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代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402>재위 356~402.
성은 김씨.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자이며,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이고,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 김씨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미추이사금의 사위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의 왕력(王曆)에는 미추이사금의 아버지인 구도갈문왕의 아들, 또는 미추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말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미추이사금의 동생 또는 조카로도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계보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나, 다만 미추이사금과 일정한 근친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이 때문에 흘해이사금이 후계자가 없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삼국사기》에는 '이사금(尼師今)'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마립간'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 내물왕 때에 '마립간'의 왕호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이해하여 《삼국유사》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립간은 수석장(首席長) 또는 후세의 군장(君長)에 대한 존칭어인 상감(上監)에 해당하는 왕호로 짐작되고 있다. 왕호가 마립간이었다는 사실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국가체제가 정비됨으로써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존엄성이 있는 왕호가 필요해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로써 내물마립간은 신라의 귀족들인 대등(大等)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가 중앙정청 (中央政廳)으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남당(南堂)'에서 주재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통치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내물마립간 이후부터는 박(朴), 석(昔), 김(金)의 삼성(三姓)이 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현상이 없어지고, 김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현상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신라가 고대국가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내물마립간의 이러한 체제내적인 정비는 중국과의 국제관계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여, 377년과 38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부견의 전진(前秦)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382년에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된 위두(衛頭)와 전진의 왕 부견 사이의 대화는 당시 신라의 사정을 살피는 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태평어람 太平御覽》에 인용되어 있는 《진서 秦書》의 기사에 의하면 “그대가 말하는 해동(海東:新羅)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라는 부견의 질문에 대하여 위두는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명호(名號)가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회에 변화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사회의 변화도 당연하다는 것으로서 신라의 고대국가체제 정비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 같은 신라와 전진과의 외교관계는 곧바로 중국문물 수입의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내물마립간대에 와서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하게 된 이유는,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자 신라가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당시의 백제는 왜(倭)와 연합한 다음 왜병을 끌어들여 364년과 393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였다.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를 통합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고, 그 결과로 체제정비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 단독으로는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라는 우호적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399년에 내물마립간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그 이듬해 5만명의 보병, 기병 군사를 신라의 국경지대로 파견하여 백제군과 연합한 왜군을 크게 격파한 일이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신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결과적으로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즉, 고구려와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392년에는 내물왕이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냈다. 401년에 귀국한 실성은 내물마립간이 죽은 뒤에 여러 아들들을 배제시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여기에는 고구려의 압력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런 만큼 신라가 내물마립간 때에 대내적으로는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있었다 해도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에 대하여 군사적 지원을 요청해야 하였고, 그 결과 내정간섭을 받을 정도로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밖에도 내물마립간 때에는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문하거나, 흉년이 든 하슬라(何瑟羅:지금의 江陵) 지방에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제의 독산성주(禿山城主)가 300명의 주민을 이끌고 투항하자 백제와의 외교마찰을 감수하면서 이를 받아주었으며, 동북 국경지방에서는 말갈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大等考(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 古代南堂考(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18代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417> 재위402~417.
성은 김씨(金氏). 알지(閼智)의 후손으로서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인 이리부인(伊利夫人)이며, 왕비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아류부인(阿留夫人)이다. 왕은 신장이 7척(尺) 5촌(寸)으로 매우 컸으며, 명민하고 지혜가 많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왕호가 이사금(尼師今)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처럼 내물왕 이래 마립간을 왕호로 사용하였다고 생각되므로 실성마립간이 옳은듯하다.
내물왕이 죽은 뒤 그 아들들이 나이가 어리므로 화백회의에서 실성을 추대하여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내물왕 때 실성이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하였다고 한 사실과 그가 401년에 고구려로부터 귀국한 다음해에 내물왕이 죽자 내물왕의 왕자들을 제쳐놓고 즉위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왕위계승에는 고구려의 군사적 후원이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403년에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 미사품(未斯品)을 서불한(舒弗邯:伊伐飡)으로 삼고 군국(軍國)의 일들을 위임하여 통치하였다.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왜와의 화호(和好)를 위해서 402년에는 내물왕의 왕자인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고구려와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해서 내물왕의 왕자인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실성왕의 인질외교(人質外交)는 왜와 고구려 양국과의 관계개선 내지 관계유지라는 대외적인 명분도 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전왕인 내물왕의 왕자들을 외국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실성왕계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와는 관계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 이외에 405년에는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명활성(明活城)에 침입해온 왜병을 맞아 싸워서 300여명을 참획(斬獲)하는 군사적 응징도 가하였다. 이밖에 413년에는 평양주(平壤州:지금의 楊州)에 큰 다리를 준공하는 치척도 있었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태자인 눌지(訥祗)가 덕망이 있어서 자기의 왕권을 위협하므로 고구려의 힘을 이용하여 눌지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는 눌지를 지원하여 정변을 일으켜서 실성왕은 살해되었다. 이 정변으로 실성왕의 모계인 석씨세력은 김씨계에 의하여 철저히 타도되어 소멸하게 되었다. 실성왕에 뒤이어 내물왕계인 눌지왕이 즉위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國家形成史硏究(李鍾旭, 一潮閣, 1982)
新羅上代의 Dual Organization(金哲埈, 歷史學報 1952)
新羅奈勿王系의血緣意識(李基東, 歷史學報 53·54, 1972)
新羅國家形成過程의 硏究(文暻鉉, 大丘史學 6, 1973)
<19代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458> 재위417~458.
성은 김씨. 아버지는 내물마립간이고,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며, 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보이는 마립간이 실제로는 내물왕 때 이미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에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 것은 종래의 왕호인 이사금(尼師今)이 마립간과 더불어 내물과 실성의 양대에 걸쳐 혼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92년에 내물마립간이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었는데, 401년에 귀국한 실성은 내물마립간에 이어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실성이사금은 즉위 후에 자신이 외국에 볼모로 갔던 것을 원망하여 고구려를 이용, 내물마립간의 아들 눌지를 해침으로써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눌지에 의하여 살해되고, 눌지는 실성이사금에 이어서 즉위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왕위계승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한듯이 보인다.
그러나 즉위 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418년에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복호(卜好)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켰으며, 또한 왜(倭)와의 화호(和好)를 위해서 실성이사금 때 볼모로 보내졌던 동생 미사흔(未斯欣)도 귀국시켰다.
그리고 고구려에 대해서는 4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433년에는 종래 적대적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455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나제동맹(羅濟同盟)에 입각하여 군사를 파견, 백제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미사흔을 귀국시킨 뒤, 왜가 431년·440년·444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신라를 침범하자 이를 모두 막아내었다.
그리고 450년에는 신라의 하슬라성주(何瑟羅城主) 삼직(三直)이 고구려의 변장(邊將)을 살해한 일로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외교적인 사과로 해결하였다. 이와같이, 불안한 대외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왕실 내부의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하여 왕위계승의 부자상속제를 확립시켰다. 이 때문에 직계인 자비마립간과 소지마립간은 혼란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이밖에도 중앙정청인 남당(南堂)에서 왕이 친히 노인들을 봉양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였고, 저수지인 시제(矢堤:위치 미상)를 축조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모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에게는 우차(牛車)의 사용법을 가르쳐서 화물유통을 쉽게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新羅古代의 Dual Organization(金哲埈, 歷史學報 1, 1952)
新羅奈勿王系의 血緣意識(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1980)
新羅建國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近澤書店, 1954)
<20代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479> 재위458~479
성은 김씨. 눌지마립간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실성이사금의 딸 김씨이고, 왕비는 내물마립간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의 딸 김씨를 461년에 맞아들였다. 눌지마립간대에 마련된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함으로써 보다 강화된 왕권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래의 족제적(族制的)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6부(部)를 개편하는 일이 긴요하였는데, 469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를 지역적으로 구분하여 방리명(坊里名)을 확정함으로써 왕경의 족제적 성격을 탈피하고 행정적 성격을 강하게 하였다.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하여 눌지마립간 때에 체결되었던 백제와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보다 강화하였다. 이 공수동맹에 입각하여 474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백제의 개로왕이 아들 문주(文周)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漢山城)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와같이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증대되자 자비마립간은 백성을 징발하여 니하(泥河:지금의 江陵 南大川), 삼년산성(三年山城:지금의 報恩), 모로성(芼老城), 일모성(一牟城), 사시성(沙尸城), 광석성(廣石城), 답달성(沓達城), 구례성(仇禮城), 좌라성(坐羅城) 등 일선지대의 요새지에 새로이 산성을 축조함으로써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방비와 아울러 이미 확보한 점령지의 효과적인 통치를 꾀하였다. 한편 몇차례에 걸친 왜(倭)의 침입이 있었는데 모두 효과적으로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463년에는 삽랑성(#삽06良城:지금의 梁山)을 침범하고 물러가는 왜병을 크게 격파하였다.한편, 왕은 연해지방의 두 곳에 성을 쌓아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여 이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21代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500> 재위479~500.
일명 비처마립간(毗處麻立干)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자비마립간의 장자로서 어머니는 김씨로 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이며, 왕비는 이벌찬(伊伐飡) 내숙(乃宿)의 딸 선혜부인(善兮夫人)이다. 왕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으며, 스스로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487년에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官道)를 수리하였으며, 490년에는 수도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자비왕대의 경주의 방리명(坊里名)확정과 아울러 족제적 성격(族制的性格)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체제(六部體制)를 개편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소지마립간은 비열성(比烈城:지금의 安邊),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 날이군(捺已郡:지금의 榮州) 등지를 순행(巡幸)하여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지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유식(遊食)하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아울러 농업생산력 증대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지마립간대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지방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거나 혹은 가야와도 연합하여 이하(泥河:지금의 江陵 南大川), 모산성(母山城:지금의 鎭川?)전투에서 격파하였다. 특히, 493년에 소지마립간은 백제의 동성왕의 결혼요청을 받아들여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공수관계(攻守關係)는 더욱 공고해져 494년의 고구려의 신라침입 때에는 백제가, 495년 고구려의 백제공격 때에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와의 전투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三年山城:지금의 報恩)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하여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新羅時代 巡狩의 性格(金瑛河, 民族文化硏究 14, 1979).
<22代 지증왕 (智證王) 또는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437~514> 재위500~51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인데 혹은 지도로(智度路),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한다. 내물마립간의 증손이며,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로 눌지마립간의 딸인 조생부인(鳥生夫人)이며, 왕비는 박씨로 이찬(伊飡) 등흔(登欣)의 딸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왕은 몸이 건장하였으며 담력이 있었다고 한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502년에 순장(殉葬)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주군(州郡)에 명하여 농업을 권장하도록 하였으며, 비로소 우경(牛耕)을 시행하도록 하는 일련의 개혁조처를 단행함으로써 농업생산력증대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이무렵에는 벼농사가 확대, 보급되면서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바로 우경이 시작되던 해에 순장을 금지시켰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도 없지 않겠으나 농업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주목된다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의 발달에 기반을 두고 일련의 정치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우선 503년에는 이제까지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하였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증왕은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국명인 신라의 의미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新 羅者綱羅四方之義).”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명 및 왕호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만이 아니라 신라가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고도한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州), 군(郡), 현(縣)을 정하였는데, 지방제도로서의 주군제도(州郡制度)의 실시는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삼국과의 전쟁에서 얻어진 점령지의 통치와 영토확장의 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하여 새로이 신라의 영역내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적 차원에서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해에 실직주(悉直州:지금의 강원도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신라 최초의 군주(軍主)로 삼은 것도 이러한 지방통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의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軍政的) 성격을 띠었으며,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한편, 군사적으로는 동북 방면에 파리성(波里城), 미실성(彌實城), 진덕성(珍德城), 골화성(骨火城) 등 12개성을 축조하여 대외적인 방비를 튼튼히 하고, 512년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지금의 울릉도)을 복속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남쪽 방면으로는 신라가 아직 무력으로 완전정복하지 못한 아시촌(阿尸村:지금의 함안?)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그곳 주민을 행정적으로 회유함으로써 신라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사전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상복법(喪服法)의 제정, 서울에 동시(東市)의 설치, 선박 이익의 권장 등 일련의 의례와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諡號)를 지증(智證)이라 하였는데, 신라에서 시법(諡法)을 사용하기로는 지증왕이 처음이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新羅小京考(林炳泰, 歷史學報 35·36, 1967)
新羅軍主考(申瀅植, 白山學報 19, 1975)
新羅의 佛敎傳來와 그 受容過程에 對한 再檢討(辛鍾遠, 白山學報 22, 1977)
'신라시대(新羅時代) > 신라역대왕사新羅歷代王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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