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역대왕사(高句麗歷代王史)

高句麗 歷代 王 1代(東明聖王) ~ 7代 (次大王)

鄕香 2006. 3. 2. 00:40

< 1대. 始祖 동명성왕 (東明聖王) 서기전 58∼서기전 19.>  재위 서기전 37∼서기전 19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즉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 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또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에 대하여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 등 일본문헌에는 ‘도모(都慕:일본음 쓰모)’라고 하였다. 이들 일련의 한자(漢字)표기는 모두 동명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문헌인 《위략 魏略》, 《후한서 後漢書》 부여전, 《양서 梁書》 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조가 동명이라 되어 있고, 《위서 魏書》· 《주서 周書》· 《남사 南史》· 《북사 北史》· 《수서 隋書》 고구려전에는 고구려의 시조가 주몽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동명을 시조로 모시는 전통은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래 동명과 고구려 시조 주몽은 다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몽설화도 문헌기록에서 볼 때 동명설화와 줄거리가 구조적으로 똑같다. 그 특징은 ‘단군(檀君)’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왕자(王者)의 정치적 권위의 원천을 하늘에 귀속시키면서 농업생산을 좌우하는 ‘물의 신령’의 권위를 아울러 주장하는 새로운 종교사회사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였으며, 해모수는 동시에 북부여의 왕이었다. 이것은 그가 동부여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왕실의 법통의 근원을 북부여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몽의 어머니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부인(柳花夫人)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정을 통한 뒤 집에서 쫓겨났다. 이때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유화부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상히 여겨 방 속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따라다니며 비치어 태기가 있어 큰 알을 하나 낳았다.금와왕은 그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에 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 갔다. 또 들판에 버렸더니 새들이 모여 날개로 덮어주었으며 알을 깨뜨리려 하였지만 깨어지지 않아 드디어 유화부인에게 되돌려주었다. 이에 알을 덮어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골격과 생김새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7살에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므로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금와왕에게는 일곱 왕자가 있었는데 큰아들 대소(帶素)가 “후환이 두려우니 제거함이 옳다.”고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그는 날랜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둔한 말에게는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니 왕이 살찐 말을 골라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러나 왕자들과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고 꾀하니, 유화부인이 “멀리 도망가서 큰 일을 도모하라.”고 이르니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세 사람으로 벗삼아 엄체수(淹遞水, 또는 蓋斯水, 掩遞水, 奄利大水)에 이르렀다.
이때 주몽이 강물에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망하다가 뒤쫓는 군사가 닥치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이 건너자 곧 흩어져 뒤쫓는 군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 한편 어머니 유화부인이 비둘기 한쌍을 보내어 보리씨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모둔곡(毛屯谷:지금의 渾河流域)에서 재사(再思)· 무골(武骨)· 수거(獸居) 등 세 사람의 신하를 얻었다. 개국과 치적
졸본(卒本:일설에는 紇升骨城)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서기전 37년에 나라를 세워 고구려라 하였다. 왕위에 올라 서기전 36년(동명성왕 2)에 비류국(沸流國) 송양왕(松壤王)의 항복을 받고, 서기전 33년에는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고, 서기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서기전 24년에 유화부인이 죽자 동부여의 금와왕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서 첫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類利:뒤에 유리명왕)가 도망하여 오므로 태자로 삼았다.이해 9월에 왕이 돌아가니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온 뒤 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었다고 하였다. 

주몽설화의 특징

그런데 주몽설화는, 첫째 여자를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어 태기가 생기고, 둘째 알을 낳고, 셋째 태어난 땅에서 달아나, 넷째 물고기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여, 다섯째 새로운 땅에서 왕이 되었다는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첫째는 단군과 마찬가지로 주몽이 천손(天孫)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어머니 유화부인이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굴 속에 갇혔던 것처럼 방 속에 갇혔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주몽설화 또는 동명설화에는 단군의 전통에서 볼 수 없었던 넷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가 하백의 외손으로 물의 신령의 영험스러운 능력을 지녔다는 것으로 비를 다스리는 주술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다. 즉 단군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면서도 새로운 농경사회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國李相國集 .朝鮮金石總覽 上 . 魏略 . 後漢書 . 梁書.魏書.周書.南史.北史.隋書.新撰姓氏錄
人物로 본 韓國古代史(千寬宇, 정음문화사, 1982).고구려의 흥기 1(李弘稙, 국사상의 제문제, 1959)
東明王篇에 보이는 神母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柳洪烈博士 華甲記念論叢, 1971).高句麗 瑠璃王考(金龍善, 歷史學報 87, 1980)
東明型說話와 古代社會(鄭璟喜, 歷史學報 98, 1983)

 

 

 

 

< 2 代 유리왕 (琉璃王) ?∼18(유리왕 37).> 재위 서기전 19∼서기 18.
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 또는 누리(累利)이다. 《위서》 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동명왕주몽(朱蒙)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부여에서 아버지 주몽을 찾아 서기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고구려로 와서 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서기전 17년(유리왕 3)에는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 黃鳥歌〉를 지었고,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년에는 중국의 왕망(王莽)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군사의 출동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漢)나라를 공격하자 왕망은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비칭(卑稱)하였다.
13년에 부여가 침범하였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18년 두곡리궁(豆谷離宮)에서 사망하였으며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왕자 도절(都切)을 태자로 삼았으나 1년에 사망하여, 4년에 다시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외국과 분쟁을 일으키므로 자결시켰다. 그뒤 14년 왕자 무휼(無恤)을 태자로 책립하였는데, 18년에 유리왕이 사망하자 그가 대무신왕으로 즉위하였다.  유리왕과 동명성왕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관계에 있으며, 동명왕과 유리왕 사이의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활동 등 여러 면에 있어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고 주몽과 대응하는 관계에 있는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동명왕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로, 그리고 제6대 태조왕 이후는 다시 고씨(高氏)로 되어 있다. 또,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이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나타나 있다.이러한 사실들은 주몽과 유리왕의 혈통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혈통이 다르다는 것은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게 한다.
즉,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해씨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뒤에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리왕은 고구려 초기 왕실의 교체문제를 해결하여 줄 수 있는 주요한 왕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東明王篇(李奎報)
高句麗國號考(李丙燾, 서울大學校論文集 人文社會科學 3, 1956; 韓國古代史硏究, 1976)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金哲埈, 李丙燾博士 華甲紀念論叢, 1956;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高句麗琉璃王小考(金龍善, 歷史學報 87, 1980)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就いて(池內宏, 東亞學 3, 1940; 滿鮮史硏究 上, 1951)

 

 

 

<3代 대무신왕 (大武神王) 4(유리왕 23)∼44(민중왕 1)> 재위 18∼44

일명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이름은 무휼(無恤)이다. 어머니는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讓)의 딸이다.
14년(유리왕 33) 11세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5세에 즉위하였는데, 27년 동안 재위하면서 고구려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동부여왕(東扶餘王) 대소(帶素)와 싸워 그를 죽이고, 그 땅을 병합하였으며, 26년 압록강 상류 방면의 개마국(蓋馬國)을 정복하고, 이어 이웃의 구다왕국(句茶王國)의 항복을 받았다.
28년 한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략해왔으나 송옥구(松屋句)와 을두지(乙豆智)의 지략으로 물리쳤고, 32년 호동왕자(好童王子)의 활약으로 낙랑을 공격하는 등 성장된 국력을 과시하면서 국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이해에는 후한(後漢) 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으로도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대내적으로는 을두지·송옥구 등 많은 인물을 등용하고, 처음으로 좌·우보체제(左右輔體制)를 설치, 확립시켜 이들로 하여금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한 문제를 다루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 형성을 위한 첫 단계를 만들었다.
44년에 사망하였으며, 대수촌원(大獸村原)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의 그의 본기(本紀)에는 〈적오설화 赤烏說話〉· 〈부정설화 負鼎說話〉· 〈초인설화 草人說話〉· 〈이어설화 鯉魚說話〉·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설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설화들은 고구려의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志 . 後漢書 . 高句麗 初期의 左·右輔와 國相(李鍾旭, 全海宗博士 華甲紀念 史學論叢, 1979)

 

 

< 제4代 민중왕 (閔中王) ?∼48 > 재위 44∼48.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인데 《삼국유사》에는 ‘해’를 성씨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3대왕인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解優:뒤의 모본왕)가 어리므로 왕의 아우인 민중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민중왕은 대무신왕의 아들이며 모본왕의 동생이라고 되어 있다.
5년 동안 재위하였는데 재위 4년 만인 47년 7월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다가 한 석굴을 찾아내고 좌우의 신하에게 자신의 장지(葬地)로 삼아줄 것을 유언하였다. 그해 10월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大加)인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 48년에 죽었는데 생전에 그가 선정해 놓았던 민중원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제5代 모본왕 (慕本王) ?∼53 > 재위 48∼53

일명 ‘막래(莫來)’이며, 이름은 《삼국사기》에는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는 ‘해(解)’를 성으로 보아 ‘애류(愛留)’ 또는 ‘우(憂)’라 하였다.
제3대왕인 대무신왕의 원자(元子)로 태어나 32년(대문신왕 15) 12월에 태자로 책립되었으나 왕이 죽자 아직 태자가 어리다 하여 대무신왕의 동생인 민중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뒤 민중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모본왕이 민중왕의 형이라 하였다. 모본왕은 성품이 사납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한을 사 마침내 재위 6년 만에 신하인 모본인(慕本人) 두로(杜魯)에게 피살되어 모본원(慕本原)에 장사지냈다. 대외적으로는 49년(모본왕 2)에 한(漢)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에 쳐들어간 사실이 있다.즉위년 10월에 왕자 익(翊)을 태자로 책립하였으나 모본왕이 죽은 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인 궁(宮)이 제6대왕인 태조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궁의 성은 고씨(高氏)이므로 모본왕을 마지막으로 하여 소노부(消奴部) 출신의 유리왕계의 해씨왕시대(解氏王時代)는 끝이 나고 계루부고씨(桂婁部高氏)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었다고도 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三國遺事.魏書.高句麗琉璃王考(金龍善, 歷史學報 87, 1980).慕本人杜魯(趙仁成, 歷史學報 87, 1980)

 

 

 

< 제6代 태조왕(太祖王) 47(민중왕 4)∼165(차대왕 20) > 재위 53∼146
국조왕(國祖王) 또는 태조대왕(太祖大王)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이름은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볼 줄을 알았고 어려서부터 영리하였다고 한다.
53년에 모본왕이 살해되자 여러 관리들이 재사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재사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므로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 나이가 7세에 불과하여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56년(태조왕 4) 동옥저를 정복하여 성읍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였고, 68년에는 부여의 망명세력인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하였으며, 72년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어 조나(藻那)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았고, 74년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로 하여금 주나(朱那)를 공격하게 하여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는 등, 주변소국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98년의 8개월에 걸친 책성(柵城)의 순수, 102년의 책성 안무(安撫), 114년의 남해(南海) 지방순행 등을 통하여 확보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후한(後漢)에 대하여 때로는 사절을 파견, 평화공세를 펴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투쟁을 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극복하고 서방진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즉, 55년 요서지역에 10성을 쌓게 하여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105년에는 후한의 요동군(遼東郡)을, 111년과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玄菟郡) 및 낙랑군 소속의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그리하여 121년 1월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항복하는 체하면서 오히려 요동·현도를 공격하고 현도군 소속의 후성(候城)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동군 소속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태수 채풍을 살해하였고, 12월과 이듬해인 122년에는 마한·예맥과 더불어 현도군·요동군을 공격하였다.
146년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왕은 재위기간 동안 후한의 압력차단과 서방진출 기도를 통하여 고구려의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68년에는 투항해온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를 우태(于台)로 삼았고, 74년에는 공파한 주나의 왕자 을음을 고추가에 임명하는 등, 주변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왕권하에 흡수함으로써 전제왕권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

이때부터 또 계루부(桂婁部)에 의한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후한 유주자사 풍환의 침입을 격파하면서 점차 권력을 장악한 동생 수성(遂成)이 왕위까지 노리자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6년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165년 나이 119세로 죽었다.
이때 신대왕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태조왕이 죽은 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165년이라고 한 반면에, 《후한서》에는 121년이라고 되어 있다. 만약 《후한서》에 따른다면 재위도 121년에 끝나므로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왕의 업적이 아닌 것이 되기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三國遺事.後漢書.高句麗王妃族考(李基白, 震檀學報 20, 1959).高句麗王系小考(鄭早苗, 朝鮮歷史論集 上, 1979).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池內宏, 東亞學 3, 1940; 滿鮮史硏究―上世篇―, 1951)

 

 

 

< 제7代 차대왕(次大王)71(태조왕 19)∼165(차대왕 20) > 재위 146(혹은 121)∼165.

이름은 수성(遂成). 태조왕의 동생(후한서에는 아들로 전한다.)이다. 용감하나 인자함이 적은 성품이었다.
121년(태조왕 69)에 후한(後漢)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등의 고구려침공을 격파하였고, 그 공으로 군사와 국정 전반에 관한 업무를 장악하였다. 이에 더욱 그 세력이 커져 측근세력들과 더불어 왕위찬탈까지 꾀하다가, 마침내 태조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 76세였다고 한다.
즉위 후 147년(차대왕 2)에는 측근세력인 관나 패자(貫那沛者) 미유(彌儒), 환나 우태(桓那于台) 어지류(어支留), 비류나 조의(沸流那조衣) 양신(陽神) 등을 각각 좌보(左輔)·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하여 자기 세력을 강화하는 한편 태조왕의 측근세력인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과 태조왕의 아들인 막근(莫勤)·막덕(莫德)을 제거하고, 나아가 자신의 동생 백고(伯固)를 핍박하는 등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재위기간 동안에 천재지변이 되풀이되면서 사회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165년 연나 조의(椽那조衣)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당하였다. 동생 신대왕 백고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후한서》에는 왕의 즉위년이 121년이고, 122년에는 후한에 중국인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등 평화공세를 펴기도 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後漢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