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代 신무왕(神武王)?~839 >재위839~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우징(祐徵). 할아버지는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추봉된 원성왕의 아들 예영(禮英)이며,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 어머니는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해진 진교부인(眞橋夫人) 박씨(朴氏)이다. 그가 아버지 균정과 함께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부상하게 되는 것은 헌덕왕 때였다. 812년에 균정은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며,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일어나자 우징 부자는 왕을 도와 반란군을 평정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828년에 우징은 시중에 임명되었다. 834년에 균정이 상대등에 피임되자 우징은 아버지가 재상(宰相)이 되었다는 이유로 시중직을 사퇴하고 대신 김명(金明:민애왕)이 시중이 되었다.그러나 이 조치는 균정과 김명간의 대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흥덕왕이 죽자 그 사촌동생인 균정과 오촌 조카인 제륭(悌隆:희강왕)이 서로 왕위를 다투게 되었다. 이에 김명과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 등은 제륭을 받들고 우징과 조카인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은 균정을 받듦으로써 한때 궁궐에서 서로 싸워 균정은 전사하고, 우징은 김양 등과 더불어 청해진(淸海鎭)으로 도망하여 장보고(張保皐)에게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으나, 838년에 김명이 이홍 등과 함께 다시 난을 일으키자 희강왕은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다. 김명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뒤 균정계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838년 청해진에 의탁해 있던 우징 등이 장보고의 군사 5, 000을 이끌고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하여 진격해왔다. 김양,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鄭年),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이 우징을 받들고 있었다. 이해 12월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武州:지금의 光州)에서 토벌군을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고, 그 다음해 정월 달벌(達伐: 지금의 大邱지역)에서 왕군과 토벌군이 맞부닥치게 되었다. 이때 민애왕을 대신하여 왕군을 이끈 자는 대흔(大昕), 윤린(允璘) 등이었는데, 토벌군에게 대패하였다. 민애왕은 난중에 월유댁(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우징이 왕이 되었다. 신무왕의 즉위는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계(仁謙系)와 균정계세력의 대립에서 균정계가 승리하였음을 의미한다. 균정계가 승리한 데에는 청해진세력과 이미 거세된 김주원계(金周元系)의 후손인 김양의 도움이 컸다. 신무왕은 즉위한 지 반년도 못 되어 죽었기 때문에 별다른 경륜을 펴지 못하였으나, 다만 그는 장보고나 김양에 대하여 배려하고 있었던 듯하다. 839년에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아 2, 000호(戶)의 실봉(實封)을 내렸다. 반면 장보고도 이에 그치지 않고 딸을 왕비로 세우려 하였는데 이것은 청해진세력이 강대해졌음을 알려준다. 신무왕은 장보고 등 왕권에 압력을 가하는 세력을 제압하여야 하는 과업을 앞두고 죽었다. 능은 제형산(弟兄山) 서북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 46代 문성왕(文聖王)?~857>재위839~85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응(慶應)이다. 신무왕의 태자.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또는 定宗太后, 貞從太后), 할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이며 뒤에 성덕대왕으로 봉하여진 균정(均貞), 할머니는 뒤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봉하여진 진교부인(眞矯夫人) 박씨(朴氏), 비(妃)는 소명왕후(炤明王后)이다. 본래 부인으로 박씨가 있었고, 또 뒤에 위흔(魏昕)의 딸로 비를 삼은 일이 있는데, 소명왕후는 이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신무왕은 흥덕왕이 죽은 뒤 계속되어온 왕위쟁탈전에서 승리하여 즉위하였지만 6개월도 못 되어 죽어, 왕위쟁탈 과정에서 쌓여온 많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숙제는 그 아들 문성왕대로 고스란히 넘어오게 되었다. 흥덕왕이 죽자 왕위를 둘러싼 균정계와 원성왕의 장자 인겸(仁謙)의 아들인 충공계(忠恭系)와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이 싸움에서 일단 패한 균정계의 우징(祐徵)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김주원(金周元)의 후손 김양(金陽)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 그 결과 장보고와 김양 등 신무왕을 도운 귀족세력은 그에 상응한 정치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문성왕은 즉위하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봉하고, 예징(禮徵)을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였고 김양에게 소판(蘇判)의 관등을 주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하였다. 반면, 이와같은 귀족세력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841년 홍필(弘弼)의 모반은 그러한 모순의 첫번째였고, 846년에는 장보고의 반란이 있었다. 장보고는 딸을 왕의 차비(次妃)로 세우려 하였는데, 조신들이 해도(海島)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자, 청해진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염장(閻長)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일설에는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데 반대한 인물이 김양이라 하는데, 842년 김양이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우는 기사가 이러한 추측을 낳게 한다. 장보고의 난이 진압되자 851년 청해진을 혁파하였으며, 그곳 민호(民戶)를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시켰다. 궁복(弓福: 張保皐의 별명)의 난 이후에도 정치적인 불안은 계속되었다. 847년 이찬(伊飡) 양순(良順)과 파진찬(波珍飡) 흥종(興宗)의 반란이 있었고, 849년 이찬 김식(金式), 대흔(大昕)의 반란이 있었다. 양순이나 대흔은 모두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전래로부터 계속된 왕위 다툼은 그대로 계속되다가, 857년 문성왕은 숙부 의정(誼靖)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는 유조(遺詔)를 내리고 죽었다. 이것은 그 한달 전에 문성왕을 도와오던 김양이 죽자, 상대등인 의정과 시중인 계명(啓明)이 결합하고 왕을 핍박하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 47代 헌안왕(憲安王)?~861>재위857~861.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의정(誼靖) 혹은 우정(祐靖)이다. 신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아버지는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봉해진 균정(均貞)이고, 어머니는 충공(忠恭)의 딸 조명부인(照明夫人, 혹은 昕明夫人) 김씨이며, 할아버지는 예영(禮英)으로 원성왕의 아들이다.슬하에 딸이 둘 있었는데 모두 다음 왕인 경문왕의 비가 되었다. 그리고 궁예(弓裔)는 왕의 서자로 알려져 있다.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 아버지인 상대등 균정과 처남인 시중 김명(金明) 사이에 왕위계승문제로 암투가 격심하던 흥덕왕 말년(836)에 중국 당나라에 사행(使行)하였고, 왕위계승쟁탈전이 일단락된 뒤, 즉 문성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시중을, 그뒤에는 병부령(兵部令)을 거쳤다가 다시 849년에는 상대등에 임명된듯하다.
그리고 857년에 서불한(舒弗邯, 角干)으로서 조카인 문성왕의 유조(遺詔)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초에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사람이 많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 .861년 1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지 오래되었으므로 왕위를 사위인 응렴(膺廉:경문왕)에게 선위하고 그달 29일에 죽었다. 공작지(孔雀趾)에 장사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 48代 경문왕(景文王)?~875>재위861~875.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膺廉), 혹은 의렴(疑廉)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김씨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김씨이고,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晸: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曼: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 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에는 興輪寺僧이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 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舍知)인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玄琴抱曲〉, 〈대도곡 大道曲〉, 〈문상곡 門詳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伊飡) 김정(金正)을 상대등으로, 아찬(阿飡) 위진(魏珍)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 왕비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의 모반, 874년 근종(近宗)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리하여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歷史學報 80, 1980).
< 49代 헌강왕(憲康王)?~>재위875~88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정(晸).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로 봉해진 헌안왕의 큰딸 영화부인 김씨(寧花夫人金氏)이다.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며,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동생으로 황(晃: 뒤의 정강왕), 만(曼:뒤의 진성여왕), 윤(胤)이 있었다. 서자로 요(嶢)가 있어 뒤에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하여졌다.
즉위한 뒤 헌강왕은 불교와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아울러 가졌다. 876년과 886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설치하고 친히 가서 들었다. 이러한 왕의 사찰행(寺刹幸)은 불력에 의한 국가의 재건과 왕실의 안녕을 위한 출행이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망해사(望海寺)가 세워진 것도 헌강왕대이다.
879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博士)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였으며, 883년에는 삼랑사(三郎寺)에 행차하여 문신들로 하여금 시(詩)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79년에 신홍(信弘)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하였다.
그뒤 헌강왕대에는 신라가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에 왕이 좌우를 거느리고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서울의 사방을 바라보면서, 백성들의 집이 볏짚이 아닌 기와로써 이어졌고 밥할 때 장작이 아니라 숯을 땐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헌강왕대에 신라 하대사회의 위기의식을 나타낸 기록이 보이고 있다.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하였을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실려 있다. 헌강왕이 포석정(鮑石亭)에 갔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니,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 御舞祥審〉(혹은 御舞山神)이라 한다. 또 헌강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 북악신(北岳神)과 지신(地神)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地理多都波)”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한편, 동해안의 개운포(開雲浦)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處容)을 만나 데리고 왔다. 그리하여 〈처용가 處容歌〉가 만들어졌다.그런데 처용을 지방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其人制度)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또한 886년 봄에는 적국(狄國)인 보로국(寶露國:지금의 안변군 서곡면 ?)과 흑수국(黑水國)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은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朝鮮金石總覽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5, 1980).
< 50代 정강왕(定康王)?~887>재위886~88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황(晃).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추봉된 계명(啓明)이고, 할머니는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추봉된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맏딸로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하여진 영화부인(寧花夫人)이다. 정(晸:헌강왕), 만(曼:진성여왕), 윤(胤)과 형제간이다.
짧은 재위기간 동안에 887년에 정월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였고, 이찬(伊飡) 김요(金요) 가 한주(漢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5월에 병이 들어 시중 준흥(俊興)에게 병이 위급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아들이 없으므로 누이 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고 부탁하고, 7월 5일에 죽었다. 보리사(菩提寺)동남에 묻혔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歷史學報 80, 1980).
< 51代 진성여왕(眞聖女王)?~897>재위887~897.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헌강왕)·황(晃:정강왕)·윤(胤) 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지금의 光州)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시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羅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過程(李基東,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郎徒, 韓國硏究院, 1980)
< 52代 효공왕(孝恭王)?~912>재위897~912.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 헌강왕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文資王后)로 추존된 김씨부인이다.
할아버지는 경문왕이고, 할머니는 헌안왕의 장녀 영화부인(寧花夫人)이며, 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이다.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자색이 뛰어난 한 여자를 만났는데, 뒤에 헌강왕이 궁궐을 빠져나가 그 여자와 야합하여 태어난 아들이다. 뒤에 이 사실을 안 진성여왕에 의하여 헌강왕의 혈육이라 하여 895년에 태자로 봉하여지고, 뒤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재위시 신라는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서 지방에서 일어난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형세였다. 우선, 지금의 청주나 충주 이북지역은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궁예는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고, 904년에 백관(百官)을 설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는 907년에 서남쪽에서 점점 세력을 키운 견훤에게 일선군(一善郡:지금의 善山)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다. 한반도에서 궁예와 견훤의 세력다툼은 점차 열기를 더하여 갔다. 한편, 궁예의 부하 왕건(王建)은 903년 병선(兵船)을 이끌고 금성(錦城) 등 10여 군현을 공취하였다. 이후 서해의 해상권은 대체로 왕건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909년에 왕건은 진도군과 고이도성(皐夷島城)을 공취하였으며, 견훤이 중국 오월(吳越)에 보낸 사자를 나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910년에 왕건은 나주를 다시 뺏기 위하여 포위공격하여 온 견훤군을 대파하였다. 서해상에서 왕건의 전승은 그가 다가올 사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정세 속에서도 신라왕실의 실정(失政)은 계속되어 911년에는 대신 은영(殷影)이 효공왕의 천첩을 죽여 왕정을 경계하기까지 하였다. 죽은 뒤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도 하고, 혹은 사자사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는 구지제(仇智堤) 동산(東山) 기슭에 묻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金哲埈,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 53代 신덕왕(神德王)?~917>재위912~917.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경휘(景暉 또는 景徽), 본명은 수종(秀宗). 아달라왕의 원손으로 아버지는 정강왕 때 대아찬(大阿飡)을 지냈고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兼, 또는 銳謙)이다. 일설에는 예겸은 의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며, 비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懿成王后)이다.슬하에 승영(昇英), 위응(魏膺)이 있었는데, 승영은 경명왕이 되었고 위응은 경애왕이 되었다.
신덕왕대의 신라는 실제로 경주지역을 다스리는 데 그쳤고, 국토의 대부분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세력권 속에 들어가 있었다. 궁예의 부하인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한 이후 그들의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가는 동안 신라의 명맥은 겨우 유지되는 형편이었다. 916년에 이르러서는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비록 이를 함락시키지는 못하였으나, 그것은 곧 신라의 심장부에 비수를 겨누는 격이 되었다. 이때의 신라왕실은 스스로 후백제나 태봉(泰封)의 공격을 막아낼 만한 힘이 없었다. 장지는 죽성(竹城:위치 미상)이라고도 하고 혹은 화장하여 잠현(箴峴)에 묻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高麗史. .後三國時代의 支配勢力의 性格에 대하여(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 54代 경명왕(景明王)?~924 >재위917~924.
성은 박씨, 이름은 승영(昇英). 아버지는 신덕왕,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 懿成, 孝資王后),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 그러나 일설에 예겸은 신덕왕의 의부(義父)이고,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角干) 문원(文元)이라고 한다. 경명왕 때에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실제 신라왕실은 왕경(王京)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지역을 다스리는 데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궁예(弓裔)와 견훤(甄萱) 등 지방세력에게 빼앗겼다. 특히, 918년(경명왕 2)에 일어난 현승(玄昇)의 반란으로 신라는 그 운명을 더욱 재촉하게 되었다. 같은해 궁예 휘하의 인심이 돌변하여 왕건(王建)을 추대하였고, 궁예는 피살되었다. 그뒤 왕건과 견훤이 패권을 다투게 되었으나, 이들의 패권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이들과 신라왕실과의 연결이었다. 따라서 안동이나 합천지역에서 이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하였으나, 싸움은 결국 해상권을 장악한 왕건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 경명왕 때에는 여러가지 변괴가 있었다고 하는데,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벽화의 개가 울었고, 927년에 황룡사탑(皇龍寺塔)의 그림자가 사지(舍知) 금모(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물렀으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뜰로 쫓아나왔다는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설화기사의 이면을 생각해볼 때, 당시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불안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위 7년 만에 죽으니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이곳에서 화장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高麗史 . 高麗史節要 . 新羅三代考(末松保和, 新羅史の諸問題, 1954).
< 55代 경애왕(景哀王)?~927 >재위924~927.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 아버지는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 의성왕후(義成王后 또는 資成·懿成·孝資王后)이다. 할아버지는 선성대왕(宣聖大王 또는 宣成大王)으로 추봉된 예겸(乂謙 또는 銳謙)이다. 일설에는 예겸이 신덕왕의 의부(義父)라 하여, 친할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문원(文元)이며, 할머니는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봉된 순홍(順弘)의 딸 정화부인(貞花夫人)이라고도 한다. 경애왕 때 후삼국의 패권다툼은 이미 왕건(王建)쪽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925년 고울부장군(高鬱府將軍) 능문(能文)이 항복하였고, 927년 강주(康州: 지금의 晉州)의 왕봉규(王逢規)가 관할하는 돌산(突山) 등이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건과 견훤(甄萱)은 잠시 싸움을 그치고 강화하였는데, 견훤이 보낸 질자(質子)인 진호(眞虎)가 고려에서 죽자 견훤은 926년 다시 출병하여 고려를 공격하였다. 927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여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궁궐을 노략질하면서 경순왕을 세우고 돌아갔다. 한편, 경애왕 때 황룡사에 백좌경설(百座經說)을 설치하고 선승(禪僧) 300여명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을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라 부르며, 대규모 선승 모임의 시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高麗史 . 高麗史節要.
< 56代 경순왕(敬順王)?~935 >재위927~935.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효종이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며,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이다. 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일을 머물렀다.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무덤은 장단에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高麗史 . 高麗史節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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