의 연애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나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왕이 죽은 해에 대하여, 《양서》에는 526년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1년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魏書 . 梁書 . 日本書紀.
〈제23대 안원왕(安原王?-545/안원왕15년)재위531~545.〉
일명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 · 향강상왕(香岡上王) 또는 안강상왕(安岡上王)이라 하며 이름은 보연(寶延)이다. 안장왕의 동생으로 형의 사랑을 크게 받았으며 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신장이 7척5촌이나 되고 도량이 넓었다 한다.
즉위와 함께 남조의 양(梁)나라로부터 안장왕이 가졌던 지위를 계승할 것을 인정받았으며 532년(안원왕 2)에는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산기상시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使持節散騎常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당시 중국은 북위와 양나라가 대립하고 있다가 534년 북위가 동 · 서위로 분열하게 되는데, 동위와 양나라와의 양면외교를 적극 전개함으로써 서방의 안정을 유지하였다. 동위로부터는 534년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라는 지위를 추가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군사동맹을 맺고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대응함으로써 이들과의 대결은 540년에 백제군이 우산성(牛山城)을 침략하므로 그를 격퇴시켰던 사실 이외에는 대체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535년에 홍수 · 지진 · 전염병이, 그리고 535 · 536 · 541년에는 각각 가뭄 · 황충 · 기근 · 태풍 등의 재난이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욱이 왕의 후사를 둘러싸고, 두 왕비간에 각기 자기 소생을 왕으로 세우려 하여 그들을 후원하는 귀족세력들인 이른바 추군(○群)과 세군(細群)의 암투는 고구려사회 전반에 동요를 가져왔던 것 같다.
왕은 545년 추군과 세군의 대립이 무력충돌로 비화하는 와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원왕의 재위기간에 대해서는 중국의 《양서 梁書》에는 《삼국사기》와 달리 526∼548년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1∼545년간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魏書 . 梁書 . 日本書紀
日本書紀所載 高句麗關係記事考(李弘稙,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盧重國, 東方學志 28, 1981)
〈제24대 양원왕(陽原王?-559/양원왕15년)재위545~559〉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또는 양강왕(陽崗王)이라 하였으며 이름은 평성(平成)이다. 안원왕의 맏아들로 533년(안원왕 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 즉위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즉, 안원왕이 죽은 뒤 두 왕비가 각각 자기소생의 왕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여 두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충돌을 통하여 양원왕을 밀던 추군(群)이 다른 왕자를 지지하던 세군(細群)에게 승리함으로써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의 전제적 권한은 크게 도전을 받아 왕권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즉, 《삼국사기》 거칠부(渠柒夫) 열전에 551(양원왕 7)에 거칠부를 만난 고구려의 고승 혜량(惠亮)이 나라에 정란이 있어 멸망이 멀지 않다고 한 것을 보면, 지배세력간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557년에 환도성(丸都城)의 간주리(干朱理)가 모반한 것도 고구려 내부의 동요를 보여주는 것이다.이러한 왕권의 동요와 더불어 국제관계도 불안한 상황으로 북아시아의 신흥유목기마민족인 돌궐이 551년에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장군 고흘령(高紇領)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돌궐과의 대치는 고구려로 하여금 매우 큰 국력소모를 가져왔다. 이러한 돌궐과의 대치상태 속에서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상실하는 큰 손실도 입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동위(東魏) 및 동위를 계승한 북제(北齊)와의 교류를 계속하고, 55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使持節侍中 驃騎大將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552년 북제의 사신 최유(崔柳)가 보인 무례한 행위와 553년에 북제의 문선제(文宣帝)가 고구려의 세력이 미치고 있던 거란족에 대하여 친정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양서 梁書》에 따르면 양원왕의 즉위년은 548년이 되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545년이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魏書 . 北齊書 . 北史 . 梁書 . 日本書紀 .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李龍範, 史學硏究 4, 1959)
高句麗의 漢江流域喪失의 原因에 대하여(盧泰敦, 韓國史硏究 13, 1976)
5∼6世紀 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제25대 평원왕(平原王?-590 / 영양왕1년)재위559~590〉
이름은 양성(陽成) 또는 탕(湯). 일명 평강상호왕(平岡上好王)· 평강왕(平岡王)· 평국왕(平國王)이라고도 한다. 양원왕의 장자로 태어나 557년(양원왕 13) 태자가 되고, 559년 왕위를 계승하였다. 담력이 있고 승마와 활쏘기에 능하였다.560년(평원왕 2) 졸본(卒本)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재위 중 왕의 음식을 줄이고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하며, 552년부터 짓기 시작한 장안성(長安城)의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양원왕의 즉위 이래 계속된 내분과 민심의 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그러나 왕의 전제적 권한은 이미 귀족세력들의 발호에 의해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586년에는 지금의 평양 대성산성(大聖山城) 일대에서 장안성으로 궁을 옮겼다.외교면에서 당시의 중국은 남조의 진(陳)나라 및 북조의 북제(北齊)·북주(北周)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전통적인 외교정책대로 이들과 두루 교섭관계를 가짐으로써 국제관계의 안정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56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영동이교위 요동군공 고구려왕 (使持節領東夷校尉 遼東郡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563년에는 진나라로부터 ‘영동장군(寧東將軍)’의 지위를 받았다. 또한, 580년에는 북주에 조공을 하고 ‘개부의동삼사대장군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開府儀同三司大將軍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581년에는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가지고 ‘대장군요동군공(大將軍遼東郡公)’의 지위를 받았다.
이같이 표면적으로 순탄한 관계를 가진듯 하지만 양원왕 이래 북조와의 관계는 평탄하지 않았다. 북주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공격하여 왔을 때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에서 싸웠고, 또 590년에는 수나라가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 이같은 사실로 미루어 당시 중국의 통일이 고구려에 주는 정치적·군사적 부담이 점차 가중되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586년에 고구려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별부(契丹別部) 출복(出伏) 등이 이탈하여 수나라에 투항하였다. 돌궐(突厥)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양세력의 긴장된 상태는 여전하였다.
한편, 한강유역의 점령을 둘러 싸고 기존의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빈발하자, 고구려는 이들과 소강상태를 유지한 채 북방과 서방의 변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北齊書 . 周書 . 隋書 . 陳書 . 5·6世紀 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關野貞, 朝鮮の建築と藝術, 1941).
〈제26대 영양왕(嬰陽王?-618/영류왕1년) /재위590~618.〉
일명 평양왕(平陽王)이라 하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준수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565년(평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평원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정치가 어떠하였는지를 전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을 시켜 종래의 《유기 留記》 100권을 정리하여 《신집 新集》 5권이라는 역사서를 낸 것이 주목된다.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도 역사서를 편찬한 왕들은 왕조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군주들임을 생각할 때, 영양왕대의 역사서 편찬은 부왕인 평원왕 이래의 국가의 안정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결실을 계승, 발전시킨 국력의 바탕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대외관계에 있어서 영양왕의 위치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원적인 축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6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589년 수나라의 중국통일로 재편성되어가는 와중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왕은 즉위와 더불어 수나라 문제(文帝)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 (上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또한 부왕이 가지고 있던 요동군공(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계승하는 한편, 조공을 통하여 수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모색을 시도하였다. 반면에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말갈족 · 거란족들을 조종하여 자기편에 넣고 돌궐족과의 제휴도 모색하였다. 이와같이, 화전양면에 대비하면서 노력하는 가운데에, 왕은 598년에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는 국력을 총집결하여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수나라의 침입,
제1차 침입은 598년에 고구려군의 요서공격에 대한 반발로 수나라의 30만 군사가 쳐들어왔으나 기근 · 질병 · 장마 등으로 저절로 퇴각하였다.
제2차 침입은 612년에 양제(煬帝)가 국력을 경주하여 130만 대군으로 수륙 양면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동성(遼東城)에서 지구전을 펴 수군의 침략예봉을 꺾고, 또 대동강에서는 침략군의 해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수나라는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 가까이 진격하였으나 군량의 부족으로 후퇴하던 도중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에 의하여 살수(薩水)에서 참패를 당하여 총퇴각하였다.
제3차 침입도 613년에 있었으나 요동성·신성(新城) 등에서 고구려군이 선전하였고, 또한 수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게 되었다.
제4차 침입은 614년에 있었는데, 수나라 내부의 혼란과 고구려의 평화교섭의 때가 일치하여 철군하였다.
이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피해를 입은 수나라는 곧 멸망하였으나, 고구려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신라와는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하여 온달(溫達)이 아단성(阿旦城)을 공격하였고, 603년과 608년에는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던 신라는 적극적으로 수나라와의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또, 백제에 대해서도 백제가 수나라와 접근책을 쓰므로 598년과 607년에 이를 공격하였으나, 수나라와의 대결을 위하여 한편으로는 관계 개선에도 노력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595년에는 일본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된 혜자(惠慈)가 도일하였고, 610년에는 담징(曇徵)·법정(法定) 등을 파견, 일본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隋書 . 日本書紀 . 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盧重國, 東方學志 28, 1981).
5, 6世紀 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隋唐二朝高句麗遠征の地理(松井等, 滿洲歷史地理 1, 1913) . 高句麗攻守の形勢(末松保和, 靑丘史草 1, 1965).
〈제27대 영류왕(榮留王?-642/보장왕1년) /재위618~642.〉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 하였으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의 개인적 성품이나 행적 등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삼국사기》를 통하여 그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자취만을 엿볼 수 있다.
왕의 즉위년(618)에 중국에서는 수(隋)나라를 이어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아울러,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였다. 이에 양국은 외교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영류왕 5)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하여 도교(道敎)가 들어왔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그러나 당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복속시키면서 양국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고구려인의 입학을 요청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척하였지만,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隋軍)격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한다든지(631),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기까지 하여(641), 양국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나갔던 것이다.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여 그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 이같이 형식적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娘臂城)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같이 대외관계가 긴장된 가운데, 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에 의하여 몸이 토막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과 연개소문간의 알력의 원인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던 듯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당(對唐) 외교정책 등의 이견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舊唐書 . 新唐書 . 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李弘植,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제28대 보장왕(寶藏王?-682)재위642~668〉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장(臧, 藏) 또는 보장(寶臧, 寶藏)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왕명은 대부분 시호이나 이 왕은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太陽王)의 아들이다.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비록 왕위에 있었지만 연개소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가지지는 못했다.재위기간 중 국내적으로는 천재지변이 잦았고,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요청하여 도사(道士)를 초빙하는 등 도교 진흥책을 썼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 종교계에서 기득권을 가진 불교세력의 반발이 심하였고 보덕(寶德)과 같은 승려는 650년 백제로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도교진흥책에 대해서는 도교를 숭신하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한편, 재위기간중의 국제관계는 즉위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정책으로 말미암아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또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적대관계를 계속하여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서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倭)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그래서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자신이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말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하여 고구려를 피폐하게 하기도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던 당 태종이 649년에 죽음으로써 당나라와의 관계는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지만,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고구려 정복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654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는가 하면 655년에는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는 등,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세력들을 공격하여 당나라 군사를 자극했다. 이 때문에 655년부터 당나라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660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다시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평양성에까지 침입해온 당군을 물리친 적도 있었다.백제멸망 이후 백제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자 신라와 당나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하여 당나라와의 직접 충돌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663년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어가던 부여풍(扶餘豊: 豊璋이라고도 함.)이 고구려로 망명함으로써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데다가,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듬해인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南生) 형제간의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했지만 패배를 거듭했고 마침내 668년 9월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정치의 책임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하여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 (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치열한 반당운동으로 말미암아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요동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 朝鮮郡王)에 임명되어 당나라에 잡혀간 많은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 州 : 四川省 峽)로 유배되고 말았으며, 682년경 사망하였다.
죽은 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운구되어, 돌궐 가한(可汗)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힐리( 利)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으며,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남복(男福, 또는 福男)· 임무(任武)· 덕무(德武)· 안승(安勝) 등이 기록에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舊唐書 . 新唐書 . 資治通鑑 . 日本書紀 . 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李乃沃, 歷史學報 99·100합집, 1983).
高句麗國遺民反唐分子の處置(日野開三郎, 日野開三郎東洋史學論集 8, 1984).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 > 역대왕사(高句麗歷代王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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