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역대왕사(高句麗歷代王史)

高句麗 歷代 王 제15대 미천왕(美川王)~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

鄕香 2008. 1. 3. 20:10

 

<제15대 미천왕(美川王)?∼331(고국원왕 1)> 재위 300∼331

일명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乙弗)·을불리(乙弗利) 또는 우불(憂弗)이며 서천왕의 손자이고, 고추가 돌고(돌固)의 아들이다.
293년(봉상왕 2) 아버지가 형인 봉상왕에 의하여 반역혐의로 죽음을 당하자 피신하여 고용살이·소금장수 등으로 전전하다가,

 300년 봉상왕이 폐위당하자 국상 창조리(倉助利) 등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기간 중 진(晉)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적극적인 대외팽창책을 추진하였다.

302년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 8천여명을 사로잡고,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며,

313년과 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오랜 투쟁 끝에 각각 병합하였고,

317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서방과 남방으로의 급속한 팽창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4세기초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가 요동지방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해옴에 따라,

필연적으로 모용부와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의 권유에 따라 역시 선비족의 일파인 단부(段部)· 우문부(宇文部)와

더불어 모용부를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그뒤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여 국경을 정하게 되자,

모용부와의 긴장관계가 더욱 고조되었다.

319년 고구려의 장군 여노자(如奴子)가 모용부의 군대에 의하여 포로가 되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측은 자주 요동을 공격하여 양자는 일진일퇴를 되풀이하였다.

330년 후조(後趙)에 사신을 파견하여 중원세력과의 연결을 통하여 모용부를 견제하고자 노력하였다.

331년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美川之原)에 장사지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342년(고국원왕 12) 전연(前燕)의 군대에 의하여 발굴되고 시체를 가져갔으므로 고국원왕은 그 다음해

전연에 사신을 보내어 진기한 물건 등을 다수 주고 시체를 찾아오게 하였다. 그뒤 시체의 재매장에 관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요즈음 황해도 안악군소재의 안악 제3호분을 놓고 이것이 미천왕을 다시 묻은 무덤이라는 주장이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 보이는 미천왕설화는 그의 피신시절의 행적을 전하는 것으로 3세기 후반의 고구려 사회상을

전하는 사실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資治通鑑 . 晉書 . 高句麗國相考 下(盧重國, 韓國學報 17, 1979)
安岳3號墳 被葬者論爭에 대하여(金貞培, 韓國古代史論의 新潮流, 高麗大學校出版部, 1980).
 

 

 

 

<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371> 재위 331∼371 

국원왕(國原王) 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하며, 한때 ‘소열제(昭烈帝)’라 칭하기도 하였으며,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유(劉), 교(釗)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미천왕, 어머니는 주씨부인(周氏夫人)이다. 314년(미천왕 15) 정월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고구려는 미천왕대에 이어 요동지역 확보를 위하여 선비족(鮮卑族)의 일파인 모용부(慕容部)의 국가 전연(前燕)과 심각한 대립을 보였으므로, 왕은 336년 동진(東晉)에 외교사절을 파견한다든지, 338년 전연공격에 실패한 후조(後趙)와의 연결을 꾀하는 등 외교전에서의 우위확보에 노력하였고,

336년 모용황(慕容皝)의 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모용인(慕容仁)의 난’(333∼336)에 가담하였던 곽충(郭充)과 동수(동壽)가 고구려로 도망쳐 오자 이들을 받아들였으며, 다시 338년 후조의 전연공격시 후조에 내통하였던 봉추(封抽) 및 송황(宋晃) 등이 역시 투항해 오자 이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335년 제3현도군지역을 차지하여 그곳에 신성(新城:撫順 北關山城)을 축조하였는가 하면, 342년 국도인 국내성(國內城)을 증축하여 전연과의 대결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후조 및 요서지방의 선비족의 일파인 우문부(宇文部)를 격파, 중원진출을 위한 후방의 안정을 얻기 위하여 342년 기습공격을 감행해 온 모용황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의 국도는 함락, 파괴되고 선왕의 시신 및 왕모 주씨는 인질로 잡혀가는 한편, 왕 자신은 단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하는 등, 일대국난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343년 국도를 평양 동황성(東黃城: 지금의 江界?)으로 옮기는 한편, 전연에 사절을 파견하여 스스로 신하를 칭하기도 하였으며, 349년 고구려로 투항해왔던 송황을 다시 전연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였고,

355년 전연으로부터 ‘낙랑공고구려왕 (樂浪公高句麗王)’에 봉해짐과 동시에 영주제군사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營州諸軍事 征東大將軍 營州刺史)라는 관직을 받기도 하였다. 그뒤 345년 모용각(慕容恪)의 남소성(南蘇城)으로 쳐들어가기는 하였지만, 전연이 중원장악에 주력함에 따라 전연과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370년 전진(前秦)이 전연을 격파하고 고구려와 경역을 접하게 됨에 따라 고구려로 피신해온 전연의 권신 모용평(慕容評)을 전진으로 압송하는 등, 전진과의 우호관계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한편, 왕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여 대방군(帶方郡) 지역으로 북진하고 있던 백제와 격돌하게 되었다. 왕은 369년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였으나, 치양(雉壤: 지금의 白川)전투에서 백제 태자 근구수(近仇首)가 이끄는 군사에 패배하였고, 371년 10월 고구려 깊숙이 진격해온 백제 근초고왕군을 맞아 평양성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여 고국원(故國原)에 묻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隋書 . 晉書 . 梁書 . 資治通鑑 . 高句麗東黃城考(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

高句麗平壤遷都의 動機(徐永大, 韓國文化 2, 1981)
南北朝時代の滿洲(箭內互, 滿洲歷史地理, 1913)
高句麗の南北道と南蘇·木底(今西春秋, 靑丘學叢 22, 1935)
晉代の遼東(池內宏, 滿鮮史硏究, 1951)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 ?∼384(소수림왕 14)> 재위 371∼384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 또는 해미류왕(解味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이다.

제16대 고국원왕의 아들로 355년(고국원왕 25)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10월에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대의 대외진출기도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련의 체제정비를 도모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省門寺의 잘못)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는 한편, 372년에는 유교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유교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정책은 기왕의 부족적 관념체계를 극복하며,

나아가서는 초부족적 국가질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373년에는 국가통치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부족국가시대 이래의 관습법체계를 일원적인 공법체계로 재구성하고 성문화함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체제정비를 위한 시책은

고구려가 4세기말∼5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데 기틀을 마련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374년·375년·376년에 잇달아 백제를 공격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그치지 않았으며,

또 378년에는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연(前燕)이 멸망한 뒤 북중국의 패자로 등장한 전진(前秦)과

372년과 377년에 외교사절을 교환하고 불교를 수용하는 등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력의 분산을 막을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국가체제정비를 위한 일련의 시책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되었다.

죽은 뒤에 소수림(小獸林)에 묻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海東高僧傳
高句麗 思想政策에 대한 몇가지 檢討(李萬烈, 柳洪烈博士 華甲紀念論叢, 1971).
高句麗律令에 관한 一試論(盧重國, 東方學志 21, 1979).

 

 

 

<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 ?~391> 재위 384∼391

이름은 이련(伊連), 이속(伊速) 또는 어지지(於只支)이며,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고국원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하여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보다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쪽으로는 385년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제3현도군을 점령하는 등, 《자치통감》 권106에 실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에 의하면, 385년 이후 “후연은고구려를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후연에 대하여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때 확보한 요동·현도의 두 군은 386년 다시 후연에 빼앗겼다.

또, 남쪽으로는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고, 389년과 390년 백제의 침공을 받는 등 백제와 공방전을 되풀이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북으로는 후연, 남으로는 백제와 대립하면서 국력을 신장하였다. 한편,《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 내물마립간으로 하여금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게 하였고, 또 불교신앙의 확대를 꾀하였으며, 국사(國社), 즉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고구려 세력권의 확대나 불교이념의 보편화 및 왕실시조신앙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제사체계정비 등의 사상정책을 전하는 주목할 만한 기사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392년은 광개토왕 2년에 해당되는 만큼, 그것을 고국양왕 말년의 사실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광개토왕의 사실로 볼 것인가에 대하여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廣開土大王陵碑文 . 資治通鑑

 

 


 < 제19대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374(소수림왕 4)∼413(광개토왕 23)> 재위 391∼413

재위기간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

고국양왕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고상했는데, 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비록 그 구체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의 전하는 바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시호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 백제·신라와의 관계*

먼저 예성강을 경계로 그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해온 백제에 대해서는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에는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석현성(石峴城:開豊郡 北面 靑石洞)을 비롯한 10개 성을 빼앗는가 하면 이어서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자랑하는 관미성(關彌城:江華 喬桐島)을 20여일 만에 함락시킨다.

또,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온 백제군을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지금의 新溪)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지금의 禮成江)에서 각각 격퇴하고 백제와의 접경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파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많은 전리품과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다는 맹세를 받고 백제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는 대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백제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세력만회를 위해 왜(倭)를 내세워 399년에는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는 신라를 공격했고

404년에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침공해왔지만,

이 또한 5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에서 몰아냄은 물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고,

나아가서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한다

(광개토왕릉비에는 407년 작전의 대상을 전하는 부분이 마멸되어 있어 이를 후연(後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백제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또,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으며,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 서방으로의 영역 확장*

이러한 남방으로의 세력확장과 함께 서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기도 했는데,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다. 후연과는, 396년 모용보(慕容寶)가 후연왕으로 즉위하여

 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 (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에 책봉하는가 하면 400년에는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400년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옴으로써 양국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이에 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여 402년에는 요하를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여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를 도망치게 했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리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비롯한 요하(遼河) 이동지역을 차지한다.

그리고 후연왕 모용희(慕容熙)에 의한 405년의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木抵城:지금의 木奇) 침입을 물리침으로써

요하 이동지역에 대한 장악을 더욱 확고히 한다.
대왕이 산둥성에 중심을 둔 남연(南燕)의 왕 모용초(慕容超)에 대하여 천리마 등을 보내면서 접근을 꾀한 것도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인 것같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北燕)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된다.

이밖에도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契丹)을 정벌하여 남녀 5백인을 사로잡고 거란에게 빼앗긴 고구려인 1만인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로 추측되는 비려(碑麗)를 친정하여 염수(鹽水)방면의 부락 6백∼7백 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여 개선했다.
그리고 398년에는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식신(息愼), 즉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고,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豆滿江 하류 방면의 琿春說과 함남 남부와 강원 북부에 걸치는 永興灣 방면설이 있음.)를 친정하여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이렇듯 정력적인 정복사업의 결과, 재위기간 중 64성과 1,400촌락을 공파하였으며,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팽창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혼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유역에 이르게 했다.

* 내정정비*

대왕은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다음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한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정비의 결과라고 하겠다.

그러나 412년 3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414년 능(陵)에 옮겨 묻고 생전의 훈적을 기록한 능비(陵碑)를 건립하였다.

능과 능비는 지금도 중국 길림성 집안현(輯安縣)에 남아 있는데, 능에 대해서는 장군총(將軍塚)설과 태왕릉(太王陵)설이

갈라져 있으며, 능비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는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참고문헌 )

三國史記 . 廣開土王陵碑文 . 晉書 . 梁書 . 資治通鑑 . 太平御覽 . 廣開土大王陵碑新硏究(李亨求·朴魯姬, 同和出版公社, 1986).
好太王碑硏究(王健群, 吉林人民出版社, 1984) . 廣開土王의 雄略(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廣開土王陵碑文國論(千寬宇, 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9)
廣開土王陵碑文에 나타난 韓日關係(金述鶴, 日本學 1, 1981) .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徐永大, 韓國文化 2, 1982).
廣開土好太王期의 內政整備에 대하여(朴性鳳, 千寬宇先生 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好太王征服地域考(津田左右吉, 朝鮮歷史地理 1, 1913) . 好太王碑面の地名について(酒井改藏, 朝鮮學報 8, 1955)
高句麗廣開土王紀の社外關係記事(武田幸男, 三上次男 頌壽紀念 東洋史考古學論叢, 1979)

 

< 제20대 장수왕(長壽王)394(광개토왕 4)∼491(장수왕 79)> 재위 413∼491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한 대중국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하여 통일되었으며,

남중국에는 한족에 의한 동진(東晉, 317∼420)·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하여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한 이래,

동진을 이은 송·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소환요청을

거절한다든지, 466년 북위의 혼인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일시 북위와의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연결을 가져,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평양천도와 남진정책

이렇듯 장수왕은 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세력들과 다각적인 외교를 통하여 서방의 안정을 이룩하였고,

이를 토대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였고,

427년에는 국내성(國內城:지금의 輯安縣 通溝)에서부터 평양성

(平壤城:지금의 평양시가지 동북방 6∼7㎞ 지점에 위치한 大城山城일대)으로 천도를 단행하여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의 약화 및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또 평양천도를 계기로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55년에는 백제에서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하여 백제를 공격하였고,

475년에는 승려 도림(道琳)을 이용하여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한 다음, 왕 자신이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그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로 하여금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백제 및 백제와 연결된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적극 차단하였다.
한편,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하여 눌지마립간을 옹립하는 등,

처음에는 우월적인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의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자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481년에는 호명성(狐鳴城:지금의 경상북도 靑松郡 虎鳴山?)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지금의 흥해)까지 진격하였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고구려와 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입하기 직전,

고구려가 아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남쪽으로는 아산만·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고,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하여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룩하게 되었다.

죽은 뒤

491년에 98세로 죽자, 북위는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신 고구려왕 (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功臣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서 북위의 장수왕에 대한 평가를 짐작하게 한다.
장수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현(吉林省輯安縣)에 있는 장군총(將軍塚)으로 비정하는

견해와, 평양 부근에 위치한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으로 비정하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魏書 . 晉書 . 南齊書 . 高句麗 平壤遷都의 動機(徐永大, 韓國文化 2, 1981).
長壽王征服地域考(津田左右吉, 朝鮮歷史地理, 1913).
北魏の對外政策と高句麗(三崎良章, 朝鮮學報 102, 1983) . 長壽王の東アジア認識(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ジア, 1989).



<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519(안장왕 1)> 재위 492∼519

일명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나운(羅雲)이다. 장수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 의하여 양육되다가 장수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자료의 인멸로 그의 내치(內治)가 어떠하였던가는 잘 알 수 없으나,

498년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한 사실을 보면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확립에도 노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전대(前代)의 외교정책을 따라서 남북조의 분열을 잘 이용하여 국제질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였다.

즉, 즉위와 더불어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낭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았고,

북위와 이른바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동시에 494년 제(齊), 508년 양(梁) 등 남조의 국가로부터 각각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

(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과 ‘무동대장군개부의동삼사(撫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도 가졌다.

또한 494년 물길족(勿吉族)에 의하여 멸망당한 부여의 왕과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에 대한 침공을 통하여 497년 신라의 우산성(牛山城), 512년 백제의 가불성(加弗城) 및 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나제군사동맹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문자명왕은 광개토왕 및 장수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전성기를 지속시킨 인물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魏書 . 南齊書 . 梁書 .
5·6世紀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平壤淸巖里廢寺址の調査(小泉顯夫, 昭和13年度古蹟調査報告, 1975 復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