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代 법흥왕(法興王)?~540 >재위 514~540.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원종(原宗). 지증왕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 박씨(延帝夫人朴氏)이고,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保刀夫人朴氏)이다.
신장이 7척이나 되고 도량이 넓으며 남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이같은 점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517년에 설치한 중앙관부로서 병부(兵部)의 존재이다.
신라에서 중앙관부로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517년에 비로소 설치된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하여 왕의 직속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재편성한 것이다.
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는데, 이때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7관등과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제정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율령에 의하여 신라내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이 파악됨으로써 통치가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법에 의한 이질적 요소의 강제적 해소는 상대적으로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강화를 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대에 비로소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이러한 상대등이 설치된 배경은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이와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확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므로 왕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그뒤 법흥왕은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지방을 순수(巡狩)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때 본가야의 왕이 와서 법흥왕과 회견하였는데, 아마도 투항 조건을 타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본가야는 532년에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밖에 대아찬 이등(伊登)을 사벌주군주(沙伐州軍主)로 임명하여 서북방면의 점령지를 관리하게 하였다.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등에 힘입어서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536년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 중국의 주변국가가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의 국가임을 자각한 자주의식의 표현이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521년에는 종래의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북조 대신에 남조인 양(梁)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백제의 안내를 받고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초 아마도 눌지왕 때이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불교전래의 경로는 고구려를 통한 것이었다. 초기의 전도자(傳道者), 즉 신라불교 개척자로서의 명예를 지니게 된 것은 아도(阿道)였다. 그는 인도의 승려로서 묵호자(墨胡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서 민간의 전도에 힘썼다. 민간에 전파된 불교는 신라귀족으로부터 동두이복(童頭異服), 의론기궤(議論奇詭)의 사교로 비난받았으나 신라와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마침내 신라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法空)이라 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新羅律令攷(田鳳德, 韓國法制史硏究, 1968).
新羅兵部令考(申瀅植, 歷史學報 61, 1974). 上大等考(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新羅中古期의 對中認識(金瑛河, 民族文化硏究 15, 1980).
< 24代 진흥왕(眞興王)534~576 >재위540~57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혹은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왕태후 김씨가 섭정하였다.
신라의 대외적 발전을 비약적으로 추진시킨 왕이다. 즉위초에는 왕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551년에 개국(開國)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부터 적극적인 대외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550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과 금현성(金峴城:지금의 전의)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듬해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이렇게 확보된 한강하류유역의 전초기지를 기반으로 그해에 백제의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하였으며, 진흥왕은 거칠부(居柒夫)를 비롯하여 구진(仇珍), 비태(比台), 탐지(耽知), 비서(非西), 노부(奴夫), 서력부(西力夫), 비차부(比次夫),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하류유역의 전략적인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맹관계에 있던 백제를 기습공격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유역의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취한 사건은 백제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결혼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의미한다.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인적 물적 자원의 획득 이외에도 황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하여 564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 남조의 진(陳)과 북조의 북제(北齊) 두 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또한, 법흥왕의 가야에 대한 정복사업을 계승하여 낙동강유역에까지 정복의 손을 뻗쳤다. 555년에는 비사벌(比斯伐:지금의 창녕)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이전의 어느 시기에 아라가야(阿羅加耶:지금의 함안)와 비화가야(非火加耶:지금의 창녕)지방이 신라에 의하여 점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한 이후에 백제와 연합하였던 대가야는 사실상 신라에 복속된 처지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그런데 562년 백제의 신라공격에 힘입어 대가야가 신라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를 보내어 무력으로 정복하여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를 완전히 정복하였으며, 낙동강유역 전부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565년에 대야주(大耶州:지금의 합천)를 설치하여 가야지역 통치의 본거지로 삼는 동시에 백제에 대한 방어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밖에도 동북방면으로 북상하여 556년에 비열홀주(比烈忽州:지금의 안변)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군주로 임명하였는데, 이곳을 근거로 하여 568년 이전 어느 시기에는 함흥평야까지 진출한듯하다. 이와같은 고구려. 백제. 가야에 대한 활발한 정복사업의 결과로, 신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은 창녕. 북한산. 황초령(黃草嶺). 마운령(磨雲嶺)에 있는 네 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최근 발견된 단양의 적성비(赤城碑)가 이를 말하여주고 있다. 네 개의 순수비 중 경상남도 창녕군에 있는 창녕비는 561년에, 함경남도 함흥군에 있는 황초령비와 이원군에 있는 마운령비는 568년에 각기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나, 다만 북한산에 세워졌던 북한산비는 건립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의 순수관경비는 새로이 신라 영역내로 편입된 지역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고, 확장된 영역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비라고 할 수 있다. 진흥왕은 이같은 정복활동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우선, 545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국사》편찬에 관계한 이사부와 거칠부가 모두 내물왕계(奈勿王系) 후예라는 점과 당시 왕족의 혈연의식이 상당히 고조되고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중고왕실(中古王室) 왕통(王統)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법흥왕대에 공인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봉불(奉佛)하는 것을 허락하여 주었다. 549년에는 양(梁)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覺德)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자,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영접하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에는 월성(月城) 동쪽에 왕궁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왕궁을 고쳐서 불사(佛寺)로 삼고 황룡사(皇龍寺)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566년에 완공되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사찰로서 이곳에는 574년에 신라 최대의 불상인 장륙상(丈六像)을 주조하여 모셨다. 황룡사가 완공되던 해에는 지원사(祗園寺)와 실제사(實際寺)도 준공되었다.
이렇게, 신라왕실의 보호를 받는 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함으로써 도성불교적 성격(都城佛敎的性格)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형적인 사찰건축 외에도 565년에는 승려 명관(明觀)이 불경 1, 700여권을 진(陳)나라에서, 576년에는 안홍법사(安弘法師)가 《능가승만경 #능08伽勝#만08經》및 불사리를 수나라에서 각각 가져옴으로써 교리적인 발전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또한 572년에는 7일 동안 팔관연회(八關筵會)를 외사(外寺)에서 열어 정복전쟁기간에 전사한 장병의 영혼을 위로하였는데, 이것은 신라 불교가 국가의 현실적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호국불교(護國佛敎)임을 나타낸 의식이었다.
이와같이 진흥왕은 불교의 현실적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한편, 그 자신도 불교에 매료되어 만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의(僧衣)를 입고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여 여생을 마쳤으며, 왕비도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거처하다가 614년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진흥왕대의 업적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화랑도(花郎徒)의 창설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오던 여성 중심의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다.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창설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562년 대가야 정벌시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斯多含)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중흥의 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세 개나 사용할 수 있었다.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그리고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다. 재위 37년 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李基白, 韓國硏究院, 1978).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李基東, 韓國硏究院, 1980) . 眞興大王의 偉業(李丙글, 韓國古代史硏究, 1976).
眞興王征服地域考(津田左右吉, 朝鮮歷史地理Ⅰ, 1913).
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考(今西龍,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33).
< 25代 진지왕(眞智王)?~579 >재위576~579.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사륜(舍輪) 혹은 금륜(金輪). 진흥왕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박씨(朴氏)로 사도부인(思道夫人)이며,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에 이어서 즉위하여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진흥왕의 적손(嫡孫),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왕위계승권자가 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아마도 진흥왕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거칠부(居柒夫)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측은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에 거칠부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재위 4년 만에 정란황음(政亂荒淫)을 이유로 화백회의(和白會議)의 결정에 따라 폐위되었다는 것과,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577년에 이찬(伊飡) 세종(世宗)이 서쪽 변경의 주군(州郡)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축조하여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지금의 보은군내로 비정)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578년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진(陳)나라에 사신을 파견, 진흥왕 이래의 외교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폐위되었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新羅中古期의 對中認識(金瑛河, 民族文化硏究 15, 1980)
< 26代 진평왕(眞平王)?~632 >재위579~63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인데, 혹은 만내부인(萬內夫人)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고 한다. 그는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자 즉위하였다. 진흥왕대를 이어서 왕권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켰는데, 이것은 관제(官制)의 정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여 일체의 국정을 맡기고, 580년(진평왕 2)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81년에 관리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貢賦)를 관장하는 조부(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었으며, 같은 해에 또 거승(車乘)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그리고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으며,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여기서 진평왕대 초기인 580년대에 위화부·조부, 그리고 예부와 같이 중앙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구실을 담당하는 관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이 시기는 신라의 관제발달사상 발전기로서 새로운 행정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수를 규정함으로써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대의 정복국가체제에서 관부정치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진평왕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金龍春)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이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 상사서(賞賜署)와 대도서(大道署)에 대정(大正)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다음으로 584년에 건복(建福)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는 한편,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진평왕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求法行)과 귀국행(歸國行)이 빈번하게 있었는데,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행차와 같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불교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진평왕 7년(585)에 남조(南朝)의 진(陳)나라로 구법을 위하여 떠났던 고승 지명(智明)은 602년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上軍)과 함께 귀국하여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圓光)은 600년에 조빙사(朝聘使)인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大舍) 횡천(橫川)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曇育)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入朝使) 혜문(惠文)과 함께 귀국하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고승들은 종교적인 불사(佛事)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국가사(國家事)에도 참여함으로써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진평왕대에는 진흥왕대의 고구려 · 백제 지역에 대한 영역확장의 결과 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빈번한 침입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 지금의 雲峰)으로 공격하여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침입하여왔다. 이에 진평왕은 양국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원광(圓光)에게 〈걸사표 乞師表〉를 짓게 하고,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해에 수나라 양제(煬帝)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백제는 611년에 신라의 가잠성(#가15岑城)을 함락시키고,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지금의 운봉)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624년 백제의 속함성(速含城:지금의 咸陽)을 비롯한 5성 공격에 대한 신라의 방어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신라는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신라는 수나라를 이어서 618년에 중국의 통일왕조로 등장한 당나라와 621년부터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거의 매년 당나라에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신라가 당나라와 수립한 외교관계는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외교적 견제에 이용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는 625년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빈번한 침입으로 말미암아 당나라에 대한 조공로가 막히게 됨을 호소하니, 이에 당나라 고조는 우선 626년에 사신 주자사(朱子奢)를 신라와 고구려에 보내 양국이 화합하라는 외교적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결과 고구려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도 하였다. 진평왕은 당나라에 의한 고구려 견제라는 외교적 노력을 진행시키는 한편, 628년에 가잠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파하기도 하였으며, 629년에는 대장군 김용춘과 김서현(金舒玄)·김유신(金庾信) 부자로 하여금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지금의 청주)을 공격하여 항복받기도 하였다.
재위 54년 만에 죽었다.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나라 태종(太宗)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兵部今考(申瀅植, 歷史學報 61, 1974).
稟主考(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 27代 선덕여왕(善德女王)?~647 >재위632~647
<,陵 前>
선덕여왕 <陵 後>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의 장녀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이라고 하는 특수한 왕족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년간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했다.
다만 즉위 이래 거의 매년 당나라에 대해 조공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신라는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본격적으로 받았다. 이해에 신라는 백제의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성을 공취당하였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南陽)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장군 윤충(允忠)의 침공으로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陜川)이 함락당하였다.이와같은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9층탑(皇龍寺九層塔)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구원요청에 접한 당태종은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한편 고구려에 대해서는 644년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견제를 가하였으나 이는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그런데 당태종에 의해서 지적되었던 여왕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것을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다.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으니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上大等考(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新羅政治體制の變遷過程(井上秀雄, 古代史講座4卷, 東京學生社, 1962).
< 28代 진덕여왕(眞德女王)?~654 >재위647~654.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만(勝曼).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이다. 진평왕의 친아우〔同母弟〕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며, 어머니는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朴氏)이다. 진덕여왕은 자질이 풍만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毗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閼川)을 상대등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사신의 파견을 통하여 중국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하여왔다. 이에 신라는 압독주(押督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이던 김유신(金庾信)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게 하는 한편, 648년에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宿衛外交)를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지금까지 신라문제에 대하여 소극적이던 당나라의 태종(太宗)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김춘추의 당나라에서의 외교활동은 결과적으로 신라 내정(內政)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여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를,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太和)를 버리고 비로소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였던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의 관제와 연호의 사용 등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나라의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651년에 백관(百官)의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와 품주(稟主)를 개편한 집사부(執事部)의 설치는 왕권강화의 의미를 가지는 정치적 개혁으로 김춘추·김유신 일파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新羅執事部의 成立(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
新羅中古期의 對中認識(金瑛河, 民族文化硏究 15, 1980).
< 29代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602~661 >재위654~661.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龍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인데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으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 왕실(中代 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여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으며,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내에서 새로운 신귀족 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 집단의 반발을 받았으며,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642년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 반환 문제로 말미암아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귀족 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귀족 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것인데, 오히려 김춘추·김유신계의 신귀족 세력에 의해서 30여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 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하여 648년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계속 사용하여 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는데,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하여 신장된 신귀족 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고,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하였던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만큼 화백회의에 의하여 추대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655년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혹은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그리고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던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이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에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으며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친당외교를 통하여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말갈(靺鞨)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하여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黃山之原〕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하였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비성 함락 이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태(金仁泰)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이禮城:지금의 論山) 등 20여성의 항복을 받고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하여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지금의 積城)을 공격해왔고,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지금의 驪州)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타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대나마(大奈麻)로 관등을 높여 주었다. 이해에 압독주(押督州:지금의 慶山)를 대야(大耶:지금의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上大等考(李基白, 歷史學報 19, 1962) . 稟主考(李基白, 李相佰博士華甲紀念論叢, 1964).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新羅政治體制의 變遷過程(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 30代 문무왕(文武王)?~681 >재위661~681.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작은 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비(妃)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智略)이 많았다. 진덕여왕 때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唐)나라에까지 가서 외교활동을 하였다. 부왕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하였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에 태종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이 전쟁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661년에 태종무열왕이 미처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이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하여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 전쟁의 연속이었다.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661) 옹산성(甕山城:지금의 大德郡 懷德面)과 우술성(雨述城)에 웅거하던 백제잔적(百濟殘賊)을 공파하여 항복을 받고 그곳에 웅현성(熊峴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에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지금의 居昌), 거물성(居勿城), 사평성(沙平城), 덕안성(德安城)의 백제잔적을 정벌하였다 .이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부흥군의 중심인물은 백제의 옛 장군인 복신(福信)과 승려인 도침(道琛)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周留城:지금의 韓山, 또는 扶安이라는 설이 있음.)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熊津城)을 공격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孫仁師)의 증원병과 연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지수신(遲受信)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任存城:지금의 大興)마저 정복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문무왕은 664년 백제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熊津都督)부여 융(扶餘隆)과 화맹(和盟)을 맺었다. 한편, 문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위하던 해 당나라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는 한편,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金仁問), 진주(眞珠) 등의 장군을 이끌고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호응하였다. 대동강을 통하여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던 소정방이 이끌던 당군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여 662년 김유신을 비롯한 9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당군에게 군량까지 보급하게 하였으나 소정방은 당나라로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한림(漢林)과 삼광(三光)을 당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고 667년 이세적이 이끈 당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新城:지금의 奉天), 부여성(扶餘城) 등 만주의 여러 성을 차례로 공파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공격하므로 문무왕도 6월 김유신, 김인문, 김흠순(金欽純)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영(唐營)에 파견하여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9월 보장왕(寶臧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將士)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묘(先祖廟)에 고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하여 평양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적 조처는 고구려유민(高句麗遺民)의 항쟁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부흥운동 중에서도 특히 수림성(水臨城)사람으로 대형(大兄)인 검모잠(劍牟岑)의 활동이 가장 두르러졌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安勝)을 왕으로 맞이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70년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다음 4천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므로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金馬渚:지금의 益山)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高句麗王:뒤의 報德王)에 봉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부흥운동도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어 좌절하고 말았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삼국 전체를 자기의 영토로 삼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새로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왕이 옛 백제땅인 금마저에 안승을 맞아들인 것도 고구려부흥운동과 연결하여 당나라 및 당나라와 결탁한 웅진도독 부여 융의 백제군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한편, 문무왕은 670년 품일(品日), 문충(文忠) 등이 이끄는 신라군으로 하여금 63성을 공취하여 그곳의 인민을 신라의 내지로 옮기고, 천존(天存) 등은 7성을, 군관(軍官) 등은 12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671년 죽지(竹旨) 등이 가림성(加林城:지금의 林川)을 거쳐 석성(石城:지금의 林川 동쪽)전투에서 당군 3천5백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당나라의 행군총관(行軍摠管) 설인귀(薛仁貴)가 신라를 나무라는 글을 보내오자 문무왕은 이에 대하여 신라의 행동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사비성(泗沘城:지금의 扶餘)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백제 고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같은해 바다에서는 당나라의 운송선 70여척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에서도 신라와 당나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신라가 백제의 고지를 완전히 점령한 뒤에 침략해온 당군과 전투가 가장 치열하였다. 문무왕 672년 이래로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해옴으로써 신라는 한강으로부터 대동강에 이르는 각지에서 당군과 여러 차례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나라는 674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 대총관(鷄林道 大摠管)으로 삼아 침략해옴과 동시에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왕(新羅王)에 봉하여 문무왕에 대한 불신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신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675년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해에 설인귀는 당나라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을 안내자로 삼아 쳐들어왔으나 신라장군 문훈(文訓)은 이를 격파하여 1천4백명을 죽이고 병선 40척, 전마 1천필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이근행(李謹行)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므로 신라군은 매초성(買肖城:지금의 楊州)에서 크게 격파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 매초성의 승리는 북쪽 육로를 통한 당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676년 해로로 계속 남하하던 설인귀의 군대를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지벌포(伎伐浦)에서 격파함으로써 신라는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는 결국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부터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많은 한계성을 지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은 이와같이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과정에서도 국가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증가한 중앙관부(中央官府)의 업무와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하여 불가피한 조처였던 것이다. 우선,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 잡찬(#잡19飡) 문왕(文王)을 비롯한 문훈, 진복(眞福), 지경(智鏡), 예원(禮元), 천광(天光), 춘장(春長), 천존 등 8명의 인물이 행정책임자로서 집사부 중시(中侍)를 역임하였다. 문무왕은 이 중에서 특히 문왕, 지경, 예원과 같은 자신의 형제들을 중시에 임명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무왕은 671년과 672년에 걸쳐 병부(兵部), 창부(倉部), 예부(禮部), 사정부(司正府)와 같은 중앙관부의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史)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업무처리를 원활하게 하였다.
지방통치를 위해서는 673년 진흥왕대에 이미 소경(小京)을 설치한 중원(中原)에 성을 축조하였으며, 통일한 후인 678년 북원소경(北原小京)을, 680년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어 왕경(王京)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고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5소경제(小京制)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삼국통일 후의 신라군사조직은 신라민과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誓幢)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停)이었다. 여기에서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문무왕이 백제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해인 672년에 백제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또, 같은해 장창당(長槍幢)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 되었다. 이로써 보면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대에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문무왕 672년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州誓)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문무왕의 체제정비작업은 675년 백사(百司)와 주군(州郡)의 동인(銅印)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시호는 문무(文武)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군 감포(甘浦)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海中王陵)인 대왕암(大王巖)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高句麗 對隋·唐抗爭과 麗濟의 崩滅(李丙燾, 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1959).
新羅 執事部의 成立(李基白,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 31代 신문왕(神文王)?~692 >재위681~69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자는 일초(日招).문무왕의 장자이며 66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慈儀王后)이다. 왕비는 김씨인데 소판(蘇判) 흠돌(欽突)의 딸이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 비로 맞아들였으나 오래되어도 아들이 없었으며, 나중에 그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683년에 다시 일길찬(一吉飡)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신문왕대는 태종무열왕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중대왕실의 전제왕권이 확고하게 자리잡힌 시기이다. 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파진찬(波珍飡) 흥원 (興元), 대아찬(大阿飡) 진공(眞功)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으나 모두 평정하였다. 김흠돌의 반란은 왕권전제화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던 것으로서 반란의 원인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신문왕비인 그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한 사실 또는 모반사건 바로 전에 진복(眞福)이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된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사건에는 많은 귀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신문왕은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 가담자까지도 철저한 숙청을 가하였다. 더구나 문무왕 때 상대등이던 이찬(伊飡) 군관(軍官)도 이 반란의 모의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반란사건에 대한 불고지죄(不告知罪)는 군관과 같이 막중한 지위에 있던 귀족을 숙청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이유로 보이지만, 신문왕은 이 기회에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하려는 의도에서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함으로써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이러한 신문왕의 의지는 두 차례에 걸쳐 전국에 반포된 교서(敎書)에 잘 반영되어 있다.
682년에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도 위의 모반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즉 만파식적에는 김흠돌의 반란과도 같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제왕권하의 신라의 평화를 상징하여주는 것이었다. 같은해에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國學)을 설립하고 여기에 경(卿) 1인을 두었다. 이것은 진덕여왕대에 이미 국학에 소속된 대사(大舍)라는 관직을 설치함으로써 국학설립을 위한 준비가 착수되었던 것인데 신문왕대에 와서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불교에도 관심을 두어 685년에는 봉성사(奉聖寺)와 망덕사(望德寺)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신문왕대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증대한 중앙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정비도 이루어졌다.
우선 중앙관부에서는 682년에 위화부령(位和府令) 2인을 두어 인재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장부감 (工匠府監)과 채전감(彩典監) 각각 1인을 두었으며 686년에는 예작부경(例作府卿) 2인을 두었다. 그리고 687년에는 음성서장(音聲署長)을 경(卿)으로 올리고 688년에는 선부경(船府卿) 1인을 더 두어 늘어난 중앙관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사지(舍知)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행정 담당자인 사(史)와 아울러 영(令), 경(卿), 대사(大舍), 사지(舍知), 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가 완성되었다.
지방의 통치제도에 있어서는 689년에 왕경(王京)을 지금의 대구인 달구벌(達丘伐)로 옮기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왕경의 편재에서 오는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미 68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지금의 청주)과 남원소경(南原小京:지금의 남원)을 설치하고 진흥왕대에 설치된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중원소경(中原小京:지금의 충주)으로 고침으로써 5소경제를 정비하였다.
또한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설치하여온 군정적(軍政的) 성격이 강한 주(州)도 685년에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와 청주(菁州:지금의 진주)를 설치함으로써 삼국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의 효과적 지배를 위한 9주제(州制)를 비로소 완성하였는데, 686년과 687년에는 여기에 따른 주·군·현의 정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중앙의 군사조직에 있어서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백제·보덕국 및 말갈인을 두루 포섭하여 9서당(誓幢)을 완성하였다. 내외의 관제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관리의 녹봉으로 지급하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해마다 세조(歲租)를 차등있게 지급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킴으로써 전제왕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와같은 중앙과 지방에 걸친 제도의 체계적 정비를 통하여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질서를 완비한 신문왕은 687년에 직계조상인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중대왕실의 정통성을 수립하는 5묘제(廟制)를 확립하였는데, 이것은 중국제후의 5묘제를 본뜬 것이다. 692년에는 당으로부터 무열왕의 묘호(廟號)인 태종(太宗)이 당의 태종에 저촉되므로 외교적 간섭이 있었으나, 무열왕의 업적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었음을 논함으로써 해결하기도 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낭산의 동남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 新羅史의 時代區分(申瀅植, 韓國史硏究 18, 1977). 新羅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1980) . 萬波息笛說話의 形成과 意義(金相鉉, 韓國史硏究 34, 1981). 新羅幢停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1954).
< 32代 효소왕(孝昭王)?~702 >재위692~70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 신문왕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김흠운(金欽運)의 딸 신목왕후 김씨(神穆王后金氏)이다. 691년(신문왕 11)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92년에 즉위하여서는 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의 ‘이(理)’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피휘(避諱)하여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관부의 명칭을 고치기도 하였다.
즉위하던 해에 대아찬(大阿飡) 원선(元宣)을 집사부(執事部) 중시(中侍)에 임명하여 국정을 위임하였다. 같은해에는 고승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천문도(天文圖)를 왕에게 바쳤다. 천문도는 고구려에 전래된 진탁(陳卓)의 성도(星圖)와 같은 것으로서 왕실권위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의학 교육기관인 의학(醫學)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본초경 本草經》, 《침경 針經》, 《맥경 脈經》 등의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하였다. 695년에 서시전(西市典)과 남시전(南市典)을 두었는데 이것은 지증왕대에 설치된 동시전(東市典)과 더불어 왕경(王京)의 3대시전으로서 물화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이해에 자월(子月:음력 11월)을 정월로 정하였다가 700년에 다시 인월(寅月:음력 1월)을 정월로 바꾸었다. 698년에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을 접견하였으며 699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朝貢)함으로써 양국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유지하였다. 700년에 이찬(伊飡) 경영(慶永, 혹은 慶玄)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698년에 중시로 임명되었던 순원(順元)이 파면되었다. 반란의 구체적인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어려서 즉위한 효소왕의 유약함과 왕자가 없음을 이유로 다음의 왕위계승을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짐작되며 쉽게 평정되었다. 702년 7월에 죽어 망덕사(望德寺)동쪽에 장사지냈다. 능은 경주 낭산(狼山) 동남쪽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韓國醫學史(金斗鍾, 探求堂, 1966) . 韓國科學技術史(全相運, 正音社, 1975).
< 33代 성덕왕(聖德王)?~737>재위702~73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본래 융기(隆基)였으나 뒤에 흥광(興光)으로 고쳤다.신문왕의 둘째아들이며 효소왕과 친형제이다.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므로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왕비는 전비(前妃)로 704년에 승부령(乘府令)이던 소판(蘇判) 김원태(金元太)의 딸인 성정왕후(成貞王后, 혹은 嚴貞王后)를 맞아들였으나 성덕왕 15년에 왕궁에서 내보내고, 이찬(伊飡) 김순원(金順元)의 딸 소덕왕후(炤德王后)를 계비로 맞이하였다.
성덕왕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정치적인 안정을 바탕으로 사회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다. 우선 정치적으로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가 일체의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됨에 따라 전제왕권은 보다 강화될 수 있었다. 아찬(阿飡) 원훈(元訓)이 성덕왕이 즉위하던 702년에 중시에 임명된 이래로 원문(元文), 신정(信貞), 김문량(金文良), 김위문(金魏文), 효정(孝貞), 김사공(金思恭), 문림(文林), 선종(宣宗), 윤충(允忠) 등 10명의 인물이 성덕왕대에 중시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이들 중에서 원훈, 사공, 선종의 경우에는 천재지이(天災地異)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중시가 전제왕권의 안정을 위한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711년에는 왕이 백관잠(百官箴)을 지어 군신(群臣)에게 제시하였다. 백관잠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전제왕권하에서 신하가 지켜야 할 계명(誡命)을 적은 것으로서 유교적인 충군사상(忠君思想)이 주요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성덕왕대에 있어서 귀족세력의 약화는 귀족회의의 대표자였던 상대등의 위축된 활동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성덕왕대에는 효소왕 때부터 활동하던 이찬 개원(愷元)을 비롯하여 인품(仁品), 배부(裵賦), 사공 등 4명이 상대등으로 재직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성덕왕은 국내의 정치안정을 기반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703년에 일본국의 사신을 접견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도 유지하였지만, 특히 당나라와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여졌다. 703년에 아찬(阿飡) 김사양(金思讓)이 당나라에 조공한 이래 36년 동안 당에 파견된 신라의 사절횟수는 43회로서 신라 중대왕실의 다른 어느 왕 때보다도 많았으며 사절의 내용은 주로 조공과 숙위(宿衛), 그리고 하정(賀正)이었다.이러한 당과의 빈번한 외교적 교섭은 신라의 국제적 지위를 확고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문물의 수입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704년에 입당사(入唐使) 김사양이 귀국하여 최승왕경(最勝王經)을 바쳤고, 717년에는 숙위 김수충(金守忠)이 귀국하여 문선왕과 10철(哲) 및 72제자의 화상(畵像)을 바치므로 국학(國學)에 봉안하였다. 이는 전제왕권 안정에 필요한 정치이념으로서의 유교의 적극적 수용의지를 반영한 것이며, 728년에는 왕제인 김사종(金嗣宗)을 당나라에 파견하면서 신라 귀족자제들의 당나라 국학의 입학을 요청하였다.
717년에 의학박사와 산박사(算博士)를 각각 1인씩 두었고, 718년에는 누각(漏刻)을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기술관계의 관직설치와 시설은 모두 유교적 이상정치인 위민 및 농본정책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성덕왕의 위민 및 농본정책은 특히 705년에 동쪽 주군(州郡)의 백성들이 굶주리며 떠돌아 다니므로 관리를 파견하여 구재하였고, 706년에도 국내에 기근이 들자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 구재하였으며, 6년에는 백성들에게 오곡의 종자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722년에는 모든 백성들에게 비로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는데, 정전은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지급한 토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가 실제적으로 백성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영농민(自營農民)이 본래 소유하고 있던 토지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뜻하는 것으로서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그 결과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많은 세를 거두어들임으로써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국방시책으로는 721년에 하슬라도(何瑟羅道: 지금의 강릉)의 정부(丁夫) 2, 000명을 징발하여 북경지방에 장성을 축조하는가 하면 722년에는 모벌군성(毛伐群城: 지금의 경주시 외동면)을 축조하여 일본의 침입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 731년에 일본의 병선 300척이 동해변을 습격하자 이를 공격하여 대파시켰다. 733년에 당나라의 요청을 받고 고구려의 고지에서 건국하여 신라와 사실상 국경을 접하고 있던 발해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735년에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현안이었던 국경문제를 패강(浿江:지금의 大同江)으로 확정지었다. 이로써, 신라의 영토는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이남지역으로 결정되었다. 성덕왕은 이 지역의 민심수습과 북방경영을 위하여 이찬 윤충(允忠), 사인(思仁), 영술(英述) 등을 파견하여 평양주와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의 지세를 조사하게 하였다. 시호는 성덕(聖德)이며, 이거사(移車寺)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왕릉은 현재 경주시 조양동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政治社會史硏究(李基白, 一潮閣, 1977) .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申瀅植, 韓國史論叢 2,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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