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新羅時代)/신라역대왕사新羅歷代王史)

신라인의 기원과 시조

鄕香 2007. 6. 16. 17:51

 

신라인들은 누구일까 아주 미미한 옛 기록으로 고대 역사를 정립한다는 것은 마치 소설과 같은 이야기지만
그 적은 기록과 유물의 형태나 색깔에서 그 유래를 정립해 사실에 가까운 역사를 기술 정립해야 겠지요.
우리는 신라인들이 중국대륙에서 흘러온 종족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결론된 것은 아직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기록이나 위치로 볼 때 그들이 진한 사람들 중 그 일부였다는 것에서 진한 사람을 밝히는 것이
신라인의 정체를 밝히는 전초가 될 것입니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韓 편에는 진한 사람에 대해 중국 秦나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진의 시황제는 서기전 221년에 이른바 '전국칠웅' 이라는 제.한(韓).조.위.초.연 나라를 모두 병합하여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는데
이때 많은 변방의 민족이 그 노역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왔는데 이들이 진나라 동쪽에 있던
연나라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의 이야기 처럼 마한 동쪽의 진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는 다른 기록에서 '조선의 유민들이 여섯 마을을 이루어 나뉘어 살았는데 이것이 진한의 6부' 라고 하면서
이 진한의 6부가 곧 신라가 되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진한의 6부가 조선의 유민이라는 점 입니다. (여기서 조선이란 고조선을 일컫음 입니다)
"삼국지" 의 '韓' 편에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의 망명자 위만에게 공격을 받아 자리를 빼앗기자,
주위의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 건너 한 땅에 거처하며 스스로 韓 왕이라고 일컬었다" 라는 기록처럼 ,
이는 고조선 백성들이 준왕을 따라 대거 한국으로 망명했다는 뜻이지요. 
준왕은 그 뒤 대가 끊겨 멸망했지만, 그와 함께 망명한 백성들은 그대로 한국 땅에 살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신라인의 모태인 진한의 구성원은 크게 연나라 망명객과 고조선의 망명객으로 나눠질 수 있으며,
이들은 한반도 남동부 지역에 머물며 진변24국을 이뤘겠지요.
진한 12국의 왕은 마한 사람이었는데, 이는 진한이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는 뜻이며 또 진한 주변에는 변한 12국이 있었는데
변한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았고 의복과 거처가 같았으니 이는 변한 사람들 역시 진한과 마찬가지로
연과 고조선에서 온 망명객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12국의 국왕도 마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신라는 진한과 변한 24국 중 하나였고 원래는 사로국이라 불리는 작은 나라였으나
마한(마한 사람은 알타이계의 북방 민족으로 일찌기 한반도로 유입하여 토착한 사람들 )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사로국을 중심으로 진한의 6국이 힘을 모았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서라벌 즉 신라입니다.
 
신라는 원래 서라벌.서나벌.시블.사라.사로.계림 등으로 불리었는데,  여기서 서나.사라.사로 등은 같은 명칭인데
발음만 다르게 낸 것입니다.
계림은 탈해왕 때에 김알지를 계림에서 얻으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하고 혁거세왕이 계정(나정)에서 태어나고
알영이계룡의 옆구리에서 나온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시블을 금국(金國)에 대한 신라식 표현으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신라의 도성을 금성이라고 부른 것을 볼 때,
일리 있는 해석입니다. 국호를 신라라고 확정하게 된 것은 지증왕 4년인 503년 이후부터이며 이는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져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입니다. 

 

 

燕의 망명객이 진한 땅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220년경이었고 고조선의 준왕이 한국에 망명한 것은 서기전 190년경 이었습니다.

이후 이들 망명족들은 마한 왕의 지배를 받으며 지내다가 서기전 57년에 신라가 개국되면서 독자적인 국가가 형성되었지요.

신라의 개국은 박혁거세의 등장과 함께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혁거세의 등장에 관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지극히 신화적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경은 여전히 배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혁거세의 신화를 잘 분석해 보면 그의 등장 배경이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혁거세의 등장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뤘는데,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넷재는 무산의 대수촌,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아촌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 나정 우물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으므로 즉시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게어 보니,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이를 거둬 길렀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그를 존경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을 삼았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은 조금 다르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때에 모두 높은 데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 보니,

양산 밑 나정 우물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왠 흰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가가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게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에 목욕을 시키매

몸에서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고 밝았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 하고 칭호는 거실한(또는 거서간)이라고 했다.

 

「삼국유사」에서는 혁거세를 고허촌장 소벌공이 혼자 발견하여 키운 것이 아니라 마을 촌장들이 함께 발견한 것으로 쓰고 있는 점이

"삼국사기"와 크게 다른 부분입니다.

그러나 양산촌 나정 우물가에서 혁거세를 발견했다는 점은 두 기록이 일치합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혁거세는 양산촌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양산은 급량부의 땅이니, 혁거세는 급량부 출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를 발견하여 키운 사람이 고허촌장 소벌공이라고 했습니다. 고허촌은 사량부의 땅입니다.

이런 사실은 혁거세가 양산촌 출신으로서 고허촌의 지시를 받아 6부의 왕으로 추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고허촌 사람들은 양산촌 출신인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는지 그 의문은 혁거세의 부인 알영의 신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알영이 사량리의 알영 우물에 나타난 계룡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녀를 신격화 하기 위해 꾸민 것이겠지만

그녀가 사량리 출신인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사량리는 고허촌이고 고허촌 사람들이 급량부 출신인 혁거세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바로 고허촌 출신 알영을 왕비로 내세우기 위함이며 이는 진한 6촌의 단합과 아울러 마한의 지배로 부터 독립하자는 의도 였던 것이지요.

이미 언급했듯이 진한의 왕은 마한 왕이 지명한 마한 출신 사람만 될 수 있었고 ,

왕위는 세습이었으며 혈통이 끊기면 다시 마한 왕이

새로운 왕을 파견하거나 지명했던 것이기에,

진한 6부의 촌장들이 모여 왕으로 세운 사람이 마한 사람이 아닌 진한 사람 혁거세 였으니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진한 사람 혁거세가 왕으로 옹립되었다는 것은 진한이 마한의 지배에서 벗어 났다는 뜻입니다.

마한 왕실은 진한의 이런 반란 행위에 크게 분노 했지만 세력이 약화된 마한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마한 왕은 월지국에 머물며 본국에 속한 54국과 진한과 변한의 24국을 지배했는데 신라가 성립될 무렵에는

진한과 변한의 24국은 물론이고 본국의 54국에도 제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진한과 변한의 망명족들은 이런 마한의 약화를 틈타 독립을 모색했고 혁거세의 옹립은 바로 마한으로 부터의 독립선언이었던 것입니다. 

 

혁거세(赫居世)왕은 진한 6부의 하나인 양산촌 출신이며

서기전 69년에 태어나 열세살이 되던 57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세력을 확대하여 진한 6부를 장악하였습니다.

신라어로 표주박이라는 뜻의 박(朴)을 성씨로 삼았는데, 이는 그가 알에서 나왔고,

알이 표주박처럼 생긴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전합니다.

"혁거세"는 '불구내'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이는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는 뜻으로 아마도 '혁거세'는 '불구내'의 뜻을 한자로 옮겨 적은 듯합니다.

혁서세왕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실한' 이었는데 이는 신라어로 왕 또는 귀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신라인들이 왕을 거서간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마한에서 마한에서 왕을 파견하던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거서간(居西干)의 한자 의미를 풀어 보면 '서쪽에 살던 왕'이란 뜻입니다.

신라인들은 마한을 '서한'이라고 불렀으니

'서쪽에 살던 왕'은 곧 마한에서 온 왕을 가리키며

원래 진한의 왕을 마한에서 파견했기 때문에 진한인들이 왕을 거서간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서간이라는 말은 마한 속국 시대의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혁거세왕은 17세가 되던 재위 5년(서기전53년)에 고허촌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맞이하�서 세력을 넓혔고

29세가 되던 재위 17년에 알영과 함께 국내6부를 순회하며 진한 전역으로 영토를 확대 했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진한 6부의 촌장이

뜻을 모아 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진한6부를 복속한 때는 이 무렵으로 보입니다.

31세가 되던 재위19년 정월엔 변한의 일부가 나라를 바치고 항복해 옴으로써 신라국의 영역은 더욱 확대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변한의12국중 상당수는 향후 가야 개국에 참여하거나 백제에 복속되었습니다.)

33세가 되던 재위21년(서기전37년)에 서라벌에 금성을 쌓고 6년 후인 서기전31년에 비로서 궁실을 짓게 되는데,

아마도 이때가 개국 시점일 것입니다.

신라인들이 서기전57년을 개국 시점으로 잡은 것은

서기전37년에 개국한 고구려보다 먼저 세워진 국가임을 내세우기 위한 장치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서기전 57년부터 약 16년 동안은 소국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었고 

서기전31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새로운 국가로 발돋음 한 것입니다.

대개의 국가들이 궁실을 먼저 짓고 그 뒤에 왕을 세워 정식으로 국호를 공포하는 관례에 비춰 봐도 이와 같은 판단이 옳겠습니다.

따라서 '혁거세'왕이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은 39세가 되던 서기전31년으로 보아야 합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삼국유사.박영규님 신라왕조실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