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新羅時代)/신라역대왕사新羅歷代王史)

新羅 歷代 王 1代 혁거세거서간~< 16代 이사금(尼師今)

鄕香 2007. 6. 22. 12:48

< 1대 박혁거세(赫居世居西干) BC69~AD4 > (재위 BC 57∼AD4).

신라 박(朴)氏의 시조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라고 부른다.

혁거세(赫居世)는 진한 6부의 하나인 양산촌 출신이며 서기전 69년에 태어나 열세살이 되던 57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세력을 확대하여 진한 6부를 장악하였습니다. 신라어로 표주박이라는 뜻의 박(朴)을 성씨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알에서 나왔고, 알이 표주박처럼 생긴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전한다."혁거세"는 '불구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는 뜻으로 아마도 '혁거세'는 '불구내'의 뜻을 한자로 옮겨 적은 듯하다. 혁서세왕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실한' 이었는데 이는 신라어로 왕 또는 귀인을 지칭하는 말이다.신라인들이 왕을 거서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마한에서 마한에서 왕을 파견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거서간(居西干)의 한자 의미를 풀어 보면 '서쪽에 살던 왕'이란 뜻이다. 신라인들은 마한을 '서한'이라고 불렀으니 '서쪽에 살던 왕'은 곧 마한에서 온 왕을 가리키며 원래 진한의 왕을 마한에서 파견했기 때문에 진한인들이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서간이라는 말은 마한 속국 시대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왕위에 오른 혁거세왕은 17세가 되던 재위 5년(서기전53년)에 고허촌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세력을 넓혔고 29세가 되던 재위 17년에 알영과 함께 국내6부를 순회하며 진한 전역으로 영토를 확대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진한 6부의 촌장이 뜻을 모아 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진한6부를 복속한 때는 이 무렵으로 보인다.

31세가 되던 재위19년 정월엔 변한의 일부가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옴으로써 신라국의 영역은 더욱 확대된다.('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변한의12국중 상당수는 향후 가야 개국에 참여하거나 백제에 복속되었다.) 33세가 되던 재위21년(서기전37년)에 서라벌에 금성을 쌓고 6년 후인 서기전31년에 비로서 궁실을 짓게 되는데, 아마도 이때가 개국 시점일 것이다.

서기전 28년 낙랑이 침범해 왔으나 국경에 있는 백성들이 밤에 문을 잠그지 않으며 곡식더미가 들에 즐비한 것을 보고 ‘도덕(道德)의 나라’라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서기전 20년 마한 왕이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는다고 노하였으며, 이 해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다. 서기전 19년 마한왕이 죽자 사신을 보내어 조위(弔慰)하였다. 서기전 5년에는 동옥저에서 보낸 사신이 와서 말 20필을 바치기도 하였다.죽은 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韓國史講座―古代篇―(李基白·李基東共著, 一潮閣, 1982) . 新羅史硏究(今西龍, 國書刊行會, 1933).
新羅史の諸間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 神話と文化史(三品彰英論文集, 平凡社, 1971) .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 ?~24 > (재위 4~24).   

성은 박씨. 혁거세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알영부인(閼英夫人)이고,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또는 아루부인(阿婁夫人)이다. 누이동생으로 아로(阿老)가 있다. 차차웅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왕은 남해왕 뿐이며 《삼국유사》에는 거서간(居西干)과 동격의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巫)를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남해왕 때는 정치 수장적 성격보다는 제사장적 기능이 강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서기 6년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우고 8년 탈해가 어질다 하여 맏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또 대보(大輔)의 벼슬을 주어 나라의 일을 맡겼다. 14년 왜(倭)와 낙랑(樂浪)의 침입을 막았으며, 재위 21년에 죽어 사릉원(蛇陵園)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上古世系의 再構成試圖(金光洙, 東洋學 3, 1973)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57 > (재위 24~57)

성은 박씨(朴氏). 노례이사금(弩禮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차차웅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운제부인(雲帝夫人)이다. 비(妃)의 이름은 알 수 없고,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박씨,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또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라는 세가지 설이 있으나, 일지갈문왕의 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사금이라는 왕호는 이질금(尼叱今), 치질금(齒叱今)이라고도 쓰는데, ‘잇금〔齒理〕’을 의미하는 신라 방언이라는 전통적 해석이 있으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다. 사회적으로 이사금시대 왕의 성격은 부족연맹장(部族聯盟長)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떻든 종래의 거서간(居西干)시대보다는 문물제도면에서 향상된 시대였음은 인정할 수 있다.

28년에 〈도솔가 兜率歌〉를 지었고, 32년에 6부(六部)의 이름을 고치고 이들에게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의 성(姓)을 주었으며, 17관등(官等)을 마련하였다고 하나 이때에 된 것은 아닌듯하다. 6부의 여자들을 두 편으로 갈라 길쌈을 짜게 하여 8월 15일에 그 많고 적음을 보아 승부를 결정짓는 가배(嘉俳)놀이를 시켰는데, 이때 부른 노래가 〈회소곡 會蘇曲〉이었다. 낙랑(樂浪), 화려(華麗), 불내(不耐) 등의 사람들이 북변을 쳐들어 왔으며, 맥국(貊國)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삼국사기》에서는 40년에 이서국(伊西國:지금의 淸道)을 멸하였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14대 유례이사금의 기사가 착오(錯誤)된 것이라 한다. 재위 34년 되던 해에 탈해(脫解)의 재능이 그의 두 아들보다 뛰어남을 들어 왕위를 잇게 하고 죽어,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4),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新羅 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金哲埈, 歷史學報 1, 1952), 新羅上古世系의 再構成試圖(金光洙, 東洋學 3, 1973),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80 > (재위57~80)

성은 석씨(昔氏).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의 왕, 용성국(龍城國)의 함달파왕(含達婆王), 혹은 완하국(琓夏國)의 함달왕(含達王) 등이라는 여러가지 전설이 있다. 어머니는 여국왕(女國王)의 딸 또는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왕비는 남해차차웅의 딸 아효(阿孝·阿尼, 또는 남해차차웅의 누이동생 阿老)부인이다. 부왕(父王)이 비(妃)를 맞아 임신 7년 만에 큰 알〔卵〕을 낳자, 왕은 좋지 못한 일이라 하여 버리게 하였다. 이에 보물과 함께 비단에 싸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궤짝에 실린 탈해는 금관가야를 거쳐 계림(鷄林)동쪽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이때 한 노파에 의하여 건져지고 길러졌다. 그리하여 고기잡이로써 생업을 하며 양모(養母)를 공양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탈해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공부를 시켜, 학문과 지리에 두루 통달하게 되었다. 

당시 이름난 신하인 호공(瓠公)의 집터(뒤에 月城이 됨.)가 좋음을 보고 몰래 숫돌과 숯을 그 집에 묻어놓고는 자기의 집이라 우기니 관가에서는 주장하는 근거를 요구하였다. 이에 자신은 본래 대장장이〔冶匠〕였으니 땅을 파서 조사하자고 하여, 과연 숫돌과 숯이 나오자 탈해가 승소(勝訴)하여 그 집을 차지하였다. 이같은 내용의 설화에서, 첫째 탈해집단이 경주 동해변에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그가 죽은 뒤 동악신(東岳神)으로 봉사(奉祠)되었음에서도 확인된다. 둘째는 석씨부족이 어로를 주요생활수단으로 하였지만, 이미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철을 다루는 능력이 왕위계승에까지 연결되는 강점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탈해는 서기 8년에 왕의 사위가 되고, 서기 10년에는 대보(大輔)의 자리에 올랐으며, 유리이사금의 즉위시에 이미 왕위계승의 물망에 올랐지만, 유리이사금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먼저 왕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으며, 유리이사금이 탈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탈해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해차차웅의 사위이니 결국 박씨집단(朴氏集團)의 일원이라는 동속개념(同屬槪念)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철을 이용한 군사력 및 거기에 따르는 실질적인 정치실력파의 등장으로 박씨족과 석씨족이 연맹하였으며, 이것은 왕실세력의 폭을 넓혔다고 본다. 서기 58년 호공을 대보로 삼고, 서기 64년 백제군이 와산(蛙山), 구양(狗壤)의 두 성을 비롯하여 이후 4, 5회 공격해왔다. 서기 65년(삼국유사에는 60년)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인시켜보니, 금궤(金櫃)가 나무에 걸려 있고 그 아래 흰 닭이 있어, 궤를 열어보자 용모가 단정한 아이를 얻었는데, 이가 김알지(金閼智)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서기 67년 박씨의 인척(姻戚)으로서 주, 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주주(州主), 군주(郡主)라 이름하였다. 서기 77년에는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黃山津)에서 싸웠다. 죽은 뒤, 성북(城北)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 韓國家族의 史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0)  

 

 

< 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112> (재위 80~112).

성은 박씨. 유리이사금의 둘째아들로 태자 일성(逸聖)보다 인물이 뛰어나 즉위하였다고도 하고, 유리이사금의 아우인 내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사요왕(辭要王)의 딸이고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혹은 史肖夫人)이다. 비계(妃系)가 김씨 한기부(漢기部)의 유력자임은 파사이사금이 유찬(楡飡)의 못으로 사냥갔을 때 이찬 허루가 딸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이어 허루는 주다(酒多:나중의 角干)가 되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직계라면 탈해이사금 이후 왕위를 계승한 것이 문제가 없으나, 그가 내로의 아들일 경우 월성(月城)에 기반을 둔 석씨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즉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87년에 가소성(加召城), 마두성(馬頭城)을 쌓았으니, 이것은 경주를 벗어난 맨처음의 축성 기록이다. 94년에 가야 군사가 마두성으로 쳐들어왔을 때 1,000여명의 기병을 사용하였으니, 이미 기마전투의 양상을 볼 수 있다.

101년에 월성을 쌓아 궁실을 옮겼다. 102년에는 음집벌국(音汁伐國:지금의 安康, 안강 南 또는 울진)과 실직곡국(悉直谷國:지금의 三陟) 사이의 영토분쟁을 가야의 수로왕에게 부탁하여 해결해 준 뒤에 다시 음집벌국을 쳐서 병합하였다. 그러자 실직국과 압독국(押督國:지금의 慶山)도 항복해 왔다고 한다. 108년에는 다벌국(多伐國:지금의 大丘 혹은 義昌)과 초팔국(草八國:지금의 草溪 혹은 杞溪)을 합병하였다. 이러한 파사이사금의 치적에 근거하여 이 왕대(王代)를 고대국가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재위 33년에 죽자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 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新羅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 6대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 ?~134 > (재위 112~134).

지미(祇味) 또는 지마(祇磨)라고도 한다. 성은 박씨(朴氏). 아버지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고, 어머니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비는 갈문왕 마제(摩帝)의 딸 애례부인 김씨(愛禮夫人金氏)이다.

아버지인 파사이사금이 유찬(楡飡)의 못으로 사냥갔다가 돌아오면서 한지부(漢祇部)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 마제 이찬(伊飡)의 처가 딸을 데리고 나오자 태자 지마가 기뻐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때 혼담이 오간 것을 알 수 있다.

115년·116년에는 친히 병력을 이끌고 황산하(黃山河:낙동강 하류)를 건너 가야를 침공하였다. 125년 말갈군이 대령책(大嶺柵:대관령)으로 쳐들어 왔으나 백제의 원병이 물리쳤다. 《삼국유사》에는 음질국(音質國:安康)과 압량국(押梁國:지금의 慶山)을 멸망시켰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 때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재위 23년에 아들이 없이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154 > (재위 134~154).

성은 박씨.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유리이사금, 일지갈문왕, 노례이사금의 형, 지마이사금이라는 네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 타당성이 없다. 다만 148년에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으로 봉한 사실로 미루어 아도갈문왕이 유리이사금의 아들이며 일성이사금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어머니는 이간생(伊刊生)부인이다. 비(妃)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혹은 지마이사금의 딸이라고도 한다.

138년 금성(金城)에 국가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였으며, 여러 차례 말갈의 침입을 받고 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도 하였다. 144년에는 모든 주군(州郡)이 제방(堤防)을 수축하고 전야(田野)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금은주옥(金銀珠玉)의 사용을 금하였다. 146년 압독(押督: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였다.148년에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4), 韓國古代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 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師今) ?~184 > (재위 154~184)

성은 박씨(朴氏). 아버지는 일성이사금이고, 어머니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로 박씨(朴氏)이다. 왕비는 지마이사금의 딸인 내례부인(內禮夫人) 박씨로 8촌 사이의 족내혼이었다. 이와같은 족내혼은 박씨왕족의 힘을 규합하려는 세력연합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56년과 158년에는 계립령(鷄立嶺:지금의 문경새재 동쪽고개)과 죽령(竹嶺:풍기 북쪽고개)을 각각 개통하여 소백산맥 이북까지 세력을 뻗쳤다. 167년에는 군사 2만명과 8, 000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서북쪽으로의 영토개척을 이루었다. 이러한 서북지역에 대한 영토개척을 석씨(昔氏)세력의 남하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九道) 가 파진찬(波珍飡)이 된 사실을 친석씨계(親昔氏系)의 부상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위 21년부터 31년 사망할 때까지 기록의 공백이 있어 왕실세력의 교체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 결국 아달라이사금은 아들이 없이 죽고 석씨왕계가 즉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3, 1976)   

 

 

< 9대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 ?~196 > 재위 184~196. 

발휘이사금(發暉尼師今)이라고도 한다. 성은 석(昔)씨. 부계(父系)는 탈해왕의 아들인 구추각간(仇鄒角干)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연대상으로 탈해가 죽은 지 104년 만에 즉위한 것이므로 세대간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따라서 이것은 탈해 이후 석씨세력이 쇠퇴하여 그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거나, 벌휴계(伐休系)가 탈해의 후손이라고 억지로 끌어다 붙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벌휴가 홍수·가뭄 및 그해의 풍흉을 미리 알았고 사람의 사정(邪正)을 알아맞혀 성인(聖人)이라 불린 데에서 시조적 성격이 농후하며, 《삼국사기》 벌휴이사금 즉위조 이외에 구추에 관한 기록이 없음에서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지진내례부인(只珍內禮夫人)이다.

벌휴가 즉위한 것은 아달라이사금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는 전투능력을 비롯한 문화수준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새로운 세력집단이 경주로 진출하여 종래의 지배층을 압도한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석씨왕계의 성립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한 영역확대를 실현시켰다. 185년에 구도(仇道)와 구수혜(仇須兮)를 처음 군주(軍主)로 삼아 소문국(召文國)을 치고, 이어 188년 모산성(母山城:지금의 충청북도 진천 혹은 경상북도 의성 부근), 189년 구양성(狗壤城:지금의 괴산 또는 옥천), 190년 원산향(圓山鄕:지금의 예천군 용궁)·부곡성(缶谷城:지금의 군위군 부계) 등지에서 백제와 공방전을 치렀다고 전한다. 왕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머니가 김씨인 점으로 보아, 이제 박씨계는 고립되고 석씨와 김씨와의 제휴시대를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 韓國史講座―古代篇―(李基白·李基東共著, 一潮閣, 1982),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 10대 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 ?~230 > (재위 196~230)

성은 석씨(昔氏). 벌휴이사금의 태자인 골정(骨正)과 둘째아들 이매(伊買)가 일찍 죽고 골정의 아들 조분(助賁)도 아직 어리므로, 이매의 아들 내해가 왕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례부인(內禮夫人)이며 비는 조분왕의 누이 석씨로서, 사촌간에 근친결혼을 하였다. 자녀로는 태자 우로(于老)와 병마사(兵馬事)를 관장하였던 이벌찬 이음(利音)이 있었다.

그 밖에 조분왕의 비가 된 딸 아이혜(阿爾兮)가 있다. 재위기간 동안 백제와의 전투가 빈번하였는데, 214년에 요차성(腰車城)에 백제군이 쳐들어오자 반격하여 백제의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그뒤 백제가 장산성(獐山城:지금의 慶山)을 침입하였으나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격퇴하였다. 또, 222년에도 백제가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春川)를 침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의 영토가 아니므로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그 밖에 가야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은 바 있다. 임금이 된지 35년이 되는 해에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 11대 조분이사금(助賁尼師今) ?~247 > (재위230~247)

성은 석씨(昔氏). 제귀(諸貴)라고도 하는데, 이는 제분(諸賁)의 잘못일 것이다.

벌휴이사금의 손자로, 골정갈문왕(骨正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딸 옥모부인 김씨(玉帽夫人金氏)이고, 비는 내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다. 내해이사금이 죽을 때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고 하지만, 조분은 이미 벌휴의 대손(大孫)이었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도 왕위계승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며, 왕비계(王妃系) 김씨세력의 영향력도 있었을 것이다.

즉위 후 영토확장에 주력하여 231년 7월에 감문국(甘文國:경상북도 금릉군 개령면)을 정벌하고, 236년 2월에는 골벌국(骨伐國: 경상북도 영천)을 병합하여 각각 군(郡)으로 삼았다. 232년과 233년에는 금성(金城)과 변경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쳤으며, 245년에는 고구려가 북변(北邊)을 쳐들어왔다. 이같은 대외전쟁을 주도하였던 장군은 내해이사금의 태자인 우로(于老)인데, 그는 244년에 이찬(伊飡)에서 서불한(舒弗邯:이벌찬의 별칭)이 되었고 병마사(兵馬事)도 맡아보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民族文化硏究所, 1980)   

 

 

< 12대 첨해이사금(沾解尼師今) ?~ > (재위247~261)

일명 이해(理解), 점해(참解)라고도 한다. 조분이사금의 동모제(同母弟)로, 아버지는 골정(骨正)이고, 어머니는 옥모부인(玉帽夫人)이다. 즉위년(247)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에 봉하였다.

따라서, 점해이사금의 즉위를 형제상속으로 보기도 하고, 골정계(骨正系)의 독립이라는 점에서 가계내의 계승으로 보기도 한다. 248년 고구려와 화의를 맺었고, 255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지금의 榮州?)을 공격해왔으나 이를 빼앗기지 않았다. 한편,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여, 달벌성(達伐城: 지금의 大邱)을 쌓았으며 사벌국(沙伐國:지금의 尙州)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는 사로국(斯盧國)이 진한의 전지역을 통일하였다. 261년 12월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4) .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 ?~284 > (재위 262~284).

미조(未祖, 未照) 혹은 미고(未古)·미소(未召)라고도 한다. 미추의 계보는 알지(閼智)에서부터 비롯하여, 알지 → 세한(勢漢, 熱漢) → 아도(阿道)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仇道) → 미추로 이어진다.

그러나 문무왕릉비문을 비롯한 금석문(金石文)자료에는 김씨(金氏)왕실의 시조를 성한(星漢, 聖漢)이라 하여, 이를 세한으로 보는 설과 반대의 설이 있어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추의 조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은 아버지인 구도로서 그는 8대 아달라이사금에서부터 9대 벌휴이사금 때까지 활약한 인물이며, 263년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구도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인 술례부인(述禮夫人, 혹은 生乎) 박씨(朴氏)와 혼인하였고, 그의 딸인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골정(骨正) 갈문왕과 혼인하였다. 미추이사금의 비(妃)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결국 그는 조분이사금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백제가 봉산성(烽山城:지금의 榮州?)·괴곡성(塊谷城) 등을 쳐들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있는데,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볼 것인가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재위 23년에 죽으니 대릉(大陵, 竹長陵이라고도 함.)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14대 유례이사금 14년 이서고국(伊西古國: 지금의 淸道)이 금성(金城)을 쳐들어왔을 때 귀에 대나무잎을 꽂은 죽엽군(竹葉軍)이 갑자기 신라군을 도와 이들을 물리친 일이 있는데, 이들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찾아보니 죽장릉 위에 대나무잎이 쌓여 있어 선왕(先王)의 음덕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설화가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 韓國家族의 史 的 硏究(李光奎, 一志社, 1977). 新羅始祖系譜の構成(木下禮仁,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 1966). 古代祭政と穀靈信仰(三品彰英, 三品彰英論文集 5, 平凡社, 1973).   

 

 

< 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298 > (재위284~298)

《삼국사기》의 주(註)에는 《고기 古記》를 인용하여 3대와 14대의 두 임금의 이름이 유리(儒理) 혹은 유례(儒禮)로 똑같다고 하였다. 이른바 신라상고(新羅上古)왕위계승의 허구론(虛構論)에 의하면, 눌지(訥祗)와 위의 두 왕이 같은 왕명(王名)으로서 ‘늙〔老〕’의 의미를 가진 역사시대의 눌지가 상대(上代)로 투사되어 만들어졌다고도 하고, 이들 셋은 ‘누리〔世, 享, 繼〕’의 뜻을 지녔고 박, 석, 김의 3성에 각각 이러한 이름을 가진 왕이 병립하여 있던 것을 하나의 계보로 만들어 버린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신라 상고의 기사를 그대로 믿는 경향으로 기울어져서, 유례이사금은 제11대 조분이사금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박씨 갈문왕(葛文王) 내음(奈音)의 딸 □소부인(□召夫人)인데 별빛이 입 속으로 들어와 잉태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런데 조분이사금의 비는 내해이사금의 딸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므로 조분이사금의 비가 둘일 리도 없으니, 조분이사금은 유례이사금의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있다. 선왕 미추가 네명의 석씨왕에 이어 조분이사금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위는 다시 석씨인 유례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유례이사금의 비는 알 수 없다.

왜병이 일례군(一禮郡), 사도성(沙道城:지금의 영덕?), 장봉성(長峰城) 등을 공격하므로 왕은 백제군과 연합하여 왜에 원정할 것을 꾀하였으나, 서불한(舒佛邯) 홍권(弘權)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293년 사도성을 개축하고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의 호민 80여가를 옮겼다.297년 이서고국(伊西故國:지금의 청도)을 멸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韓國古代社會硏究(金哲埈, 知識産業社, 1975).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出版部, 1980). 三韓의 國家形成 上(千寬宇, 韓國學報 2, 1976). 新羅史の諸問題(末松保和, 東洋文庫, 1954).    

 

 

< 15대 기림이사금(基臨尼師今) ?~310 > (재위 298~310) 

기립(基立)이사금이라고도 부르는데, 조분(助賁)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나이 차이로 보아서 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림이사금이 조분이사금의 손자나 증손일 경우, 아버지는 걸숙(乞淑)이고, 어머니는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이다.

300년에 비열홀(比烈忽: 지금의 安邊)을 시찰하였고,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春川)에 이르러 태백산을 망제(望祭)하였으며, 낙랑(樂浪), 대방(帶方) 두 나라가 귀속하였다고 하나 모두 믿기 어려운 기술이다. 307년에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의 뜻을 따라 국호를 다시 신라(新羅)로 정했다고 하나, 실제로 이것은 지증왕 4년의 일이었다. 재위 13년 만에 사망하였고 묻힌 곳은 알려지지 않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 歷史學報 17·18).   

 

 

< 16대 이사금(尼師今) ?~356 > (재위310~356)

내해이사금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각간(角干) 수로(水老, 또는 于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내해―우로―흘해로 계보가 이어지는데, 생존연대상으로 미루어 보아 우로와 흘해 사이에 2, 3세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는 조분이사금의 딸인 명원부인(命元夫人)이다. 기림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으로 추대되었다. 312년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들의 혼인을 청하므로, 아찬(阿飡) 급리(急利)의 딸을 시집 보내어 화친을 꾀하였다. 그러나 그뒤 단교하였고, 왜병이 풍도(風島)와 변방 민가를 약탈하고 금성(金城)까지 포위하였으나 격퇴시켰다. 《삼국사기》에는 330년에 벽골지(碧骨池:전라북도 김제)를 개착(開鑿)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백제의 기록이 잘못 들어온 것 같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백제병이 처음으로 쳐들어 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두 나라가 처음으로 직접 충돌한 것이라고 보아 《삼국사기》의 초기 백제 관계 기사를 의심하게 한다. 재위 47년에 아들 없이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李鍾旭,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