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代 효성왕(孝成王)?~742 >재위737~74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경(承慶).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태자 중경(重慶)이 717년에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계비(繼妃)인 소덕왕후(炤德王后)이고,
비는 739년에 맞아들인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혜명(惠明)이다.
효성왕은 즉위하면서 사정부(司正府)의 승(丞)과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의 승을 모두 좌(佐)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승(丞)’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즉위하던 해(737) 3월에 이찬 정종(貞宗)을 상대등에 임명하여 귀족회의를 관장하게 하고 아찬(阿飡) 의충(義忠)을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739년 의충이 죽자 이찬 신충(信忠)을 중시에 임명하고, 왕제(王弟)인 헌영(憲英:뒤의 경덕왕)의 관등을 파진찬(波珍飡)으로
하여 태자로 삼았다. 또, 전 왕인 성덕왕 때에 정상화된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 통로를 이용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특히 738년에 당나라 사신 형숙(邢璹)이 신라에 올 때 당나라 현종(玄宗)이 그에게 ‘신라는 군자(君子)의 나라’라고
일러준 것을 보아도 당시 신라의 문화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때 형숙은 《노자도덕경 老子道德經》을 비롯한 서책을 왕에게 바쳤는데,
여기서 신라의 선진문물에 대한 수용자세를 엿볼 수 있다.
740년에는 파진찬 영종(永宗)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되었다.
반란의 원인은 영종의 딸이 효성왕의 후궁이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비가 이를 시기하여 그의 족당(族黨)과 더불어
후궁을 모살하였다. 이에 영종이 왕비의 족당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보면 단순한 여인들의 투기가 정치적 반란을 유발한 것 같으나
실제는 성덕왕대에 전성을 구가하던 중대(中代) 왕실의 전제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부터 그간에 축적되었던 정치적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전제왕권 하에서 억압되었던 귀족세력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다시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741년에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정종과 경덕왕대에 상대등으로 활동하는 사인(思仁)이 왕을 대신하여
열병(閱兵)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재위 6년째되던 742년 5월에 죽으매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35代 경덕왕(景德王)?~765 >재위742~765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憲英)으로 알려진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효성왕의 친동생으로서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어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처음에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나,
743년 다시 서불한(舒弗邯)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경덕왕 때에 이르러 새로운 귀족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경덕왕과 행정 책임자였던 '중시'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실시했다.
744년에 이찬 유정(惟正)이 '중시'에 임명된 이후, 대정(大正), 조량(朝良), 김기(金耆), 염상(廉相), 김옹(金邕), 김양상(金良相) 등 7인이 경덕왕 때에 중시를 지냈다.
특히, 747년에 중시의 명칭을 '시중(侍中)'으로 바꾸었으며, 또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를 두어 유학 교육을 진흥시키고,
748년에는 정찰(貞察) 1명을 두어 관리를 규찰하게 하여,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왕권을 유지하려는 경덕왕의 노력은 전제왕권을 안정시킨 성덕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을 조성하기 시작한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밖에도 749년에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인을, 758년에는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이것은 모두 백성을 생각하는 이상적인 유교정치의 기술적인 분야를 발전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덕왕의 개혁적 제도정비는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전제왕권체제를 강화하려는
일종의 한화정책(漢化政策: 중국의 것을 모방하는 정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한화정책은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745년에 이르러 귀족세력을 대표하여 상대등이 된 김사인(金思仁) 등이
그 비판의 주역이었다.
그는 756년 상소에서, 최근의 빈번한 천재지변을 들어 현실정치의 모순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시중에 대해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이때의 비판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경덕왕이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가 비판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김사인은 757년 병을 이유로 하여 상대등에서 물러났고 대신
왕의 측근인 이찬 신충(信忠)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755년에 시중으로 있는 동안 김사인의 비판을 받았던 김기가 757년부터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757년에는 지방 9개주의 명칭을 비롯한 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덕왕과 집사부가 추진한 한화적 개혁정치는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의 혜공왕 때에 가서 모두 옛 명칭으로 환원된 것은 이같은 사실을 잘 말해준다.
이것은 다시 혜공왕 때에 귀족세력의 정치적 비중이 왕권보다 높아지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경덕왕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는, 전통적 방법인 조공과 하정(賀正)의 사신을 11회나 당나라에 파견함으로써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였다. 경덕왕이 즉위하던 해에 일본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753년에 다시 왔으나 오만하고 무례하다는 이유로 왕이 접견하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으로 이를 알 수 있다.
757년에 내외관리의 월봉을 혁파하고 다시 녹읍을 부활시켰다.
이것은 새로이 성장하는 귀족세력의 경제적인 욕구가 지금까지 세조(歲租)만 받던 월봉을 혁파하게 하고,
녹읍의 부활을 제도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경덕왕 말기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귀족세력은 763년에 경덕왕의 측근세력이었던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을 면직시켰다.
왕당파인 이들의 면직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상에 나타나지 않으나, 왕권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의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은 김옹이 물러난 뒤 약 4개월의 공백기를 거쳐, 764년 만종(萬宗)과 양상이 각각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여기서, 양상은 나중에 상대등으로서 혜공왕을 시해하고 신라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인물로서,
경덕왕 때에 이미 귀족세력을 대표하고 전제왕권에 도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경덕왕 말년의 정치는 왕권과 귀족세력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덕왕은 죽은 후 모지사(牟祗寺)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왕릉은 월성군 내납면 부지리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7) .
新羅의 祿邑에 對하여(姜晉哲, 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論叢, 1969).
新羅中代王室과 奉德寺(李昊榮, 史學志 8, 1974) .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 36代 혜공왕(惠恭王)?~780 >재위765~780.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건운(乾運). 경덕왕의 적자(嫡子)로서 760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서불한(舒弗邯) 의충(義忠)의 딸 만월부인(滿月夫人)김씨이고,
이찬 유성(維誠)의 딸인 신보왕후(新寶王后)가 원비(元妃), 이찬 김장(金璋)의 딸인 창창부인(昌昌夫人)이 차비(次妃)이다.
혜공왕은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 계승된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마지막 왕이다.
즉위했던 때의 나이가 8세였으므로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혜공왕대에는 집사부(執事部) 중시(中侍, 또는 侍中)를 중심으로
강력한 전제왕권 체제를 구축했던 신라 중대사회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노정되었다.
즉 전제왕권의 견제하에 있던 귀족세력들이 정치일선에 등장하여 정권쟁탈전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혜공왕의 재위 16년 동안에는 많은 정치적 반란사건이 있었다.
먼저 일길찬(一吉飡) 대공(大恭)과 그의 동생 아찬(阿飡) 대렴(大廉)이 768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의 측근인물인 이찬(伊飡) 김은거(金隱居)를 비롯한 왕군(王軍)에 의해서 토멸되었다.
이 반란은 경덕왕에 이어서 중대의 전제왕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혜공왕 초년의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려는 최초의 정치적
움직임이었다. 김은거는 이 반란의 진압에 대한 공로로 그해에 시중에 임명되었으며, 이찬 신유(神猷)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69년에 왕은 임해전(臨海殿)에서 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들을 모아
전제왕권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770년에는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대공의 반란과 마찬가지로 반혜공왕적 성격(反惠恭王的性格)의 것이었다.
김융의 난으로 김은거가 시중에서 물러나고 이찬 정문(正門)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혜공왕대의 정치적 사건 중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74년 김양상(金良相)이 상대등에 임명된 사실이다.
즉, 김양상은 경덕왕대에 시중을 역임하였으나 778년에 있었던 대공의 난에 연루되어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왕의 측근인
김은거에게 시중직을 물려주었다. 이로써 보면 김양상은 적어도 친혜공왕적(親惠恭王的)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김양상이 다시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반혜공왕적인 귀족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전제왕권 중심의 중대사회에서 귀족중심의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775년에는 김은거 및 이찬 염상(廉相)과 정문의 모반이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제왕권 유지를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귀족세력인 김양상의 대두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진압됨으로써
김양상 중심의 정치세력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혜공왕일파는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상실하고 명목상의 왕위만을 보전하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권회복에 대한 노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혜공왕은 재위 16년 동안 11회의 조공(朝貢), 하정(賀正)그리고 사은(謝恩)의 사절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였는데, 이 중에서 8회가 773년에서 776년에 이르는 4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매년 2회씩 파견된 것으로 774년에 있었던 김양상의 상대등 임명에 따른 신라내정에 있어서의 정권변동과 무관하지 않다.
즉, 보다 친당적(親唐的)인 혜공왕일파가 정권회복을 위하여 당나라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혜공왕일파의 이와같은 외교적인 노력도 777년 상대등 김양상의 상소(上疏)에 의하여 신랄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상소를 통한 김양상의 혜공왕일파에 대한 정치적 경고는 친혜공왕파를 자극하게 되어 780년에 김양상일파를 제거하려는
이찬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이 있었으나 오히려 김양상과 이찬 경신(敬信)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혜공왕과 왕비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경신의 추대에 의하여 김양상 자신이 제37대 선덕왕으로 즉위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 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李基白, 社會科學 2, 1958).
上大等考(李基白, 歷史學報 19, 1962) .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新羅政治體制の變遷過程(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 37代 선덕왕(宣德王)?~785 >재위780~785.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양상(良相). 내물왕의 10세손이다.
할아버지는 각간 원훈(元訓)이며, 아버지는 효방(孝芳, 혹은 孝方) 해찬(海飡)으로 개성대왕(開聖大王)에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김씨 사소(四炤, 혹은 四召)부인으로 성덕왕의 딸인데 정의태후(貞懿太后)로 추봉되었다.
비는 구족(具足)부인으로 각간 양품(良品, 혹은 狼品 또는 義恭)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양상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764년 정월에 이찬(伊飡)인 만종(萬宗)이 상대등에, 아찬(阿飡)인 양상이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그의 시중 임명은 전제왕권을 재강화하려던 경덕왕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귀족의 반발로 실패하고 왕당파인 상대등
신충(信忠)이 물러난 4개월 뒤에 이루진 점으로 보아, 그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와는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김양상의 활동은 혜공왕대에 접어들어 두드러졌다. 771년에 완성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그는 대각간 김옹(金邕)과 함께 검교사숙정대령겸 수성부령검교 감은사사각간(檢校使肅政臺令兼 修城府令檢校 感恩寺使角干)으로서 종 제작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감찰기관인 숙정대(肅政臺)의 장관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위치를 엿볼 수 있다.
그는 혜공왕 10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동왕 12년에는 한화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동왕 13년에는 당시의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전제주의적인 왕권의 복구를 꾀하는 일련의 움직임을 견제하였다.
혜공왕 16년 2월에 왕당파이었던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침범하자,
상대등이었던 양상은 4월에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즉위는 무열왕계인 김주원(金周元)을 경계하고 그들의 반발을 억제하려던 김경신의 강력한 뒷받침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784년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결심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병석에서 내린 조서에서도 항상 선양하기를 바랐다고 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선덕왕의 치적은 두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즉위년의 어룡성(御龍省)에 대한 개편이다. 750년에 어룡성에 둔 봉어(奉御)를 경(卿)으로 고치고 다시 감(監)으로 바꾸었다.
또 하나는 패강진(浿江鎭)의 개척이다. 781년에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安撫)하였고,
782년 한주(漢州: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民戶)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그 이듬해 1월에는 김체신(金體信)을 대곡진(大谷鎭)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러한 패강진의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력의 양성 또는 왕실에 반발하는 귀족의 축출을 꾀하려는 정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재위 6년 만에 죽으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朝鮮金石總覽 . 新羅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新羅下代의 貝江鎭(李基東, 韓國學報 4, 1976) .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 38代 원성왕(元聖王)?~798 >재위785~798. <괘릉/掛陵>
성은 김(金), 이름은 경신(敬信, 敬愼, 敬則). 내물왕의 12세손으로 아버지 효양(孝讓)은 명덕대왕(明德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 또는 訓入)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할아버지 의관(義寬, 義官)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할아버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어머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혹은 知烏夫人) 박씨(朴氏)이며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되었고,
비(妃)는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 뒷날 선덕왕이 된 양상(良相)과 더불어 지정(志貞)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이때에 혜공왕을 살해하고 양상이 왕위에 오르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는 양상과 밀착된 인물로서 경덕왕 이래 왕실의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혜공왕 말기의 혼란을 평정한 공으로 780년에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덕왕이 자식이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과의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주원과의 왕위계승다툼에 대한 설화를 전하고 있다.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았던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복04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天官寺)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자,
여삼(餘三)의 해몽을 듣고 비밀히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더니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였으므로 신하들이 경신을 추대하였다는 것이다.
또, 뒷날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보더라도
이 점을 짐작할 수 있다.
785년에 원성왕은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으며, 788년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였다.
독서삼품과는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실력에 따라 관리로 등용한 것으로, 이러한 개혁은 국학(國學)을 설치한 지 이미 1세기가 지난 당시 신라사회에 있어서 무예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관리등용법의 개혁이 요청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원성왕대는 하대(下代)권력구조의 특징을 이루는 왕실친족집단원에 의한 권력장악의 전형(典型)이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즉, 원성왕은 즉위와 동시에 왕자 인겸(仁謙)을 태자로 책봉하여 다음의 왕위계승권자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791년 1월 인겸태자가 죽자 그 이듬해 8월에는 왕자 의영(義英)을 다시 책봉하였다.
793년 2월 의영태자가 죽자 왕손(인겸태자의 맏아들)인 준옹(俊邕:뒤의 소성왕)을 이듬해 1월 태자로 책봉하였다.
태자로 책봉된 준옹뿐 아니라 그의 동생인 언승(彦昇:뒤의 헌덕왕)도 정치의 중심부에서 활약하였는데,
이처럼 왕과 태자를 정점으로 한 극히 좁은 범위의 근친왕족들이 상대등, 병부령, 재상 등의 요직을 독점하고자 하였다.
또, 이들 근친왕족들에 의하여 왕위가 이어져 하대는 원성왕계로써 특징지어진다.
또, 786년에는 대사(大舍) 무오(武烏)가 병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는가 하면,
왕 자신도 〈신공사뇌가 身空詞腦歌〉를 지었는데, 그것은 인생 궁원(窮遠)의 변화에 대한 이치를 담은 것이라 한다.
이 책들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791년에 제공(悌恭)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하였다.
제공은 785년에 시중(侍中)이 된 인물로 그가 일으킨 반란의 성격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같은해에 인겸태자가 죽으니 시호를 혜충(惠忠)이라 하였다. 그리고 제공의 반란이 진압되자
다시 혜충태자의 아들 준옹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원성왕은 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785년에 승관(僧官)을 두어 정법전(政法典)이라 하고,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 혹은 報恩寺)를 창건하였으며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처음에는 화엄종(華嚴宗)승려인 묘정(妙正)을 편애하여 내전(內殿)에 맞아들여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나 후에는 왕의
신임을 잃은 듯하다.
사신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자라한테서 얻은 구슬을 당나라 황제에게 빼앗기고 난 뒤부터,
묘정은 사람들의 사랑을 잃게 되었다는 설화가 이를 알려준다.
왕의 치적으로 790년 벽골제(碧骨堤)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795년에 당나라의 사신이 하서국(河西國)사람 둘을 데리고 와 신라의 호국룡(護國龍)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잡아가려는 것을 막았다는 설화는 그가 상당한 독자외교를 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798년 12월 29일에 죽으니, 유명(遺命)으로 봉덕사(奉德寺)남쪽 토함악(吐含岳)서쪽동굴에 화장하였고,
능을 추복(追福)하기 위한 숭복사(崇福寺)가 세워졌다.
아들은 태자로 책봉되었던 인겸과 의영과 예영(禮英)이 있었고,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이라는 두 딸이 있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唐書 . 朝鮮金石總覽 上
新羅元聖王系의 王位繼承(吳星, 全海宗博士華甲記念論叢, 1979)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 39代 소성왕(昭聖王)?~800 >재위799~800.
혹은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준옹(俊邕).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仁謙, 惠忠太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 성목태후(聖穆太后)이다.
비(妃)는 계화부인(桂花夫人)으로 숙명(叔明)의 딸이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장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 궁중에서 자라면서 789년에 대아찬(大阿飡)을 제수받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790년에는 파진찬(波珍飡)을 제수받아 재상이 되었다. 791년 10월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 8월에 병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태자에 책봉된 아버지가 일찍 죽고, 또 그에 뒤이어 태자가 된 숙부 의영(義英)이
또한 794년에 죽자 그가 795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798년 12월 29일 원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청주(菁州:지금의 진주)의 노거현(老居縣)을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
재위 2년째인 800년 6월에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 40代 애장왕(哀莊王)?~809 >재위800~809.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청명(淸明)인데 뒤에 중희(重熙)라 개명하였다.
소성왕과 계화부인(桂花夫人)김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나 800년 6월 부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즉위초부터 왕은 작은아버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金彦昇:뒤의 憲德王)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의 치적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으니, 805년(애장왕 6) 공식(公式)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 12도(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군(郡), 읍(邑)의 경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애장왕의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로 볼 수 있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東宮)의 만수방(萬壽房)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조처로 생각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취해진 공식 20여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개혁으로 봄이 마땅하다.
805년 위화부(位和府)의 금하신(衿荷臣)을 고쳐 영(令)이라 하고, 예작부(例作府)에 성(省)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처도
같은 성격으로 이해된다. 806년에는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오직 수리만을 허락하며, 금수(錦繡)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器物)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 조처 역시 2년 뒤에 취해진 지방 군현의 경계를 정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체로 원당(願堂)과 같은 절을 세워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애장왕 7년에서 9년에 이르는 개혁조처는 귀족세력을 왕권에 복속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왕권강화를 위한 애장왕의 개혁조처는 중대의 전제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하대사회의 풍조 속에서
많은 도전을 받아 성공할 수는 없었으며, 그 결과 그는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애장왕대의 개혁은 이전 경덕왕대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이은 것으로 왕권강화이지만, 그 개혁의 주체는 애장왕이
아니라 당시 실력자인 김언승과 수종(秀宗:뒤의 興德王)이라고도 추측된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對唐外交)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均貞)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제수하고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803년에는 일본국과 우호하여 수교하였다. 그리하여 804년, 806년, 808년에 각각 일본국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응(順應), 이정(利貞)에 의하여 가야산에 해인사가 세웠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809년 7월 언승이 제옹(悌邕)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 41代 헌덕왕(憲德王)?~826 >재위809~82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언승(彦昇). 소성왕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김씨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 숙정부인(淑貞夫人)김씨이며, 비는 숙부인 각간 예영(禮英)의 딸 귀승부인(貴勝夫人)김씨이다.
790년에 대아찬(大阿飡)을 제수받아 중국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다음해에는 제공(悌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잡찬(#잡19飡)이 되었다.
794년에 시중(侍中)에 임명되고, 그 다음해에 이찬(伊飡)으로서 재상(宰相)이 되었으며, 796년에는 병부령(兵部令)을 제수받았다.
이로 보면 그는 이미 원성왕 말년에 정치적인 세력기반을 확고하게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세력기반이 애장왕의 즉위와 함께 그를 섭정(攝政)의 지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애장왕대 그의 세력은 대단하여 그 집안이 당나라의 조정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801년에 어룡성(御龍省)의 장관인 사신(私臣)이 되었고 이어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 애장왕대에는 정치개혁이 시도되었다.
곧 805년에 공식20여조(公式二十餘條)가 반포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이와 관련해서 불사(佛事)를 금하였으며,
808년에는 군(郡)·읍(邑)의 경계를 정하는 조처를 내렸다. 이러한 개혁은 대체로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개혁의 주도자가 언승이라 추측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장왕대 최고의 실력자였고 또 뜻을 같이하는 수종(秀宗)이 시중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809년에는 동생인 이찬 제옹(悌邕)과 더불어 난을 일으켰으며, 난중에 애장왕이 살해되고 언승이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헌덕왕대에는 뚜렷한 정책이나 정치개혁이 보이지 않으나 애장왕 당시의 개혁정치가 그대로 이어졌다.
그에 못지않게 왕권강화에 도전하는 세력 역시 거세었다.
비록 난을 일으켜 왕위를 쟁취하였지만, 헌덕왕은 여전히 반대세력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결과 정국은 날로 불안해져갔으며 빈번한 기근은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814년에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났으며, 815년에는 서쪽 변방의 주(州)·군(郡)에 기근이 들었다.
이후 816, 817, 820, 821년 등 계속하여 기근이 들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초적(草賊)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마침 당나라에서는 절도사(節度使) 이사도(李師道)의 반란을 당하여 신라에 출병을 요청하였다.
헌덕왕은 816년에 김웅원(金雄元)으로 갑병(甲兵)3만을 이끌고 반란의 진압을 돕도록 하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모순이 누적되면서 822년에는 중요한 두가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녹진(祿眞)의 인사원칙에 대한 제언이고, 또 하나는 김헌창(金憲昌)난의 발발이다.
당시 충공(忠恭)이 상대등이 되어 인사를 처리하는데 갑자기 병이 들었다.
집사시랑(執事侍郎)인 녹진이 충공을 찾아가 인재의 쓰임을 목재의 쓰임에 비유하여 인사처리에 적절한 대책을 제언하였다.
그 말을 들은 충공은 물론 부군(副君)인 수종과 헌덕왕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때 녹진이 제시한 인사원칙은 왕당파에게 유리한 것으로 왕권에 반대하는 귀족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곧 이어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이 주도한 개혁정치에 반대하여 오던 귀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일어났다.
또한, 녹진의 제안이 김헌창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도 난이 일어나는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장지는 천림사(泉林寺)북쪽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元聖王系의 王位交替(吳星, 全海宗博士回甲紀念論叢, 1979)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新羅下代均貞系의 王位繼承과 金陽(尹炳喜, 歷史學報 96, 1982).
< 42代 흥덕왕(興德王)?~836 >재위826~83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수종(秀宗), 또는 경휘(景暉)·수승(秀升).
헌덕왕의 동생으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金氏)이다.
할머니는 각간(角干) 신술(神述)의 딸인 숙정부인 김씨(淑貞夫人 金氏)이고, 비(妃)는 소성왕의 딸인 장화부인 김씨(章和夫人 金氏)인데, 즉위한 해에 죽으니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봉되었다.
흥덕왕의 정치적 입장은 헌덕왕의 그것과 대체로 비슷하였다.
804년 시중(侍中)에 임명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언승(彦昇:뒤의 헌덕왕)과 함께 애장왕대의 개혁정치를 주도하였다고 생각된다.
809년에 언승이 애장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웠고, 헌덕왕대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였다.
819년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고, 822년에는 부군(副君)이 되어 월지궁(月池宮)에 들어감으로써 왕위계승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위하면서 흥덕왕은 애장왕대로부터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827년에 명활전(明活典)을 설치하였다. 또는 그것이 914년에 설치되었다는 설도 있다.
829년에는 원곡양전(源谷羊典)을 설치하였으며, 집사부(執事部)를 집사성(執事省)으로 고쳤다.
이때의 개혁은 귀족세력의 억제와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헌덕왕대의 김헌창(金憲昌)의 난을 마무리짓는 조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덕왕대의 개혁은 이에 그치지 않고 834년에 모든 관등에 따른 복색(服色),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등의 규정을
반포하였다. 이 규정은 왕이 당시 사치풍조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발표한 것이라 하지만,
귀족들의 요구에 의하여 골품(骨品)간의 계층구별을 더욱 엄격히 하고자 취해졌다.
특히 이 규정의 내용은 진골(眞骨)과 육두품(六頭品)을 비롯한 여하의 귀족이나 평민과의 차별을 더 뚜렷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골세력에 대한 배려를 깊이 깔고 있다.
이와 아울러 835년에 김유신(金庾信)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이는 김헌창의 난 평정에 공을 인정받은 김유신 후손들의 현실적인 세력을 배경으로 취해진 조처이다.
그밖의 치적으로 변방에 진(鎭)을 설치한 것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828년에 궁복(弓福: 장보고)이 중국 당나라의 서주(徐州)에서 소장(小將)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였으므로 1만명의 병졸로써
지금의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음해에는 당은군(唐恩郡)에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827년에는 중 구덕(丘德)이 당나라로부터 경전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830년에는 도승(度僧) 150명을 허가해주었다.
한편, 828년에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돌아온 김대렴(金大廉)이 차(茶)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여
성하게 되었다. 흥덕왕은 앵무새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836년 12월에 죽었다. 장지는 지금의 경주시 강서면 육통리에 있는, 장화왕비와 합장된 흥덕왕릉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執事省(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 新羅元聖王系의 王位交替(吳星, 全海宗博士回甲紀念論叢, 1979)
新羅下代 均貞系의 王位繼承과 金陽(尹炳喜, 歷史學報 96, 1982).
< 43代 희강왕(僖康王)?~838>재위836~838.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제륭(悌隆 혹은 愷隆·悌#옹19).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로 익성대왕(翌成大王)으로 추봉된 김헌정(金憲貞, 일명 草奴)이고,
어머니는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된 각간(角干) 충효(忠孝)의 딸 포도부인(包道夫人, 혹은 美道, 梁乃, 巴利夫人)이다.
왕비는 충공갈문왕(忠恭葛文王)의 딸 문목부인 김씨(文穆夫人金氏)이다.
아들은 뒤에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봉해진 계명(啓明)이다.
왕이 되기 전 제륭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버지 헌정이 819년에 병으로 다닐 수 없게 되자 왕으로부터 금장식의 자색 단장(檀杖)이 하사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인 김명(金明)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김우징(金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은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장보고)에게로
달아나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고, 김명이 상대등(上大等)에, 이홍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838년에 불만을 가진 김명, 이홍 등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진하였다.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執事省(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 44代 민애왕(閔哀王)?~839 >재위838~839.
민애왕(敏哀王)이라고도 표기한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명(明)이다.
아버지는 뒤에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봉해진 충공(忠恭)이고,
어머니는 선의태후(宣懿太后)로 봉해진 귀보부인(貴寶夫人) 박씨(朴氏)이다.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큰 아들로 혜충태자(惠忠太子)로 봉해졌다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일찍 죽은 인겸(仁謙)이고,
할머니는 성목태후(成穆太后) 김씨이다. 그리고 비(妃)는 각간(角干) 영공(永公)의 딸 윤용부인(允容夫人) 김씨이다.
본래 김명은 희강왕(僖康王)이 되는 제륭(悌隆)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해왔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均貞)과 5촌조카인 제륭(균정과는 삼촌임.)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시중(侍中)인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아찬 우징(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균정은 전사하고 김양이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의 장보고(張保皐)에게 도망하여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으나, 불만을 가진 김명이 이홍과 같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자진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김명(민애왕)은 다시 균정계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 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지금의 나주 부근)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達伐:지금의 대구)에서의 싸움에서도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장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현재 경주에는 민애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왕릉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신라시대(新羅時代) > 신라역대왕사新羅歷代王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新羅 歷代 王 45代 신무왕(神武王)~56代 경순왕(敬順王) (0) | 2007.10.08 |
---|---|
新羅 歷代 王 23代 법흥왕(法興王)~ 33代 성덕왕(聖德王) (0) | 2007.10.08 |
新羅 歷代 王 17代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22代 지증왕 (智證王) (0) | 2007.06.22 |
新羅 歷代 王 1代 혁거세거서간~< 16代 이사금(尼師今) (0) | 2007.06.22 |
신라인의 기원과 시조 (0) | 2007.06.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